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산동 초가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은 두 부부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한 오지호(1905∼1982)는 우리 나라 근대유화의 1세대인 고희동의 교육과 나혜석의 영향을 받아 유화에 눈뜨기 시작했다. 근대미술사에서 오지호는 유화 수용 제2기에 활동했던 화가이다. <도쿄 미술학교>에 유학 시절부터 민족미술의 수립을 위해 신미술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최초의 순수서양화단체인「녹향회(綠鄕會)」를 발족, 1929년 4월에 그 창립전을 열기도 했다. 동경유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화필을 잡기 시작한 그는 김주경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원색 화집을 제작하면서 어두운 화폭에 갇혔던 민족의 빛과 영혼을 밝은 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1948년 광주에 내려와 정착하여 <광주미술 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대학교 미술과 창설에 힘썼고, 196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남 지역의 서양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는 서양의 인상주의 미술을 소화하여 독자적이고 생동감 있는 필치로 풍부한 색채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국전 초대작가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등의 중책을 맡아 한국미술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전남도전을 창립, 지방 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면서 구상회화 우위의 기념과 이론으로 광주 화단에 유화 화풍을 고착시켰다. 더욱이 오지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가였으며 이와 함께 국어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한문폐지론이 등장할 때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나부」(28) 「아내의 상」(36)「사과밭」(37)「선운사 설경」(79) 등이 있다. 저서로 원색판 『오지호작품집』(78), 미술평론집『현대회화의 근본문제』, 미학원론으로 『미와 회화의 과학』, 시론(試論集) 『알파벳 문명의 종언』 등이 있다. 그의 두 아들과 손자들도 미술을 전공하여 그의 집안은 화가 집안이 되었으며, 아들 승윤은 지금도 아버지가 살던 초가집을 지키면서 화업을 잇고 있다.

오지호 작 임금원 (1937년) 30호
1910년대부터 고희동, 나혜석, 김관호 등의 주도(主導)로 유화가 도입된 이후 1930년에 이르러서 한국 화단의 유화는 두터운 화가층과 그룹활동에 힘입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오지호는 누구보다도 유화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로 수용한 화가였다.
동경미술학교 수학 시절, 당시 일본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외광파(外光派)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활동은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았다. 오지호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는 데 이르렀던 것이다. 1930년대의 지배적 화풍은 향토주의였다. 그리고 향토주의를 추구했던 국내 화단의 중심에 서 있었던 화가가 오지호였다. 한국의 자연, 풍토, 정서 등을 화폭에 담아내었던 향토주의는 인상주의 화풍과 결합하여 급격하게 확산되었는데,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우리 나라의 이상적 자연묘사에 그쳤을 뿐 진정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오지호는 우리 나라 자연의 밝고 명랑한 풍광을 밝은 색채로 작품에 담고자 했다. 또한 인상주의만이 미술의 본질이라는 생각으로 평생 인상주의 화풍만을 고집했으며,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왜곡된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지호 작 과수원, 1960, 캔버스에 유채ㆍ50Ⅹ60 ㎝
오지호 작품세계의 주인공은 빛에 의한 밝은 색채이다. 특히 색채 중에서도 '한국적인 빛'을 표현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한국의 빛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 풍경을 화폭에 담은 화가였으며 작품 <남향집>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향집>은 말 그대로 집이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햇빛이 잘 드는 집으로 이는 오지호가 개성에서 직접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오지호의 '남향집'( 캔버스에 유채, 80.5×65㎝, 1939).
햇빛이 내려앉은 초가에 어린 소녀가 부엌의 문지방을 넘고 있고, 강아지도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이 풍경은 한국적인 정서를 물씬 풍기는 한국적인 색채를 발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선명한 사계절 자연미와 연중 거의 청명한 날씨의 밝은 햇빛과 공기를 나름대로의 특유의 화법으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인상주의 회화를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생동적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구사로 자연주의 회화에 일관했다. 그는 단순히 인상주의를 토착화시켰다는 의미를 넘어, 근대 화단에 민족의 혼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부산항. 1979년 캔바스에 오일. 60.5X45.5 Cm
오지호는 자연을 사랑하고 특히 햇빛을 사랑하여, 인상파적인 기법으로 색채를 분할하여 표현하곤 하였다.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림자에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 않았던 인상주의 회화의 영향인지 나무 그림자를 파란 색으로 처리하였다. 밝은 햇살이 드리운 한낮의 한가로움이 잘 드러나 있으며, 청색과 노란 색의 색감이 선명하다.
1950년대의 흥취어린 색채와 필치의 시골풍경과 화분의 꽃, 온실의 싱싱한 관상식물을 주로 그렸으며, 1960년대에는 한결 중후하게 이루어진 붓놀림과 주제 대상을 단순화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자회색조와 짙은 자주색조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면서, 야산과 어선 및 바다풍경을 정감있게 그려냈다. 예컨대, 청록색의 숲과 가옥의 붉은 지붕색 등이 부드러운 분위기로 색조화를 이룬다.
오지호에 의해서 표현된 우리나라의 빛은 한국적인 색채를 찾은 것이었다. 결국 오지호에 의해 우리나라의 기후와 정서에 맞는 인상주의가 정립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현수/미술대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