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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뭉치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최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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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드라마틱한 죽음과 정조의 효심, 노론과 왕의 상호 세력 견제, 근대로 넘어오는 계몽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의 치적이 맞물려 '이걸 어떻게 요약해서 왕릉연재에 다 쓰냐' 는 탄식부터 나왔다. 왕릉연재는 말 그대로 왕릉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정조라는 군주의 위대함은 자료를 찾고 찾을수록, 공부를 거듭할수록 렌즈의 초점이 광범위해지기만 했다. 세습왕조에 어떻게 이런 군주가 나올 수가? 하는 경탄과 탄성이 거듭될수록 정조를 적은 매수의 글로 쓸 수는 없다는 고민도 거듭됐다. 실상 그렇다. 왕릉연재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한 시대를 주도한 왕을 한정된 글로 요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고 뼈저리게 느낄 때다. 500년 역사와 그 시대를 주도했던 27명의 국가경영자를 일방적인 교육으로 받아들인 잣대로 본다는 것 역시 무리라는 것을 절감했다. 현재의 역사도 움직이고 있지만 과거의 역사 역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과거사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이런 고민을 한참 하고 난 뒤에 정조의 재조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평가서가 나오고 있으므로 역시 내 잣대로 왕릉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 갈등은 조선이 정조 이후로 급속도로 몰락한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조가 그렇게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하는,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는 못난 내 아쉬움에서 이런 고민이 돌출했다고 봐야겠다. 종기로 승하한 정조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24년간 재위한 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한다. 조선 후기부터 왕의 독살설이 오가기 시작했고 정조 역시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후대에 회자된다. 당시 실록을 살펴보면 정조의 죽음은 6월 14일 가벼운 종기로 내의원 서용보를 불러 진찰을 받는 데서 시작한다. 그날로 정조는 의관 서용보를 교체해버리고 약방문을 직접 불러주고 약을 짓게 했다. 등에 난 가벼운 종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겨우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보름 동안 실록에는 여러 차례 정조가 일일이 약방문을 직접 지정해주고 달여 오라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조는 의원과 약과 탕제를 손수 의논했고 어떤 약을 쓸 것인지와 몇 번 먹을 것인지까지 결정했다. 이 기록은 정조의 의학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의원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한 것은 정조가 여러 번 진찰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고름이 다 빠지고 열이 내려 차도가 있을 만하면 다시 도지는 정조의 등창종기는 불과 보름만에 왕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결국 왕은 11세 어린 왕세자에게 대보를 넘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정조의 꿈과 비원은 49세, 한창 일할 나이에 돌연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은 정조라는 군주를 잃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꿈이 꺾이고 말았다.
십 수년 후란, 세자(순조)에게 전위하고 독자적인 왕의 병권과 경제기반을 갖춘 상업도시 화성행궁으로 은퇴하겠다는 정조의 비원이었다. 세종과 정조 중 누가 더 위대한 왕이냐는 어리석은 비교는 금물이다. 조선전기인 세종의 시대와 정조의 시대는 비교하는 정치 기준이 다르다. 흔히 조선 500년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시선부터 바꿔야 한다. 세종은 태종의 비호 아래 자신의 이상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대신들이 움켜쥔 병권을 되찾아오는 데만도 15년 이상 걸린 왕이었다. 정치 발전 역사의 정석대로 라면 대신이 병권을 쥐고 왕권이 약해진 것은 발전된 정치형태겠지만 문제는 이 신권이 쥔 권력이 민주정치의 발판이 아니라 가문만의 기득권을 세세손손 누리려는 권력이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조선, 근대로 발돋움하려던 우리의 역사는 뒤로 후퇴해버리고 만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던 무리를 벽파라 했고 같은 노론이지만 반대한 무리를 시파라 했다. 시파에는 남인이 포함됐고 이들이 정조의 이상정치에 등용됐던 인재군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와 정조의 이상향이었던 화성은 시들어버린다.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정치의 구현을 현안 과제로 삼은 정조는 정치 안정을 확보하면서 왕조중흥과 문화정치를 이룩하려 했다. 그의 정치 이상이 담긴 역사적 사업이 신도시 화성의 경영이었다.
정조가 죽은 지 5일 후 순조가 등극한다. 순조가 등극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그날로 당장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한다. 윤행임을 도승지로, 박준원을 어영 대장으로, 황인점 등을 종척의 집사로 삼는 교지를 내린 정순왕후는 잇달아 심환지를 영의정, 이시수를 좌의정, 서용보를 우의정으로, 이만수를 예조 판서, 이득신을 공조 판서로 바꿔치운다. 이렇듯 숨가쁜 인사가 7월 4일 하루만에 일어났다. 벽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11월 6일 현융원(융릉) 경내 옛 수원부 강무당(講武堂) 터가 길지(吉地)라면서 정조를 이곳에 장사지낸다. 수렴, 충렴과 함께 무당터, 병영터 또한 풍수에서는 흉지로 친다. 강무당이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병영터다. 조선의 계몽군주, 위대한 국왕 정조는 벽파에 의해 병영터 흉지에 묻히게 된 것이다. 풍수에 박식한 정조가 이 꼴을 봤으면 가슴을 치고 한탄했으리라. 그 후 순조 21년(1821) 3월 9일 효의왕후가 69세로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하자 정조의 흉당이 거론되어 9월 13일 옛 수원부 구 향교 터에 건릉을 천장하며 합장릉이 된다. 융릉과 직선 거리로 50m 떨어진 정조의 능상은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다. 융릉은 정조가 정성을 기울여 조성했지만 병풍석만 있고 난간석까지는 차마 쓰지 못했다.
어찌 보면 고종이 사도세자부터 조선 왕조를 다시 수립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춘 고종의 이런 절차는 일말 이해가는 일이나 정조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화산(花山)을 주산으로 삼아 부자가 나란히 누워 잠든 융건릉은 황구천을 사이에 두고 정조의 정치적 위용을 상징하던 화성성곽과 화성행궁이 건너편에 있다. 정조는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고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화성과 화산의 융건릉은 정조의 꿈과 이상이 동시에 담겨있는 유적지다. 19세기에 잃은 정조와 같은 국가경영자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그때 정조의 주위에 포진하던 노론벽파 세력 같은 무리들이 없다면? 겨울바람이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스산하게 쓸고 지나가는 건릉 능상 위에서 화성 쪽을 어림잡아 바라보며 어리석은 해답을 찾는 내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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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원에 있는 융릉/건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