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침상에 누워 눈동자만 굴리고 말하고 남의 도움으로 살아간지도 어언 27년이 되었다 차라리 태어날때부터 장애인이 이었다면 부모님의 고생은 더 시켰을 망정 지금처럼 옛 생각 때문에 현실의 암담함을 절감하는 것만은 줄이지 않았을까.......청년시절 정열과 꿈과 야망이 꽃처럼 피어오르던 한창때 그 꿈과 야망을 키워가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추억은 나를 암울한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겨우 펴기 시작한 두 날개를 무참히 부러뜨렸고 세상에 원망의 화살을 무수히 날려 보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비극의 주인공에 발탁이 되었나 하며 믿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울부짖어 댈 뿐이다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지구는 여전히 돌고 아침해는 떠오를 수가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꿈일 것이다 어서 깨어나야지
대구에서 명산이라 꼽히는 팔공산 기슭의 조그마한 미곡 마을의 오남매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난 날 다들 그랬듯이 우리 집도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작은 가내공업은 날로 어려움이 가중되어 갔고 나는 어릴 적부터 대나부껍질을 벗기는 작업에 신물이 날 즈음에 철공소에 취직을 하여 집안을 도우 는데 나섰다 건강한 몸을 밑천으로 하여 열심히 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러나 동료 직원 기술자의 횡포에 손이나 팔을 불에 데이기 일쑤였고 어린 나이라 기술은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겨우 초등학교를 나와 이 세상에 적응 하기는 힘들었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나로서는 철공소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대구시내 중심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거리를 활보 하며 젊음에 부풀어 들뜬 마음은 좀처럼 제갈길를 찾지 못했다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처럼 느껴졌고 터질 것 같은 젊음을 주체할 수 없어 술과 폭력의 수렁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어머님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지만 갓 스물을 넘긴 그땐 난 알도리가 없없다 불혹의 나이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왜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을 좀더 열심히 살지 못했을까 후회를 해보지만 때는 늦었다.
1979년 9월 더운 여름이 가을에 쫓겨 달아날 즈음 그날도 젊음을 만끽하고 하루 일을 마감하는 시간에 쫓겨 급히 오트바이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술도 끊고 사랑하는 진아와 결혼의 꿈도 가지면서 형님의 도움으로 삼광공업사 란 철공소을 차리고 열심히 일을하였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의 도전장을 내밀고 있을 줄이야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오는 승용차에 부딪쳐 내 몸은 공중을 날아 길가 논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살아 있다는 느낌뿐 어느 한곳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곳은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중환자실 병상이었고 스물셋의 나이로는 감당하긴 너무 힘든 중벌이었다 밥 솥가락 조차도 입으로 가져갈 수 없는 모양새로 전략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비로 서 형제와 어머님의 소중함을 알았고 나하나의 불행이 온 식구의 불행이 되어서 크나큰 짐으로 우리 가정에 자리 잡았다 어머님의 몸과 마음의 수고로움은 눈물로 씻기에도 모자랐고 소변을 보기위해 꼽아놓은 호수 때문 에 방광염 이생겨 피고름이 나는가 하면 오래 누워있음 으로 인해 수반되는 욕창은 날 이갈수록 커저 뼈가 하얗케 들어나 살이 썩는 냄새는 온방을진동시 꼈고 그 괴로움은 나 한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 짖은 안개로 다가왔다
나 또한 움직이는 송장일 뿐 무엇 하나 이루지도 가지지도 못한 채 나는 날개마저 영영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 누구보다도 마음껏 활동하며 바깥세상을 살아본 나로서는 죽고 싶도록 괴로웠지만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전신 마비 자가 되고 말았다 사고 나기 전부터 사귀던 진아는 잠시도 나의곁 을 떠나지 않고 일년 동안 병간호을 했다 그러나 회복 되기는 커녕 악화만 되니 더 이상 정아를 붙잡아 둘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의곁을 떠나줄것을 간청 했으나 정아는 울면서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어머님과 형제분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정아는 결국 나의 곁을 떠났다 6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어두침침한 방에서 누워 아픔으로 젊음을 사하고 있을 때 형님의 소개로 아마추어무선 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도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가 무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가 무척 그리웠고 혼자라는 것이 너무 외로워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85년 5월 6년만의 첫외출은 찬란한 했볕이 나를 반겨주었고 잃었던 미소를 되찾아 주었다 6년만에 다시보는 저 시냇물 살아 움직이는 잡초들 엉키고 서로 보듬어 않고 살아가는 들꽃이 나를 반기는듯 했다 서른이 되도록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살아있음이 이렇게 마음 설레일 줄이야 힐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하늘을 처다보니 풋풋한 공기가 나를 위해서 삶의 숨소리를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6년만의 첫외출로 시험장 맨뒤에 누워 시험을 봤으나 낙방하고 86년도에 합격하여 87년 6월 HE5JFK 호출부호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개국하여 난 또다 른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척추 장애인으로써는 한국 최초로 아마추어 무선사가 된 것이다 어둔한 손으로 무선설비를 조작 하는데 힘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단절 되었던 외부와 교신하면서 느끼는 희열은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기에 충분 했으며 대학축제 와 아마추어 가족 야유회 송년의밤등 을 참석하면서 차츰 사회생활에 익숙해졌다
88년부터는 한국응급 구조단 무선봉사대원 으로 활동 하면서 교통사고. 산불. 응급환자 발생의 무전 연락을 받고 해당 관서에 신고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팔공산 동봉 정상에서 50대의 한 아주 머니가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져 꼼작도 못하고 있는 것을 마침 한 햄 회원이 보고 SOS를 요청해오는 무전 연락을 받고 119에 연락해 헬기가 출동했으나 부상자는 찾지못하고 있는 것을 햄회원 으로부터 무전연락을 받아 헬기에 중계해주어 30여분 만에 부상자는 구조할 수 있었다 이극적인 장면은 나중에 KBS 긴급구조 119 시간에 방영되기도 했다 무선을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많나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서 차츰 사회생활에 익쑥해졌다 그러나 장애인의 한사람으로써 이 사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살아 가는대는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내가 장애인의 한사람 으로서 이런 어려움을 격고 있는데 또다른 장애인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평소 장애인 복지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 노동식 (장애2급)씨를만나 한국장애인 봉사협회 는 설립하여 철저하게 소외된 중증 장애인 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방이 사무실 이였고 내전화는 장애인의 손과발 역화를 담당하기에 이르면서 이 뿌듯함을 어디에 비기어 삶의 무게를 달아볼까 흥분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날개 없이도 날수 있는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료 결혼상담 부터 시작하면서 차츰 주위의 관심이 조금씩 모아지면서 중증장애인 병원 또는 외출 시 차량봉사, 이. 미용 ,가사보조, 외출동행 ,심부름 ,목욕봉사등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봉사는 물론 사랑의 문고를 개관하여 장애인 분들과 일반인들에게도 무료로 책을 대여 해주고 있으며 사랑의 전화를 개통하여 장애인들의 결혼.법률.취업.교육.재활등의 상담을 했다 그리고 봄가을 일년에 두차레 있는 야유회 행사는는 바깥구경 이라고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들에게는 손꼽아 기다리는 중요 행사 중의 하나이고 장애인 가요제 와 영세 장애인 가정 생활보조금 지원 무료예식 합동결혼식을 주선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려 나가도록 도와주웠다
이런 모든 일들을 해나가는 데는 HAM 동우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은 절대적 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순조롭지 만은 않았지만 나로 인하여 즐겁고 기뻐할 여러 장애인들을 생각하며 어떤 어려움이라도 해처 나가야만 했다 18년이란 긴 세월동안 눈물과 한숨을 안으로 삭이시며 잠시도 내 곁을 떠나 지 못하고 손발이 되어주시던 어머님께서 퇴행성관절염으로 거동이 힘들어 수술을 해야 하고 완치되려면 일년이 걸리는 큰 수술을 해야만 하는데 나의 식사 문재와 대. 소변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2시간 만에 몸을 돌려 눕혀 줘야만 하는데 어머님이 입원을 하시면 당장 나의생활이 큰 어려움이 있어 수술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오래 전부터 장애인 분들은 위해 봉사를 해오시던 분이 결혼을 자청해 왔다 주위의 숱한 오해를 받으며 우리는 95년 9월 많은 친지와 자원봉사자 동료 장애인 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지 며칠 후 어머님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시고 완전하지는 않으시지만 바깥출입도 하시고 건강이 많이 완쾌 되셨고 아내도 산업 전선에서 열심히 이를 하면서 앞날에 대한 설계를 하곤했었다 앞으로 우리의 꿈은 아내가 결혼할 때 하던 말 내가 당신 한사람을 도 와 주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장애인은 도울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한국장애인 봉사협 회를 알차고 참된 협회로 키워 나가며 다른 장애인 가정에 모범이 되는 가정을 꾸려나가요 라며 우리 는 무척 행복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생각 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 했었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라면 이겨나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났을 즈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 때문일까 다툼이 잦아지고 서로가 미워하며 함께 살기 힘들 정도라 합이 이혼을 했다. 정말 잘살고 싶었었는데 어이없는 일이였다 당장죽고 싶었지만 손가락도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어머님과 가족 여러분들 에게 또 한번의 큰 죄를 짖는 것만 같아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련이라 믿으며 짧은 시간 이였지만 즐거웠던 일들만 생각하며 몇 년전부터 시작한 동양철학 공부을 두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분에 팔공산 철학원을 개업하고 작은 수입 이지만 어려운 장애인 또는 결식아동. 독거노인 분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98년에는 대구문화예술공연봉사단을 창단하고 장애인시설 및 단체, 양로원, 군부대, 교도소 위문공연과 신부전증환자 돕기(장애인 부부)음악회 개최 500만원 치료비 지원, 대구시민위한 음악회, 경주문화엑스포 공연, 한여름 밤의 폭염음악회. 외국인근로자. 노숙자 위한 음악회등 250여회 공연했으며 2001년부터 매년 홀로 계시는 독거노인 위한 합동칠순잔치상을 차려드리고 한복과 금반지 선물. 친구분들 300분초청 식사와 다과접대 그리고 예술공연봉사단의 공연을 하였으며 1999년 대구지방검찰 청학교폭력예방 위원회 전문선도강연위원 강사로서 대구. 경북지역 중고등학교에서 전교생 대상으로 강연도하였다
27년이란 긴 세월동안 손가락도 하나 제마음대로 움직일수 없는 전신마비자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여러분들의 사랑에 힘입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998년 MBC선정 좋은 한국인 대상 수상과, 99사회봉사부문 신지식인 선정, 2005년 TBC선정 자랑스런 대경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도 하나 제 마음되로 움직일수 없는 전신마비자가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회활동을 할 수 있고 큰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우리 가족과 자원봉사자로 함께하신 여러분들의 도움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베풀어 주신 은혜 보답코저 외롭고 소외된 분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며 또 하나의 큰 소망을 위해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말씀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