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김지하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선생님께서는 내 짧은 인생에서, 초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막내의 손을 잡아 교실 문 앞까지 데려다 주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그런 분이셨다.
-이현주(목사?동화작가)
1. 좁쌀 한 알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한국 생명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무위당(혹은 조한알) 장일순선생의 서거 10주기를 기념하여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에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무위당 장일순의 일화집 겸 서화집이다.
교육자이자 서예가이며 당대의 큰 어른. 70년대엔 지학순주교와 더불어 반독재투쟁을 한 재야운동가로, 김지하를 비롯한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선 수많은 인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큰 족적을 남겼던 장일순 선생. 1994년 서거 당시 ‘내 이름으로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공식적인 기념사업을 자제하다 올해로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그 세세한 면모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21세기적 삶의 방식이라 할 생태적 영성의 세계관을 꿰뚫고 각 분야의 인사들에게 사회 운동의 영감을 불러 넣어준 배후의 인물이자 숨은 어른. 해방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현대사의 험난한 역정 속에서 늘 시대 흐름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번도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올곧은 정신. 첨예한 정치가이며 운동가였지만 이웃과 제자, 가족과 친인척 같은 일상의 관계에서도 모순 없이 인격의 조화를 이루며 한없이 존경 받았던, 마치 원효와 같은 해탈인. 태어나 중학교부터 대학까지의 서울 유학 시절을 제외하면 평생을 원주에서 지낸 생명지역주의(bioregion)란 관점에서의 진정한 지역인.
이 책은 그렇게 평생을 원주의 가난한 이웃부터, 정치적?사상적 지도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있었던 숱한 일화들을 선생 생전의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게끔 펴낸 국내 최초의 책이다. 또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재야 서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글씨들과 그림을 수록한 서화집이기도 하다.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고 불려질 정도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파격적인 이웃사랑. 해탈한 인간의 한국적?현대적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숱한 일화들. 장일순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외면하기 일쑤인 질문의 가슴 뛰는 답을 듣는다.
2. 조한알 장일순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 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 "걷는 동학" 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 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궁금하다. 장일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고, 30대 초반에는 "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삼십 대 중반에는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장일순은 그 뒤로 "파워 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 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말하자면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고, 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 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 곧 생명의 세계관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아니 전 세계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고, 요컨대 평생 돈벌이 한 번 하지 않고 했는데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제가와 평천하를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잘 아울렀다.
거기에는 가문의 힘도 있었다. 장일순은 3대를 통해 핀 꽃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흔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할아버지를 "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드럽되 한 마디, 한 행동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일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단 한 번을 보고 장일순에게 크게 반했다는 김종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3. 편집과정의 뒷얘기들
이 책은 장일순 선생의 사후, 생전에 장일순 선생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했거나 뜻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무위당을기리는모임’에서 10주기 기념사업
(별첨 참조) 중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원래는 수많은 장일순선생의 서화만을 정리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었으나, 서화집은 성격상 주위 사람들이나 식자층으로 독자가 국한되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일순선생의 삶을 알리기에는 일화가 제격이겠다 싶어 지금의 모양처럼 일화와 함께 보는 그림과 글씨 모양의 책이 되었다. 그 대신 방대한 장일순선생의 서화는 보존가치가 있는 온전한 서화집으로 펴내기로 다음을 기약했다.
2002년 겨울부터 약 1년 6개월에 걸친 많은 인터뷰는 마치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운동 인물탐방 같았다. 리영희. 김지하, 박재일, 임재경, 이창복, 김정례, 김민기 등 우리가 익히 이름으로만 듣던 70년대와 80년대의 인사가 망라되었다. 또한 원주캠프라 불리우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던 ‘사회개발위원회’의 멤버들 역시 원주라는 도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장본인들이었다. 장일순의 교류 범위는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부터 고관대작까지 참으로 방대했다. 인터뷰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이름 없는 사람들까지 되도록 아무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제작과정에 여러 가지 뜻밖의 일들이 많았다. 서화를 촬영할 사진가를 수소문하던 수일 전 청년시절 함께 일했던 충주의 윤병진 님이 10여년 만에 연락을 해온 것이 그 첫 번째 사건이었다. 책이 되기 전에 원고를 읽었던 성공회 대학의 김용호 교수는 이제까지 읽어본 책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책이었다는 독후감으로 우리를 기쁘게 했다. 교정과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신은주 님과 아르떼의 안광욱 실장은 이 일을 하는 동안 그림과 글씨, 그리고 원고의 내용을 읽으며 가슴이 훈훈해지며 행복해지는 특별한 경험했다는 말로 또 한번 우리를 기쁘게 했다. 이 글을 쓰는 편집자도 많은 책을 만들었지만 이 책처럼 책 만드는 일이 행복했던 원고는 없었다. 생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원고를 읽으며 장일순선생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일하는 사람 모두를 한없이 위로하고 행복하게 한 원고. 아하!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너나 없는 체험을 선사한 원고가 바로 이 책이다.
4. 대표적인 일화들
(삼 년 동안 단 하루도)
칠그림을 하는 양유전의 20대 때의 일이다. 그 때 양유전은 장일순을 일주일에 한 번씩 무려 3년을 만났다. 여럿이 모이는 게 아니었다. 독대였다.
3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런데 그 3년 동안 장일순은 단 한 번도 무단히 빼먹거나 소홀히 한 일이 없었다 한다.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한다. 일이 있어 집을 비울 때는 꼭 메모를 남겼고, 늦을 때는 언제쯤 돌아오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몸이 고달픈 날은 “오늘은 좀 힘들군.”하면 양유전이 알아서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는 식이었다 한다.
그렇게 3년이 다 돼 갈 즈음에는 집에 앉아서도 장일순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훤히 보였다 한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양유전에게 전화를 걸어 장일순을 만나려고 하는데 가도 되겠냐고, 집에 있겠냐고 묻기까지 했다 한다.
장일순의 집은 지금은 집 옆으로 큰 길이 났지만, 그 때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파출소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야 했다. 울타리가 없었다. 노간주나무를 빙 둘러 심어 울타리 대신 쓰고 있었다. 장일순의 집은 본채 옆에 있는 창고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양유전은 장일순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100퍼센트 알 수 있었다 한다. 거기서 방안이 들여다 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순전히 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안 계시구나 싶은 날은 “선생님”이 아니라 “사모님” 하고 부르며 들어갔다 한다.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이 3년이나 된다면 그런 게 가능하리라. 택시 운전수 3년이면 한 눈에 저 사람이 택시를 탈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5년이면 그 사람이 갈 행선지까지 알 수 있다 하지 않는가! 가는 사람은 가는 사람대로 맞는 사람은 맞는 사람대로 서로 좋은 경험을 했으리라. 그 3년이 두 사람을 키웠으리라!
(돈은 줬으면 그만)
장일순이 아홉 살 때 일이다. 장일순은 그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돈을 꿔 가고는 안 가져옵니다. 제가 가서 독촉을 할까요?”
“가지 마라. 너도 자식을 키우잖니? 돈은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어 못 가리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 마라.”
(조 한 알)
한겨레21에서 일하는 정재숙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조한알이라는 그런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장일순이 그 말을 듣고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긋이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
장일순은 호가 여러 개였다. 호암湖岩, 일초一草, 한도인閑道人, 청강靑江, 일충一?, 무위당無爲堂, 모월산인母月山人, 일속자一粟子 혹은 조 한 알.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썼던 것은 청강과 무위당과 일속자였다. 나머지는 잠깐 쓰다 말았다.
(손님을 하늘처럼)
최정환은 원주의 번화가에서 ‘천석’이라는 밥집을 하고 있다. 그 밥집을 시작할 때 장일순은 최정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가 여기서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쟁반을 3년만 나르다 보면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아주 큰 도인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리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늘의 일로 여기고 늘 마음 챙기기에 거짓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서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크게 자랄 수 있으리라.
(칼로 찔러도)
한원식은 농부다. 일찍 아버지를 잃는 바람에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한 몫 잡을 생각으로 빚은 내어 지었던 배추 농사가 장마로 거덜이 나며 큰 전환을 맞게 됐다. 그 때 한원식은 크게 깨닫고 방향을 돈벌이 농사에서 땅을 갈지 않고, 농약과 비료를 하지 않고, 풀을 두고 가꾸는 자연농으로 바꿨다. 그 뒤로 한원식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로 늘 신이 나 살고 있다. 나날을 축제처럼 살고 있다. ‘얼씨구 절씨구.’가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한원식이 처음 장일순을 만나 한 말은 이랬다.
“한국에 농부는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장일순은 웃는 얼굴로 한원식을 건너다 보았다. 그 눈길이 아주 따듯했는데, 그게 장일순의 대답이었다.
“세상의 농심이란 농심은 모두 다 라면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원식이 말하는 세태 비판이었다. ‘참, 말이 싱싱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장일순은 한원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로 한원식이 말하고 장일순은 들었다.
한원식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장일순은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옳은 말을 하다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 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 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듯하게 말하며 돌려주라구. 거기까지 가야 돼.”
(한 시간 동안 애국가)
심상덕은 장일순과 가까웠다. 심상덕은 장일순의 권유로 서예실을 내게 됐고, 그 서예실은 장일순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장일순은 심상덕의 서예실에 수시로 들렸고, 글씨나 그림과 관련된 일은 주로 심상덕을 시켜 처리했다.
이 두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줄곧 애국가를 부른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춘천에서 서예 전시회가 있었다. 거기 가기 위해 원주에서 붓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단체로 버스 한 대를 대절했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노래판이 벌어졌다.
심상덕 차례가 왔다. 곤란했다. 심상덕은 평생 노래를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집안 내력이었다. 어머니도 그랬다 한다. 학교 다닐 때도 매를 맞고 말았을 만큼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 날도 심상덕은 곤혹스럽게 앉아 있었다. 동요라도 한 곡 불러 보라고 옆에서는 채근을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으랴. 그 모습을 먼발치로 장일순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날 점심 때 장일순이 찾아왔다.
“얘, 동주야. 나가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
심상덕은 호가 동주였다. 두 사람이 간 곳은 야외에 있는 음식점의, 그것도 뚝뚝 사이를 떼서 지어놓은 원두막 가운데 하나였다. 밥을 시키고 장일순이 말했다.
“우리 소주 한 병만 마시자.”
그 소주병이 비어갈 무렵이었다.
“어제 봤다. 오늘 우리 같이 노래 하나 하자.”
노래란 말이 나오자 심상덕은 깜짝 놀란 얼굴로 펄쩍 뛰어 뒤로 물러앉으며 손사레를 쳤다. 장일순이 곡진하게 타일렀다.
“한 곡만 익히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쉽다.”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또 부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러니 그냥 내버려둬 주세요.”
“동요 같은 것은 아는 게 있을 게 아니냐? 하나가 어렵지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다.”
“동요도 아는 게 없어요.”
장일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애국가로 하자. 애국가는 여러 번 들어 대충 기억을 하고 있을 게 아니냐?”
심상덕도 더는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그 애국가도 처음에는 장일순이 먼저 부르면 심상덕이 뒤에서 따라 불렀다. 나중에는 같이 부르기도 했다. 한 시간이나 그렇게 보냈다.
심상덕에게 물었다.
“그래, 그 뒤로 노래를 부르게 됐어요?”
아, 그 게 전부라고 했다! 일생 동안 장일순과 한 시간 동안 애국가를 부른 게 전부라 했다!
심상덕도 대단하고, 장일순도 대단하다! 달리 무슨 말을 하랴!
(금일봉의 행방)
설날에 원주 시장이 장일순에게 새해 인사를 와서 돈이 든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장일순은 안 받으려 했으나 시장은 막무가내였다.
시장이 돌아가고 바로 뒤로 천주교 벽지 보건팀에서 여럿이 함께 장일순에게 세배를 하러 왔다. 세배를 주고받은 뒤 장일순이 곁에 놓여 있는 봉투를 집어 그들에게 주며 말했다.
“이 거, 시장님이 여러분에게 드리라고 놓고가신 거야. 갖다 잘 쓰세요.”
벽지 보건팀은 그런 줄 알고 봉투를 받아들고 장일순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에 어떤 모임에서 벽지 보건 팀의 리더인 독일 사람 지그리드 지그버드가 원주 시장을 만났다. 돈 봉투 생각이 나서 지그리드는 고맙다고 시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 일 있은 뒤로는 원주 시장이 봉투 가져오는 일이 없어졌다 한다.
(니 사랑 많이 받았잖니)
김진성이 가톨릭 센터 근처에서 “치악공방”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방을 운영할 때의 일이었다. 그 때 장일순이 오며가며 들렸다.
“얼굴을 좀 씻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서 하면 되냐?”
어느 더운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공방 뒤에 여러 집이 같이 쓰는 수도가 있었다. 장일순이 얼굴을 씻을 때 김진성은 수건 생각을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깨끗한 수건이 없었다. 오래 써서 먼지와 때와 땀에 절은 수건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장일순이 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김진성은 그 수건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수건이 이것밖에 없는데------.”
장일순이 웃으며 그 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네 땀내가 아주 좋구나!”
환풍이 잘 안 되는 좁은 방에서 먼지가 많이 나는 나무 작업을 한 탓일까, 김진성은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기침이 자꾸 났다. 오래도록 멈추지 않는 기침이 때를 가리지 않고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아내와 자식을 벌어먹여야 했기에 쉴 수도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장일순이 와서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김진성은 고마웠지만 받을 수 없었다.
“선생님도 어려우신 걸 제가 뻔히 아는데-------. 그리고 저는 아무 것도 해 드린 게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 내가 니 사랑 많이 받고 있잖니?”
완강하게 거절하는 김진성 앞으로 흰봉투를 밀어놓으며 장일순이 말했다.
“얼마 안 돼. 미안해.”
(기어라)
금대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금대리는 원주에서 제천쪽으로 가다 보면 시내에서 차로 일이 십 분쯤 걸리는 곳에 있다. 수량이 많은 물, 한적한 계곡이 좋아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장일순이 일행과 함께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었다. 길목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밥을 먹으며 한 잔 한 얼굴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술 힘을 빌려 장일순에게 평소에 품었던 의문 하나를 털어낼 생각으로 앞으로 썩 나섰다.
“선생님?”
“그래, 왜?”
“선생님은 남들 보고는 기어라, 기어라고 하면서 정작 선생님 자신은 기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대단한 질문이었다. 과연 장일순이 어떻게 나올지 모두 구미가 부쩍 당긴 얼굴을 하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장일순은 짬을 두지 않았다. 바로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절을 했다. 포장도 안 된 흙길이었다.
물은 사람은 물론 양쪽 일행은 장일순의 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다. 남에게 자기를 낮추는 일. 늘 다짐을 하면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는 수행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니까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출 수 있어 좋다 한다.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사람도, 자기 욕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에게는 하나님이란다. 그렇게 하니 아무에게도 함부로 할 수가 없어 누구하고나 잘 지내게 됐다 했다.
(군고구마)
드라마 작가인 홍승연은 이런 글을 보내왔다.
“글씨를 써서 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받침대를 판 사람도)
합동 전시회 때였다. 장일순도 작품을 냈는데, 작품 아래에 붙인 작가 소개의 글이 특이했다.
글씨:장일순
석각:김진국
받침대:김진성
장일순이 쓴 글씨를 김진국이 돌에 새기고 받침대는 김진성이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개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만 밝히는 게 통례인데 장일순은 굳이 돌에 새긴 사람과 받침대를 만든 사람의 이름까지 밝힌 것이다.
다른 전시회에서는, 일테면 1988년 그림마당 민에서 했던 전시회에서는 먹을 간 사람, 표구를 한 사람, 액자에 쓸 나무를 준비한 사람 이름까지 다 넣었다.
먹즙: 아무개
목공: 아무개
표구: 아무개
하루는 장일순이 김진성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밥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는데, 나가보니 원주 시장이 밥값을 내는 자리였다. 전시회에 냈던 작품을 장일순에게 선물로 받은 원주 시장이 답례로 만든 자리였다.
장일순이 김진성을 소개했다.
“받침대는 이 분이 팠어요. 김진성이라는 분입니다. 글씨 쓴 저만 나올 수 없어서 같이 불렀습니다.”
장일순이 소개를 이어갔다.
“가톨릭 센터 근처에서 치악공방이라는 이름의 공방을 하고 있어요. 아주 착한 사람입니다. 혹시 일이 있으면 시켜 보세요. 잘 할 겁니다.”
김진성은 자신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 주는 장일순이 무척 고마웠다. 어디서 그런 대접을 받아보랴 싶었다. 물론 석각을 한 김진국도 그 자리에 초대를 받고 와 김진성처럼 최대의 공대를 받았다.
장일순의 글씨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