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 백’이면 장어구이를……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일, ‘재미없는 동화’ 읽기를 하고 있는데, 늦둥이 딸아이 단디가 전화를 했다. 단디 전화는 언제나 반갑다. 희한하게도, 단디는 전화기만 들면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된다.
단디의 첫 전화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서너 살 때였으리라.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단디였다. 그런데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 ‘아빠, 보고 싶어!’방금 빠이빠이 하고 집을 나섰는데. 그새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쳤을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인가 했다. 사정은 이랬다. 쌍둥이 오빠 서이랑 장난감을 다투다가 제 엄마한테 혼이 났던 모양이다. 혼자 삐죽거리다가 갑자기 ‘아빠, 보고 싶어!’하고 통곡을 하더란다. 그 모습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주었단다. 그날 뒤로 단디는 한동안 제 엄마한테 혼이 나기만 하면 전화해서 ‘아빠, 보고 싶어!’하면서 울먹였다. 서너 살 먹은 아이도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오늘 단디의 전화 용건은 장어구이 외식에 관한 것이었다. “아빠, 장어 먹으러 가자.” 그러나 단디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장어구이를 먹는 것이 아니다. 토막을 쳐서 손질한 장어도 아직 신경과 근육이 살아 있어서 불판에 얹으면 뜨거워서 파닥거리는데, 단디는 그런 장어를 뒤집어가며 굽는 것을 아주 재미있어 했다. 그러니까, 단디의 말은 장어 구우러 가자는 것이었다.
“오늘은 말고. 「한반도의 공룡」을 봐야 하거든. 기말시험 보고 가자. 시험 잘 보면 그날 가고 잘 못 보면 다음날 가자.” 장어구이집에 가는 건 단디한테는 이미 기정 사실이었다. 언제 가느냐만 문제일 뿐이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언제 가느냐는 기말시험으로 정하자고 한다. 일종의 내기다. 그런데 내기치곤 좀 이상한 내기다. 일단은 넘어가자. 참, 시험 잘 보고 못 보고는 뭘로 판단하지? 나의 물음에 대한 단디의 대답은 거침이 없다.
“올 백이면 잘 본 거고, 올 백이 아니면 못 본 거지.” 올 백이 아니면 못 본 거란다. 중간시험에서 받은 점수가 과목별로 80점 안팎이었던 주제에. 게다가 올 백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안다. 이름값 하는 건가. 경상도 사투리에 ‘단디’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단단히, 야무지게’다.
2. ‘올 백’에 관한 뒷이야기
단디는 ‘올 백’이 전 과목 100점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교 안이든 밖이든 영어를 배운 적이 전혀 없는 초등학교 1학년인 단디가 ‘올 백’의 ‘올’이 영어 ‘all’임을 알 리는 없을 터. 정황이나 사건 또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말뜻을 스스로 이해했을 게 틀림없다.
애 엄마한테 알아본 바, 사단은 아이들 생일 잔치였다. 중간시험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디는 생일을 맞았고 반 친구 몇몇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얼마 뒤에는 우리 쌍둥이가 반 친구들 생일에 몇 번 초대받았다. 이때, 아이들의 엄마들도 수인사를 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1학년이라 친구들 집을 잘 못 찾아서 엄마들이 데려다주고 데려가고 하다가 그리 되었단다. 이런 경우, 화제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일 수밖에 없다. 중간시험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리고 엄마들의 그 수다를 아이들도 들었을 것이고. 어떤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제 엄마한테 직접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제 엄마가 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것을 엿들었는지도. 어쨌든, 아이들은 어느새 ‘올 백’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애 엄마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지난번 중간시험에서 단디의 쌍둥이 오빠 서이네 반에서는 올 백이 14명이나 나왔단다. 반 아이는 모두 35명인데. 엄마들의 수다에서 얻은 정보라 하니 좀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다른 초등학교 1학년생의 ‘올 백’을 확인한 바 있어서 한 반 14명의 ‘올 백’도 있을 수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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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디, 「시험치던 날」 , 2008. 12. 1. | 처음부터 초등학교 1학년생의 ‘올 백’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올 백’은 실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방지축인 초등학교 1학년생이 실수 없이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또 있었다. 서이의 반 친구 아무개는 지난 중간시험 기간에 새벽 1시까지 시험공부를 해서 전체 5과목 중 4과목은 만점을 받았고 1과목은 95점을 받았단다. 그 시각까지 공부를 시키는 엄마가 있고 시킨다고 공부를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렇게 한 보람이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그나저나, 그 아이가 이번 기말시험 때는 새벽 2시까지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엄마들이 혀를 깨물면서까지 초등학교 1학년생을 새벽까지 책상머리에 붙잡아 두는 까닭은 아주 단순했다. 무시당하지 않게 하려고. 주눅 들지 않게 하려고. 단디의 말을 들으니 참 가관이었다. 공부를 못하면 모둠 활동에서 심부름이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심부름을 시키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고. 초등학교 1학년생이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공부를 못하면 얼마나 못할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바로 그걸로 줄 세워진다. 다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에 의해서.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다 안다. 그래도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핑계로 삼는다.
3. 어른의 말을 바로잡는 아이의 말
단디는 ‘올 백’이면 시험을 잘 본 거고 ‘올 백’이 아니면 잘 못 본 거라고 했다. 이것은 단디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단디 자신의 말은 아니다. 어른한테 들었던 말이거나 어른의 마음을 읽은 말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 내가 라면을 끓이면 단디와 서이는 곧잘 엄마만큼 맛있게 끓인다고 말한다. (물론 엄마보다 맛있게 끓인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혹평이라 해 봐야 ‘처음에는 맛이 없었는데 자꾸 먹으니까 맛이 있네.’ 정도다. 우리 쌍둥이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어른은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 어른은. 정말 칭찬할 줄 모른다. 칭찬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칭찬할 게 없어서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말이다. 텔레비전 공익광고로‘아무도 이등은 기억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대는 나라인데 칭찬할 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어린 선수들이 국민 앞에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구며 울먹일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아, 그런데 단디 또한 극단적인 이분법과 일등지상주의에 물든 소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단디도 곧 칭찬을 아끼게 되겠지. 나의 라면 요리가 낙제점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시험 때문이다. 시험을 치는 학교 때문이다. 학교는 이렇게 아이들한테 못된 것부터 가르친다.
단디의 말이 모두 어른의 말인 것은 아니다. 단디 자신의 말, 그러니까 아이니까 할 수 있었던 말도 있다. 바로 그 말이 우리 어른을 달뜨게 한다. 단디는 시험 잘 보면 시험 치는 날 장어 먹으러 가고 잘 못 보면 그 다음날 가자고 했다. 이 말은 분명 잘함과 못함에 대한 내기의 제안이다. 그러나 잘함에 대한 보상과 못함에 대한 처벌을 엇걸어 놓은 내기는 결코 아니다. 못함이란 ‘조금 덜 잘함’일 뿐이니, 이에 대한 대우 또한 ‘처벌’이 아니라 ‘조금 덜한 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단디의 생각이다. ‘올 백’이 잘함이라면 ‘올 95점’은 조금 덜 잘함이고, ‘올 90점’은 ‘조금 덜 덜 잘함’인 것이고……. 그렇다면, ‘올 10점’을 받더라도 장어구이를 먹으러 가는 보상을 받을 만하다. 어쨌든 잘함은 잘함이니까. 물론 ‘올 백’보다 하루 늦게 보상을 받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단디의 말에는 제 말(아이의 말)과 남 말(어른의 말)이 뒤섞여 있다. 단디한테는 이러한 뒤섞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 말을 귀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제 말을 귀하게 여길 줄 알면 남 말도 보듬어 줄 수 있는 모양이다. ‘올 백’에 대한 어른의 고정 관념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은근슬쩍 그것의 허위의식을 허물어 버리는 멋진 제안을 내놓는 단디를 보면 말이다. 그런데 단디가 언제까지 제 말을 귀하게 여기게 될까. 이것은 전적으로 단디가 만나는 어른한테 달렸을 것이다. 단디의 주변 어른이 단디의 말을 아껴 주지 않으면 단디 또한 자신의 말을 아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부터 돌아본다. 혹시 단디가 초등학교 1학년이라서 그저 오냐오냐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단디가 이미 쳤거나 이제 쳐야 할 시험과 같은 일제고사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교육 정책 때문에 망할 교육이라면 이미 수천 번 망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을 이만큼 이끌어 온 이는 교육당국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니다. 오직 학생 자신이다. 바로 ‘개떡처럼 가르쳐도 찰떡처럼 배우는 우리 아이들’이다. 교육당국과 교사와 학부모가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말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교사이자 학부모인 나 자신한테 다짐하는 말이다.
12월 5일에는 아무 약속도 잡지 말아야겠다. 단디의 기말시험 다음날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