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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자
어떤 책에서 보니까 팔복을 “천국의 계단이다” 이렇게 표현한것을 보았어요. 사실 계단처럼 이것 다음에 이것, 그렇게 한 단계식으로 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여덟가지 복 모두가,
천국으로 연결된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그 계단 올라가면 천국의 행복이 분명히 있는거에요.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임한 하늘의 행복인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참 행복인거에요.
자 그동안 뛰엄 뒤엄 올라왔지만 꽤 높이 올라왔어요. 오늘은 여섯번째 시간입니다. 그동안 여러분 행복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행복지수도 많이 높아지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복은 마음이 청결한자의 복이에요. 9절말씀 함께 외워봅니다. 시작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마음이에요. 마음이 좋다.
마음이 아프다. 그런분 없으시겠지만 지금 설교들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
……….. Heart. Mind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의 지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죠.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마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거에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서 마음이 깨끗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의 주인공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먼저 청결의 의미를 한번 보겠어요. 이 청결이란 말의 원어를 찾아보았더니 (카타로스란 말을 쓰는데) 두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번째 의미는 순전한 것을 말합니다. Pure…순도 100%,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것이죠.
두번째 청결이란 의미는 이렇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든 상태에요.
주로 옷을 세탁할때 이 말이 쓰여 젔어요. 옷을 입고 있다보면 여러가지 것이 묻습니다.
김치 국물도 흘리고, 때도 타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별의 별것이 다 묻습니다. 이것을 세탁하는 것입니다. 깨끗해 지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큰 짐이 생깁니다. 마음이 청결한자가 행복하다.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릴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누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느냐 하는거에요. 누가 불순물 하나 끼지 않는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늘 깨끗하게 세탁된것 같은 그런 마음이
될 수가 있느냐 하는거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것입니까?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나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가능케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라도, 어떤 노력으로도 불 가능한거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거에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처절한 아픔의 피로, 택하신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덮어주신거에요. 베드로전서를 보면 이런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자 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완전히 깨끗하지 못하지만,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믿고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실때에 그 피로 정케됨을 입게 되는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입니다. 에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하실것이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정결케 된거에요. 죄의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육신의 소욕이 깨끗이 세탁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에요. 이마에 성령의 인침을 받은 새 사람이 된거에요. 그래서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는 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뵐 수 있는, 하나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는 복된 사람들이 된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문제가 뭐에요? 우리가 세상에 산다는거죠. 이 험악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살다보니 불순물이 다시 섞여 들어 가거든요. 세상을 살다보니 별별
때가 다시 끼는거에요. 눈에 보이는게 있어요. 귀에 들리는게 있어요.
삶의 현장에서 매일 부딪히는게 있거든요. 더군다나 우리의 속에는
sinful nature…타고난 죄성이란것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지를 않습니까? 구원받고 청결해진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지만 다시 더러워지고
불순물이 끼고 하는거에요. 사탄마귀가 이미 패배자가 되엇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괴롭혀 볼려고 덤벼 들거든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불 완전한것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마치 세계2차전쟁때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거에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때 이미 전쟁은 사실 끝난거에요. 나머지는 소탕작전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치열해요. 곳곳에서 총성이 있어요. 전투가 있습니다. 다치고 심지어 죽기도 하는거에요.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지만 사탄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오물을 부어요. 불순물을 끼 얹습니다. 죄의 길로 가도록 유혹을 합니다. 어떻게든 복 받은 사람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늘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거에요.
이것 걷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해야할 청결이란거에요.
이런 불순물과 더러운 때가 걷어 져야만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 지는 거에요. 그만믐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수 있는겁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이 땅에서도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영적 목욕탕이 되기를 소원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때에 정결한 영을 우리에게 주세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를 전쟁터의 사지로 보내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으로서, 또 그 당시의 문화적 관습으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다윗은 나단선지자의 입술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의 영을 회복하였어요.
그때 눈물 흘리며 고백한것이 시편 51편인데 그 중간부분이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에요.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시간 여러분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새롭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을 받아주세요. 시편 51편 뒷부분의 17절이 이렇게 말씀해요.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하지 아니히시리라”
제일 빨리 우리 마음을 더럽게 하고, 재일 쉽게 우리 마음에 끼는것은 욕심이에요.
왜냐면 죄성의 근본이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15 절은 이렇게 말씀하죠?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우리 마음속을 꽉 차지하고 있으면 절대로 행복해 잘 수가 없어요. 특히 물질에 대한 욕심은 정말 제일 큰 우상입니다. 긑이 다 불행해져요. 29만원 밖에 없는 분 보세요. 누가 그 분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그동안 숨겨 논 돈 남몰래 쓴다고 그게 행복했겠습니까? 남에게서 갈취한것 법망을 피하여서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 보면서 그동안 정말 행복했을까요? 그 결과가 얼마나 불행한지 30년도 안되어 지금 우리가 보잖아요. 누가 복음 12장 15절은 이랗게 말씀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다른 불순물도 그래요. 따지고 보면 다 욕심에서 나오는거에요.
미움, 시기, 질투, 자랑, 교만, 분리, 음행, 술 취함, 방탕 이 모든것이 다 욕심때문에 생기는거거든요.
그래서 성경은 이런 죄성들을 육체의 욕심 또는 육신의 소욕이라고 해요. 다 성령을
거스리는 것들이에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우리 욕심을 버립시다.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에요. 버리자 버리자 해서 그냥 버려지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에 그분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잖아요. 그러기에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들이에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할 수 있어요. 성령께서 빛을 비추시어 이길로 가라. 이 길로 가지마라 인도하시는거에요. 성령께서 음성을 주시어 예수님께서는 이럴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게 하시는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성령을 좆아 행하는 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소홀히 하지마세요. 그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자녀가 맞으면요, 성령께서는 그 인도하심의 빛을 비추시고 바른길 가게 하시는 음성을 반드시 주시거든요. 그 인도하심에 Response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이렇게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좆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 모두 성령을 좆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근원인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청결케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청결치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처에요.
상한 감정입니다. 긁히고 찢긴 감정들이 우리 마음속에 쓴 뿌리로 남아있는거에요.
어떤 기독교 심라학자는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우리속에 있는 마음의 상처가 마치
나무속에 있는 나무테같다고 했어요.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상한 감정들이 나무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조금만 건드려지면 너무 아파요. 그래서 나모 모르게 이 쓴 뿌리들이 마치
가시같이 튀어 나옵니다. 분노로 죄책감으로 나타납니다. 수치감,
두려움, 좌절감, 원망 이런 것들로 나타나요. 이런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구부리고 깨트립니다.
부러트리고 좌절시키고 실망시키는 거에요. 이게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걷어 내고
씻어 버려야 할것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씻어 냅니까? 모든 답은 십자가에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때에 우리의 그 상처의 아픔도 함께 지셨어요.
이사야 53 : 5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의 영혼뿐 아닙니다. 우리의 상처난 마음도 나음을 입은거에요. 여러분 이 말씀 붙들고 이 시간 우리 마음속 깊은곳까지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내속에 나이테처럼 샇여 있는 아픈 기억들 주님께 맡기세요. 내 심령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달라고,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치유와 회복이 오늘 나에게 임하도록 믿음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씻기를 결단하는것은 나 자신이지만 그것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내 마음의 깊은 곳 있어요.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쌓여 있는 상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우리가 내어놓고 간구할때 성령께서 그 부분마저 타취하시고 깨끗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시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삶속에서 매일 매일 매순간 매순간, 예수의 보혈,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 마음속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본문은 말씀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임이요”. 여기서 본다는 단어는 눈으로 본다는 단어가 아닙니다.
“호라오”라는 단어를 썼는데 “알게되다”
그런데 그냥 지식적이 아니에요. 머리로 아는게 아니에요. “경험으로 만나서 진짜 가슴으로 아는것 같은” 그런 뜻이 강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의 경험이 심령속에
자리잡히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교제가 일어난다는 거에요.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격적인 참 교제가 일어나는 거에요. 어떨때에요?
마음이 청결할때에.
여러분 욥을 잘 아시죠? 욥기를 시작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스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욥기 마지막장에 가서야 욥이 비로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시각적인 눈으로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제 온전히 만났다는거에요. 이제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게 아니에요. 첫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모진 시련과 모진 고난이 있었잖아요.
자식 다 잃고, 가진 재산 몽땅 다 잃었어요. 심지어 부인한테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치욕적인 말까지 들었잖아요. 거기다가 육신에 몹쓸병까지
들었어요. 가장 친한 친구들한테서 까지 별의별 속상하는 이야기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 많은 시련과 아픔이 그에게는 결국 어떤 과정이었나요? 자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빼내는 과정이었어요. 모든 기름때를 빼낸것입니다. 마음이 청결케
되는 과정이었던거에요. 물론 그는 구약시대의 사람이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청결의 의미는 몰랐어요.
그러나 자신을 정금으로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시련을 통하여 알게되었던거에요.
욥기를 찬찬히 읽어 보세요. 다 그 작업이에요. 그래서 욥기의 처음과 마지막을 붙드는 중심 기둥이 무엇입니까? 욥이 고백한 이 말씀이에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러분 정금이 되려면 깨어져야 합니다. 부셔져야 해요. 뜨거운 불에도 넣습니다. 차거운 물에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리고 기대하세요. 정금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캐낼것이 있다는것입니다. 우리가 정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는 보시는거에요. 그렇게 불순물이 제거된 후 깨긋한 정금이 나오는거에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정금이 되는것입니다.
욥도 때로는 번민하고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원망도 했어요.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는 분명 기억했습니다. 반드시 그 언젠가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그 분의 손길을 끝까지 믿었아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순도 100%의 청결하고 깨끗한 그러한 인격이 될것을 목표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는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된거에요. 이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겠다, 내가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제 만났다 고백을 하는것입니다. 비록 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진정한 천국의 행복, 하늘의 신령한 복이 물밀듯이 밀려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그러한 하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에게 이땅의 기름진것도 것도 다시 주셨어요. 그가 잃었던 모든 것마저 갑절로 다시 부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더하시리니” 말씀 믿고 실천하는 자에게 말슴 성취의 축복이 임할줄 믿습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뜨겁게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만남으로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길을 만드셨어요. 그 피뿌림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그 은헤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의 오염을 막아줄거에요. 죄와 허물의 오물을 싯어주고 우리를 청결케 할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모든 예배속에서 이런 청결의 역사가 늘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주 장로교회 식구 모두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깊이 만나며, 그 행복이 얼마나 큰지, 그 기쁨이 얼마나 얼마나 놀라운것인지 증거하는 복의 주인공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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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의 눈을 씻고 귀를 닦아 정금처럼 마음이 깨끗케 된 자가
하나님을 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신성한 길로 안내하는 이 목사의 설교 말씀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