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독립운동사
Ⅱ. 국권수호를 위한 군사활동
4) 동학군의 승리와 패배
(1) 황토현전투로부터 전주화약까지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과 혁명적인 동학의 고부군 접주 전봉준(全捧準)과의 만남은 고부를 혁명운동의 폭발점으로 만들었다. 농민들은 군수의 탐학을 더이상 견디어 낼 수가 없어서,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먼저 민소(民訴)를 올렸으나 일축되었다.
다음해인 갑오년 2월 10일 전봉준은 천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앞장서서 군아(郡衙)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불법 징수한 수세곡(水稅穀)을 돌려주고 만석보(萬石洑)·신보(新洑)를 헐어 버렸다. 이에 조병갑은 도망가고 전봉준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조병갑을 서울에 심문차 압송하였고, 정부에서는 그 곳 실정을 숙지하는 광주(光州) 출신 박원명(朴源明)을 후임 고부군수에,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고부에서 민요가 일어나자 전주감영에서 급파된 속리(屬吏)는 전봉준에게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그를 체포하려다가 도리어 피살되었다. 신임군수의 온당한 수습책으로 민심이 안도해 가는 듯 하였으나, 이용태는 사태의 책임을 일체 동학교도에게 돌리고 그 명부를 작성하여 일제히 잡아들이며 도피한 자는 가족까지 체포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민심은 흉흉해졌고 전봉준은 인근 접주들에게 격문을 돌려 궐기를 호소하였다. 격문에 호응하여 즉시 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고부 근교 백산(白山)에 모여, 전술한 백산맹약을 선포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뽑았다.
동학군은 5월 8일 부안군아를 습격하여 전곡 등을 빼앗고 군수를 잡아 기세를 올렸으나, 부안의 지형이 방어에 불리하므로 다시 고부로 돌아왔다. 감사 김문현은 급보에 접하고,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으로 하여금 별초군(別抄軍) 250명, 수천명의 보부상 등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다. 영군(營軍)은 훈련없는 오합지졸일 뿐 아니라 무기도 보잘 것 없었다. 고부 부근 황토현까지 진출한 관군은 5월 10일 밤 농민군을 우습게 보고 방심하고 있는 사이, 짙은 안개 속을 진격해 온 농민군에게 기습적인 포위공격을 당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고 붕괴 도산하였다.
죽창(竹槍)으로 거둔 황토현(黃土峴)의 승리는 동학군을 사기충천하게 하였다. 그 날로 정읍에 쳐들어가 군아를 불사르고 죄수를 석방하며 무기고를 부수고 모여든 농민을 무장시킨 뒤, 해안선을 타고 남하 흥덕(興德)·고창(高敝)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 무장(茂長)에 입성하였다. 무장은 동학 교세와 한 중심으로 구금중인 교도도 제일 많았는데 그들 40여 명을 구출하고 악질 포교(捕校)와 이서들을 처형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직접 기초한 포고문을 발표하여, 궐기의 취지를 다시 천명하였다.
민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허약하면 나라는 쇠잔해지는데 지금 당국자들은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치 아니하고 헛되이 국록만 도적질하고 있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나라의 위망을 좌시할 수 없어 의기(義旗)를 들고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서를 삼는다.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에 속하나 공동하지 말고 각기 본업을 평안히 하라.
고부민란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출동하게 하였다. 그는 장위영병(壯衛營兵) 800명의 경군(京軍)을 이끌고 해로로 군산에 상륙 전주성에 들어 갔으나, 도망병이 속출하는 상태였다. 관군 접근의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남하하였고, 경군은 황토현 싸움 직후라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성내의 내통자를 숙청한다하여 노련한 영장(營將) 김시풍(金始豊)과 감영수교(監營首校) 정석희(鄭錫禧) 등을 처형하여 크게 민심을 잃었다. 정부에서는 요청에 응하여 강화병(江華兵) 500명 등 증원군 800명을 출동시켜 해로로 영광(靈光)의 법성포(法聖浦)로 향하게 하였다. 증원군 출동의 소식에 접한 홍계훈은 전주성을 출발, 영광으로 진격하였으나 동학군은 장성(長城)으로 이동한 뒤였다.
증원군과 합세한 홍계훈은 이학승(李學承) 부대 300명에 대포 5문을 붙여서 동학군을 추격하게 했다. 5월 26일 이학승 부대는 장성 황룡촌(黄龍村)에서 식사중인 동학군을 발견하고 불의의 포격을 가하여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은 즉각 반격하였다. 반격의 맹렬한 기세에 놀라고 당황한 경군은 도리어 대포를 버린 채 영광으로 달아나 버렸고, 대장 이학승을 비롯한 몇 명의 전사자까지 내고 말았다. 전투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나 동학군은 황토현에서는 영군을, 황룡촌에서는 경군을 격파한 셈이었다. 전봉준은 북상하여 전주성을 공략할 결심을 하였다.
황토현 패전 이후 전주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었고, 호남 전역을 석권한 후 북상하는 동학군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 감사 김문현은 이미 면직됐고 후임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아직 부임하지 않아, 동학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전주에 무혈입성 하였으니, 이렇듯 입성이 무난하였던 것은 내통자가 많아서일 것이란 풍문이 자자하였다.
민심은 동학군에게 있는 듯하였다. 동학군은 달아나는 자는 쫓지않고,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하고, 대적할 때에도 피흘리지 않으며, 싸울 경우에도 생명을 해하지 않음을 중하게 여기는 기율과 인정을 가졌다. 또한 탐관은 몰아내고, 굶주린 자 곤한 자는 구하며, 병자에겐 약을 주고, 불효자는 징계하며, 거역하는 자는 타이르는 의협스러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동학군을 쫓아 북상하던 관군은 전주성 밖 완산에 진을 쳤다. 전주는 왕실의 본관지로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경기전(慶基殿) 등이 있는 요지이고, 완산은 전주부를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으며 수비에 용이한 유리한 지형이었다.
관군은 성내를 향하여 포격하여 많은 민가가 불탔다. 동학군은 성문을 열고 출격, 완산에 기어 오르려 하였으나 비오듯하는 집중사격 앞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다. 궁을(弓乙)부적을 어깨에 붙이고 싸우면 탄환이 맞지 않는다는 조화를 믿기 때문에 농민군은 두려움을 몰랐었는데,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동지를 볼 때 그들의 전의는 크게 동요되었다.
이틀후 동학군은 재차 출격하여 용맹스런 백병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반격하는 관군의 집중포화로 동학군은 또 500명이나 되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동학군의 유명한 장수 김순명(金順明)·동장사(童壯士) 이복용(李福用) 등도 이 전투에서 경군에게 포로가 되어 참수되었다.
이에 동학군은 전의를 거의 잃었다. 이 기회를 타서 관군은 적극적인 회유공작에 나섰다. 전주성이 함락되고 의외로 청·일 양군의 출동에 맞닥뜨린 정부는, 양군에 대한 철수교섭을 위해서도 전주성 수복과 동학군 해산이 꼭 필요하였으므로 큰 양보를 해서라도 회유정책을 썼던 것이다. 홍계훈은 전봉준에게 추종했던 농민들은 전주성에서 자진 물러만 가면 기왕지사는 일체 문책하지 아니할 것이며, 귀향 후에도 일체 후환이 없을 것과, 정부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농민군이 요구한 바 있는 폐정의 개혁에 힘쓸 것을 약속하였다. 앞서 장성에서 경군이 패하자 정부는 이원회(李元會)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여, 그는 천여 명의 관군을 이끌고 육로로 공주를 경유하여 전주에 이르렀다. 마침 그때는 농번기여서 농민들의 귀향심이 간절하였고 주변 내외정세가 그러하였으므로,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이원회에게 제시하여 열거한 데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지면 해산할 것이라고 하였다. 관군측은 이를 수락하여(6월 11일)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고, 동학군은 일제히 성 밖으로 철수하였다.
동학군이 제시한 조항은 두 차례에 걸쳐 약 30개항으로 그 대부분은 법성포나 장성에서 제시한 바 있는 개혁안과 중첩되고 있다. 대개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주구를 엄금할 것과 개항 후에 나타난 미곡의 국외유출 등 불리한 교역의 시정, 외국상인의 활동제한 등이었다.
(2) 집강소(執綱所) 시절
동학군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고 있을 때, 충청도의 동학당을 비롯하여 각지에서는 동요의 빛이 짙었다. 최시형교주는 신중주의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교도들의 요청으로 고부봉기 후 통문을 발하여, 수천명을 청산현(靑山縣) 소사리(小蛇里)에 모아 회덕현(懷德縣)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곧 출동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교주의 지시로 해산하고 말았다. 소집단으로 분산된 농민군은 접(接) 단위로 회덕(懷德)·청산(靑山), 보은(報恩)·목천(木川) 등지에서 관아와 토호집을 습격하여 빼앗은 전곡을 나누어주는 등 무법천지를 만들어 혁명적 기세를 높였었다.
경상도에서도 고부봉기와 비슷한 때에 김해(金海)에서도 수천명의 농민이 관아를 습격하였고, 농민군이 남하하자 전라도와의 교통은 끊기고 진주(晋州)를 비롯한 각지에서 동학당 봉기의 풍운이 돌아, 불온한 정세에서 각지 관헌은 경계를 엄중히하고 있었다.
한편 전주성에서 나온 전봉준은 소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김제(金堤)·태인(泰仁) 등지를, 손화중(孫和中)은 전라우도를 순찰하면서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경군도 강화병(江華兵) 200명을 남기고 서울로 돌아가, 전라도에는 이미 수령이 도망하여 버렸거나 혹 있어도 유명무실하여 힘의 공백지대가 되어버렸다.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원회(李元會)는 민폐시정을 약속하는 효유문을 발하여, 면집강(面執綱)·이집강(里執綱) 등의 향임(鄉任)의 업무를 활성화하여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강이 각급 관아에 호소해 오면 공정처리 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이때 처음으로 면·리에 집강을 둔 것은 아니다. 집강은 이정(里正) 등 향임(鄉任)을 말하니 종전에도 향청(鄕廳)의 감독을 받으며 면·리의 행정 교화 권농의 일을 맡아왔던 자치 조직의 일원인 것이다. 지역에 따라 소관과 명칭이 다르니 호남에서는 사발통문에서 보듯 이집강(里執綱;통문은 각 리의 집강 앞으로 보내졌다)과 면집강이 있었고 안동에서는 좌수(座首)를 집강(安東座首案을 ‘鄕執綱錄’이라 함)이라 하였다.
신임감사 김학진(金鶴鎭)은 무너진 치안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서는 동학당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동학군에 가탁한 무뢰배의 행패 도량을 수습할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감영에 초치하여 치안유지를 위하여 관민이 협력할 방도를 협의하였다. 이리하여 전봉준은 당당하게 감사와 담판한 결과 전라도 53읍에 동학당의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집강소는 각읍 관아 안에 설치되었으며, 유명무실한 수령을 대신하여 사실상의 권력기관으로서 지방의 치안은 물론 행정사무와 소송업무를 즉결하였다. 이로 인해 짧은 기간이나마 민중에 의한 일종의 민주정치가 이 땅 위에 그 맹아를 보였으니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
그런데 종래 집강소에 대해서 이 기구가 마치 동학혁명운동으로 말미암아 새로 탄생한 것인양 인식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다. 집강이란 향임 명칭이 오랜 전통을 가진 것과 같이, 집강소도 종전부터 관아 안에 있었으나 무력 부패하여진 향청을 활성화한 것으로, 그 명칭도 구성요원도 소관사항도 바뀌면서 획기적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정세에서 토호의 주구로 전락해 버린 향청은 존재할 수도 없었으니, 향청 본연의 임무를 민중의 손으로 확충해서 수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종래 향청이 관아 구내에서 수령과 공존하였듯이 집강소도 수령과 공존하면서 실질적인 상하관계가 전도된 것이다. 즉 좌수는 수령의 휘하에서 보좌역이였으나 집강소는 수령을 능가하는 실권기관이었던 것이다.
이서층(吏胥層)은 동학당이 포섭에 가장 노력한 대상이었으니 향리들은 동학당 행세를 해야 명색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들 이서들의 대량 가담과 그들의 능력으로 동학당은 급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들의 기회주의적 배신으로 또한 급속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전주에는 전봉준이 대도소(大都所)를 차리고 전라우도를 호령했고 김개남(金開南)은 수만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전라좌도를 호령하고 있었으나 뚜렷한 명령계통이 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봉준을 능가하는 대세력의 접주들의 군웅할거의 상태였다. 당시 집강소에서는 폐정의 개혁을 위한 준칙으로 공포했던 12개 조목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대도소에서 제정, 각 집강소에 통첩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12개 조목을 보면 탐관오리·토호의 횡포에 대한 금제(禁制), 무명잡세의 폐지 등은 동학군의 폐정개혁 요구조항과 통하고, 신분제의 타파, 과부의 재가허용, 인재의 새 등용법 등은 약 한달 뒤에 시행된 갑오개혁과 통한다. 집강소의 폐정개혁안과 갑오개혁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적 개혁을 비교하면 양자의 밀접한 관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분작설만은 12조 가운데에서 검토가 요구되는 것으로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집강소가 각 읍에 설치되었을 때 읍에 따라서는 수령이 이에 반발하여 곡절을 겪은 곳도 있었으니 나주·남원·운봉(雲峰)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주목사는 민정(民丁)을 동원, 최경선(崔景善)이 이끄는 3천의 동학군에 대항하였다. 전봉준은 곧 그 곳으로 달려가 공격군을 철수하도록 한 다음 몸소 성 안에 들어가 내외정세며 ‘전주화약’의 내용을 설득하여 평화적으로 성문을 열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원과 운봉은 사정이 달랐다. 김개남이 이끄는 3천의 동학군은 남원성을 공략하여 부사를 효수하였고, 운봉의 경우도 성의 함락으로 비로소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동학당은 집강소를 기반으로 일시적이나마 지역사회의 패권을 잡았고 동학의 전도에도 힘써서 보신을 위해서도 청소년의 거의가 동학에 입도하였으니, 적지 않은 불량배도 섞여 있어서 행패가 심하였다. 이리하여 부호(富戶)는 거의 다 도망하고 천민은 재물을 약탈하고 원한을 보복하려 날뛰어 호남일대는 혼돈한 상황이었다.
(3) 남북접 대립과 2차봉기
동학교리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와 ‘개벽(開闕)’에 있다. 시천주란 누구나 마음 속에 천주를 모셨다는 평등사상인 동시에 천주의 가르침을 따라 수도한다는 종교적인 뜻이 있는 것이다. 개벽이란 새 세상이 개벽된다는 혁명사상이다. 동학에는 이 상반되는 두 요소 즉 수도와 혁명을 교정쌍수(敎政雙修)라 하여 동시에 추구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보은집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대국면에 이르러서는 그 모순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즉 종교활동에 치중하느냐 정치적 군사적 운동에 치중하느냐, 점진이냐, 급진이냐, 소위 온건노선이냐, 강경노선이냐의 행동노선의 차이를 드러냈다. 전자는 최시형 교주의 노선으로 추종자는 충청도에 많았고, 후자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남접 즉 전라도 교도가 많았으니 곧 남북접의 대립으로 교단은 남북으로 분열된 셈이었다.
당시 동학의 조직은 접(接)으로부터 포(包)로 진전하고 있었다. 수운은 포교와 교도관리를 위하여 각지에 접주를 두었는데 교세의 발전에 따라 같은 지역에 여러 명의 접주가 있게 되어 분쟁이 있으므로, 동일 지역의 여러 접주 중에서 유력하고 덕망있는 자가 교구(敎區) 즉 포(包)의 포주(包主)가 되었으니, 포주란 중소접주를 거느린 대접주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은집회 무렵에는 포주의 수효가 급증하여 교주 아래 대교구의 포주를 두어 중소포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갑오년 기포(起包 ; 동원궐기)에 있어서는 남북접의 대립으로 인해 남접의 대접주 아래엔 많은 호서교도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의 지역 중심의 교구개념은 실정에 맞지 않으므로 지명을 붙여 부르던 포명을 ‘김개남 포(包)’ 등으로 영솔자의 이름을 붙여 불렀으니 그것은 각 도 교인으로 혼성된 병단(兵團)이었다.
갑오년 남접의 기포에 있어서 해월 교주는 시기상조를 역설하여 자중을 강조하였고, 남접에의 호응을 막기 위하여 출교 처분으로 북접교도를 단속하면서 수도에 힘쓰도록 여러 번 통유문을 발하였다. 2차봉기인 음력 9월 기포에 있어서도 북접지도층은 극력 이에 반대하여, 기포를 강요하는 남접측과 유혈충돌에 이르렀다.
전봉준은 집강소에서의 개혁을 지휘하며 청일전쟁의 형세며 조선이 왜국이 되어가는 정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운동의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정책의 선봉에 섰던 국수주의단체인 현양사(玄洋社)의 무뢰배들이 청·일 개전의 구실을 만들고자 동학당의 궐기를 선동하였으며, 집강소 시절에도 순창(淳昌)으로 전봉준을 찾아와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그에게 재기를 종용하였다. 그것은 반일적인 동학당을 이 기회에 섬멸 발본하려는 함정이었을 것이다.
대원군 주변에서도 동학군을 빨리 북상시켜 청군과 협동하여 일군을 협공시키자는 밀모가 꾸며졌고, 대원군의 밀사는 전봉준과도 접선하여 일군의 횡포를 알리고 북상 입경을 종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서울의 정국을 일본이 좌우하는 정세는 짙어갔다. 더이상 좌시할 수 없는 그는 북상준비에 나섰다.
통문은 사방으로 날랐고 궐기한 동학군은 전주교외 삼례(參禮)에 집결하였으니, 그 수가 10만을 넘어 남북접의 대립도 이때에는 수습된 셈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조정 설득의 공이라기 보다도 관군과 일군은 남북접의 구별없이 동학당이면 모두 살상하였으니, 이에 충청도 교도는 앉아서 죽기보다 나아가 남접과 힘을 합쳐서 싸우기를 열망하게 됨에 따라 팽배한 그들의 요망에 해월 교주는 추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접의 교도들도 김연국(金演局)·손병희(孫秉熙)의 지휘로 보은 장내리로 집결하였다가 옥천·회덕으로 나뉘어 관군을 무찌르고, 11월 중순에는 논산에서 남북접의 대군이 합세하여 충청도의 요충인 공주 공략에 나섰다.
인산인해를 이루며 노도와 같이 진군하는 농민군에는 동학의 색채가 진하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들의 깃발에는 ‘오만년 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라는 문자가 뚜렷하였으니, 이번 궐기가 새 세상을 여는 시운에 응하는 것이란 신념의 표시였다. 또한 행군할 때면 군가를 부르듯 주문을 외웠고 어깨에는 견장 모양으로 궁을(弓乙)자가 쓰여진 부적을 붙였으니, 모두 천주의 음호로 탄환이 맞지 않는다는 조화(기적)를 믿는 표현이었다. 평등주의의 교리는 진중에서도 강도(講道)되어 각계각층의 오합지졸을 동학군으로 연성하는 방도가 되었다. 동학군 진영의 불빛은 수십리에 뻗쳤으니, 조화와 신세계의 개벽을 믿는 드높은 기세는 승리를 목전에 둔 것같이 보였다. 관군이 이 민중의 거센 해일과도 같은 힘을 막아 낼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공략목표인 공주에는 이미 소수이기는 하지만 신무기를 든 일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4) 우금치 전투와 전봉준의 피체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자 정부는 신정희(申正熙)를 양호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로 임명하여 솔병 출동케 하였다. 그런데 일군의 경복궁 점령시 조선군대는 와해 해산상태에 있었으므로 농민군에 대항하는 실질적 중심은 일군에 있었고, 일부 개편된 교도(敎導) 중대·통위영(統衛營)·장위영(壯衛營) 등의 관군은 일군의 지휘와 감시하에 있었다. 청국과의 전투는 이미 압록강 너머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어, 일군 주력은 그쪽으로 이동하였고 소수의 수비대만이 남아 있었으므로, 북상하는 동학농민군의 서울 입상은 외부의 간섭만 없다면 막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신임 정상(井上) 공사는 증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독립 제19대대가 급파되었다. 불과 1개대대의 일군이 수만 농민군의 진격을 막고 우리 겨레의 숙원을 유혈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대개 비도(匪徒)는 당을 모아 성세를 이루나 기실 쓸모없는 무리들이다. 맨손의 오합지중이 비록 다수라 하더라도 염려할 것 없다. 그들이 간혹 양총(洋銃)을 들고 있으나 쓸 줄을 모르며 또 탄환이 없으니 토총(土銃)보다도 못하다. 토총〔火繩銃〕의 둔함이 어찌 양총을 당하랴. 그러므로 일병 10인은 비도 수만명을 당할 것이다. 이는 필지의 세(勢)로 기계의 이(利)·불리(不利)에 의한 것이다.
참으로 적평(適評)이며 다가오는 동학군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1월 상순 인천에 상륙한 일군부대는 3개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하였으니, 서해안을 남하하여 여수로 향하고 다른 일개 중대는 서울에서 충청도 중앙을 경유 전라도 남단에 이르고 나머지 일대는 강원도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향하였다. 비록 조선관군을 앞세웠다하나 맨손과 다름없는 농민군을 소수의 근대무기를 가진 일군이 동학군을 전라도 남단으로 몰아 격멸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농민군에는 다수의 이탈자가 생겼다. 일군이 직접 진압에 나섰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부동분자(浮動分子)는 도망하여, 전봉준이 친솔하는 만여 명이 전투 주력부대였다. 그밖에 북접의 한 대부대가 목천 세성산(細城山)에 포진하고 있었고, 나주와 전주에는 각각 동학의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일군 및 관군은 먼저 목천에서 공격을 시작 일거에 공략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하였다. 조화를 믿는 농민군이 탄환을 피하지도 않았던 것이 결정타를 입은 결과가 된 것이었다.
관군은 이인역(利仁驛)에, 일군은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로 배치됐다. 전봉준군은 후방의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 부대에 응원을 요청하는 한편, 공주를 포위하려고 이인역에 진출 접전이 벌어졌다. 이곳저곳에서 격전을 벌이던 동학군은 김개남이 5천명을 이끌고 내원(來援)함을 기다려 공주에 대한 전면공격에 나섰다. 이인역에서 패퇴한 관군이 우금고개의 일군과 합세하자 동학군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기를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처참한 시산혈하(屍山血河)의 백병전이 전개되어, 동학군은 이 고지의 촌토(寸土)를 다투며 빼앗고 빼앗기기 실로 40~50차례 7일간에 걸치는 혈투 끝에 괴멸상태에 빠졌다. 만명 중에서 5백여 명만 남았다 한다.
농민군은 계속 싸우면서 금구(金溝)까지 후퇴 분산되었고, 김개남군은 공주패전 후 서울을 향하여 청주까지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 진격이 막혀 전라도로 후퇴하던 중 태인에서 김개남은 붙잡혔고, 손병희가 거느리는 북접의 주력부대는 순창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충청도로 향하던 중, 각처에서 관군 등의 습격을 받아 충주에 이르러 해산하고 말았다. 전라도의 동학군도 한때 순천에 집결하였으나 추격해 온 일군에게 쫓기어 퇴산하였고, 황해도 강원도지방에서도 농민군의 봉기가 있었으나 역시 일군과 관군의 토벌로 진압되어 갔다.
시운(時運)은 허망한 꿈이었다. 현실은 오직 소수 일군의 근대무기 앞에, 그토록 새나라를 갈망하며 용감무쌍하던 우리 농민들의 피가 흐르고 살점이 터지고 또 터졌을 뿐이었다.
전봉준은 그 뒤 정읍에서 순창으로 피신하여 동지들과 재거를 모의하던 중, 현상금을 탐낸 측근 배신자의 밀고로 불의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곧 일군에게 인도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의연한 혁명가다운 태도로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4월 하순 동지들과 함께 효수되었다.
(5) 동학혁명운동론
전라도 서남단으로 동학군을 몰아내면서 일군은 도처에서 접주들과 집강소 임원들을 체포·총살·고문치사 등 악랄한 야만행위를 자행하면서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고 촌락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확실한 피해 통계는 없으나, 전투 수색 신문과정에서 희생된 생명은 누계 십만을 넘었으리라. 파탄된 생업, 이산된 가족이 입은 피해까지 치면 부지기수의 우리 겨레가 일군과 관군의 총구 앞에 무차별 학살의 공포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썩은 왕조의 압제로부터 민중을 구하고 조국을 침략하는 일본에 대하여 민족의 독립을 지키려고 온 겨레를 분기시킨 영웅적인 혁명아 ‘녹두장군’의 웅지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황토현·황룡촌·우금치의 싸움이 웅변하듯 일군의 개입이 없었던들 동학의 신세계는 눈앞에 실현되었으리라.
우리는 민중의 한결같은 열망과 노도같은 진격을 저지 압살한 것이 일군의 총구였음을 직시하며, 여기에서 역사의 교훈을 똑똑히 배워야 왕년의 농민군의 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국제관계 내지는 외부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장하여 한때 일인은 타율이라 하였고, 그것이 우리 역사의 기본성격의 하나라고 하였거니와 우리가 이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도리어 타율의 범위·한계·내용·성격 등을 살펴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 작용이 얼마만한 힘을 발휘하였는가를 응시하여야할 것이다. 국제적인 작용을 무시하고 무엇이든 우리의 주체적 역량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안이한 태도이고, 오히려 이러한 성찰은, 즉 타율의 정체를 상세히 성찰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과 여건 아래서 최대한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살리는 방도가 될 것이다.
국제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준비의 결여가 가져오는 결과는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음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지배를 목적으로 청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내정타개를 위해서도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개전의 구실을 못찾아서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조선에서 큰 민중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간섭과 실력행동은 예기되는 일이었다. 동학혁명운동의 확산같은 것은 오히려 일본이 고대하던 일이었다.
보은집회 당시 일군의 최고 수뇌부는 비밀리에 조선을 전쟁준비를 위하여 답사하고 있었고, 전라도에서 남접이 궐기하자 곧 일본군부는 정보수집에 나섰으며, 침략의 선구 국수주의 단체 현양사원(玄洋社員)들은 혁명운동의 확산 고조를 위하여 책동하려 하지 않았던가.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군 지도부는 이러한 정세에 맹목이었고 그 결과는 농민군의 숱한 유혈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갈망하는 신세계의 구현은 커녕, 다만 구세계를 잃는 비통한 역정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되었을 뿐이었다.
동학혁명운동이 성공하려면 해월의 노선대로 좀더 역량을 기르면서 호기를 기다리던지, 면밀한 계획과 준비 아래 신속한 행동으로 전격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외국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국제관계에 대한 민활한 대처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교를 본직으로 하는 정부의 고관이나 국왕조차 국제관계에 대한 고려없이 함부로 청군출동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동학의 시골 접주에 불과한 동학군 지도부에게 이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우리는 인력을 다하고 쓰러진 녹두장군의 “구원의 장지(壯志)” 앞에 경건한 추모의 묵도를 올리는 동시에, 국제정세에 어두워 좌절하였던 그의 한을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사실을 민족적인 교훈, 민족적인 지혜로서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4. 의병의 대외인식
1) 척화·척사론의 대두
(1) 역사적 배경
기본적으로 19세기 말의 의병은 전통적 의병과 같은 행동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외인식도 대체로 동일한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 청나라와의 강화문제를 놓고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가 갈라져 이견(異見)을 보였으며 그후의 대청(對淸) 사대외교는 척화파의 의도대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복속하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척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들어설 적에는 더욱 강한 정통의 척화파가 정치권력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종래의 척화정책은 더욱 굳어져 있었고 따라서 전통적 사대교린 이외의 외교노선은 추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순조 원년(1800)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헌종 5년(1839)의 기해박해(己亥迫害)를 통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프랑스 등 구미열강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 흥선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더욱 강력한 척화정책을 폈고,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프랑스와 미국에 의해 각각 야기되자 이 척화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때 ‘척화양이(斥和攘夷)’를 표방하고 ‘주화매국(主和賣國)’을 선언했다. 결코 서양세력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과 통상의 단절은 물론,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이때 재야의 전통유림들도 흥선대원군의 내정정책은 반대하면서도 척화정책만은 열렬히 동조하고 나섰다. 특히 이항로(李恒老)는 ‘국변인설(國邊人說)’과 ‘적변인설(賊邊人說)’을 내걸어 척화정책을 여론화·대중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싸워서 양적(洋賊)을 칠 수 있다고 하는 자는 국변인의 설이요, 양적과 화의를 주장하는 자는 적변인의 설이라. 국변인의 말을 따르면 나라안은 예전과 같이 문물을 보존할 수 있으며, 적변인의 말을 따르면 인류가 금수의 지경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이어 무비(武備)를 강화하여 앞날의 변에 대비하자는 주전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 우리의 유한한 농업생산품과 서양의 손재주로 만든 무한의 생활용구와 바꿀 수 없으므로 결단코 통상을 단절해야 하며 궁중이나 여염집에 있는 서양 물건을 모조리 수색하여 불태워 그 단절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항로의 제자 김평묵(金平默)은 지금의 주화는 모두 서인들이 내세우고 있다고 말하고, 이어 남인들은 천주교가 탄압을 받은 뒤에 그틈만 엿보고 있다고 하면서, 만일 양적이 밀려오면 반드시 찬탈의 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고 그렇게 되면 서인이 일망타진되고 남인이 집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말은 주화가 결국 환국(換局)으로 가는 길이 되어 서인세력이 실권(失權)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척화가 나라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서인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끝내 1차 의병은 이들 서인 중심의 전통유림들이 주도했던 것이다.
(2) 사상적 배경
병자호란 이후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이 팽배했다. 이것은 결국 문명족인 명나라를 받들고 오랑캐인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이기에 화이론(華夷論)으로 연결되었다. 또 이 화이론은 명나라가 망했으므로 공맹(孔孟)의 도를 온전히 지키는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에만 명맥이 전해진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18세기 말 천주교에 대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이론이 대두되었다. 곧 천주교인 서학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므로 ‘무부’라는 것이요, 하느님 아래 인간은 똑같다고 했으니 천명을 받은 임금을 업신여기는 ‘무군’의 교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척사론(斥邪論)이 대두되었다.
중국의 이단론은 맹자가 양주(楊朱)의 자애설(自愛說)과 묵적(墨翟)의 겸애설(兼愛說)을 비판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원용되어 벽이숭정론(闢異崇正論)으로 발전하여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서학을 박해할 적에 그대로 이행되어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으로 발전한 것이다. 헌종은 척사윤음에서, 유교는 인륜을 인간의 기본 덕목으로 삼는데 비해, 서학은 인륜은 무시하고 ‘하느님’만 받든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척사위정론이 공식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통유림들은 척사위정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척사위정론은 이항로계열과 영남의 남인, 호남의 기정진계열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에 의해 ‘화이론’의 이론에 근거하여 ‘인수론(人獸論)’이 제기되었다. 이항로는 우리 동방이 문명인과 오랑캐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것이, 인간과 짐승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곧 정학을 숭상하는 유학도는 인류요, 서학을 숭상하는 무리는 짐승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오륜을 완전히 무시하는 서학의 교리에서 찾고 있다. 더 나아가 김평묵은 서학의 교가 전파되고 그들이 들어와 일부 천주교를 신봉하는 남인과 손을 잡아 환국하면 율곡·우암이 문묘(文廟)에서 쫓겨나고 예수가 대종사(大宗師)가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정자·주자의 설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런 척화와 척사의 배경 위에서 19세기 말의 대외정책이 수립되기도 했고 그 시기에 따라 변모되기도 했다. 또 이것이 의병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대외인식의 토대가 마련되기도 했다. 다음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 문제에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겠다.
2) 조선책략의 반응
1876년 일본 침략세력의 강요로 병자수호조약에 의해 개항이 이루어졌다. 이때는 의병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으나,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은 더욱 팽배하였다. 이런 정세 속에서 일본에 수신사(修信使)가 파견되었다.
특히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김홍집(金弘集)은 주일청국공사관의 참사관인 황준헌(黃遵憲)에게서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이언(易言)』을 얻어가지고 왔다.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밀히 지내고, 일본과 외교를 긴밀히 하고, 미국과 우의를 돈독히 해야 한다”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는 것이었다.
이를 좀더 부연하면 “동서북이 러시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나라는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덩이가 크고 물산이 풍부하여 아시아에 웅거한 형세이므로 천하가 러시아를 제압할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중국이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조선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조선을 지켜줄 나라는 중국이라는 것이다. 또 이어 “중국 이외에 조선과 가장 오래 통교한 것은 일본뿐이다……일본과 조선은 실로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에 놓여 있다. 한(韓)·조(趙)·위(魏)가 합종(合從)하자 진(秦)나라가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했고, 오(吳)와 촉(蜀)이 서로 동맹하자 위나라가 감히 남쪽을 침범하지 못했다. 일본이 강한 이웃으로, 압박하여 순치(唇齒)의 교제를 맺고자 하니 조선은 마땅히 작은 혐오를 버리고 큰 계책을 도모하여 구호(舊好)를 닦고 외원(外援)을 맺어 진실로 다른 날 두 나라의 윤선(輪船) 철선(鐵船)이 일본해에 떠다니게 하면 외국의 세력이 들어올 길이 없게 된다.”고 했다. 이어 미국은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유럽의 동양진출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선교사도 없다고 했다.
이 세 가지 외교정책을 써야 조선이 러시아로부터 보존될 수 있다고 했다. 또 그는 조선은 빨리 통상을 트고 “육군제도는 중국에 와서 배우고 해군제도와 조선술은 일본에서 배우고 과학기술은 서양에서 배워 독립자강의 기초를 세우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조선의 문호개방정책을 독려하면서 전통적인 청나라의 종주권(宗主權)을 존중하고 새로운 외국세력을 이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언』은 중국의 변법론자(變法論者)이며 양무론자(洋務論者)인 정관응(鄭觀應)이 쓴 중국의 개혁책을 담은 책이다. 그 내용 안에는 특히 서양의 과학기기를 소개하면서 이를 배우라고 했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왕도(王韜)는 “이 책은 서양의 기(器)를 배우라고 한 것이지 서양의 도(道)를 배우라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책은 조정에 올려져 국왕까지도 관심을 보였으며 개화파들이 이의 실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민씨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의 척화정책에 맞서 새로운 문호개방정책을 추구하면서 이 책의 이론에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왕을 설득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개화파가 아닌 일부 지식인층에서는 『이언』의 내용에 따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제안하기도 했다. 곧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 들이되 동양의 유도는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은 이때 처음 일어난 것으로 절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놀란 전통 유림들은 일대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그중에서도 1881년 2월(음력)에 올려진 영남 만인소(萬人疏)가 주목된다. 이 상소는 퇴계의 후손인 이만손(李晚孫)과 그의 동료 강진규(姜晉奎)의 주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상소문에서 야소교도(耶蘇敎徒)를 금수와 견양(犬羊)으로 표현하고 황준헌은 중국사람이면서 일본의 세객(說客)이 되어 예수를 선신(善神)이라고 하는 사도(邪徒)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나타나지 않는 러시아 오랑캐를 꾸며 낸다”고 하였고 “미국과 일본은 사나운 무리로 러시아의 기관(機關)이 되어 중간에서 다리를 놓는다”고 하였다. 또 “러시아·미국·일본은 같은 오랑캐로 그들 사이에 비중을 두기 어려우며 러시아와는 두만강 일대에서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데 만일 일본과 이미 맺은 조약의 예에 따라 미국이 새로 조약 맺기를 요구해 살 땅을 청하여 와서 살게 되고 통상을 요구하여 교환하게 되면 전하께서는 무엇으로 이를 막겠읍니까? ……또 하물며 해내외(海內外)에 일본과 같은 나라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데 만일 각자가 이를 본받고 각자가 그 이익을 낚아 땅을 요구하고 통상을 요구하기를 일본같이 한다면 전하께서는 무엇으로 이를 막겠읍니까?” 하였다.
이상의 논지는 러시아·일본·미국을 같은 무리로 보고 외교와 통상을 결단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상소운동에 대해 기호의 노론 세력인 김평묵은 편지를 보내 격려하면서 동조하였다. 기호의 노론과 영남의 남인이 처음으로 연합전선 또는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뒤이어 무과 출신의 황재현(黃載顯)·홍시중(洪時中)과 경상도 유생 김진순(金鎭淳), 경기도 유생 유기영(柳冀永), 충청도 유생 한홍렬(韓洪烈) 등도 『조선책략』을 불태우고 척사의지를 더욱 강하게 보이라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들 주동자를 잡아 들여 문초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유생들의 기세가 더욱 높아지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척사윤음’을 전국에 반포하여 일단 여론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 내용에 “사당(邪黨)을 확청하는 방법이 옛날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무엇을 더하리오. 그 근본을 돌이킬 뿐이다. 병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원기를 돋우는 것만한 것이 없고 몸의 때를 없이 원하는 것은 그 몸을 씻는 것만한 것이 없다. 지금 사교를 탕척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유술(儒術)을 닦는 것만한 것이 없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척사윤음과는 그 뜻을 달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방임 정책 또는 실제상 허용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이만손 등이 귀양을 가게 되자, 경기도의 유생들이 유기영(柳冀永)을 소수(疏首)로 하여 더욱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특히 「영남만인소」의 비지(批旨)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성상의 비지에는 “척사위정에 어찌 너희들 말을 기다리겠는가”라는 하교가 있기까지 했으니 척사위정은 이로하여 사실없이 사람을 속이는 가르침이 된 것입니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통스러운데 즐겨 믿겠읍니까? “어찌 너희들 말을 기다리겠는가”라는 한 구절은 스스로 자존하여 사람의 뜻을 막으려함이 명백합니다. 크다는 왕의 말씀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까? 한결같다는 왕의 마음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까?
이것은 임금이 실제 척사위정정책을 포기하였다고 본 것이요, 따라서 『조선책략』으로 시작된 척화·척사운동은 왕의 언동까지 시비를 가리는 분위기로 발전되고 있었다.
이어 강원도 유생을 대표하여 홍재학(洪在鶴)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먼저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적을 마땅히 잡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인변(主人邊)의 사람이요, 적을 놓아 용서해주자고 말하는 것은 적변(賊邊) 사람이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은 우리나라의 양귀(洋鬼)요, 구라파의 야소·웅삼발(熊三拔)은 구라파의 양귀요, 일본의 화방의질(花房義質)은 일본의 양귀이다.
곧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교를 따르고 그들의 문물을 사용하면 그대로 같은 양귀라고 본 것이다.
이어 경기·강원·충청·전라도의 유생들은 연합하여 복궐(伏闕) 상소하였는데, 『조선책략』을 소개한 김홍집을 천주교의 심복이라고 주장하고 김홍집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홍재학 등 이들 유생의 주모자를 잡아 엄히 문초케 하였으며, 끝내 홍재학은 사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는 귀양을 보내는 조처를 취했다.
이렇게 1880년부터 1881년까지 『조선책략』의 문제로 척화·척사논쟁이 불길처럼 일었는데, 이때에 종전보다 더욱 구체화되거나 새로이 제기된 몇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왜양일체론이다. 이 문제를 이항로나 김평묵이 제기한 바 있으나, 이때에 와서 조정이 문장으로 명시하여 이를 지적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도입한 일본이 서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요, 따라서 일본은 서양의 앞잡이라고 보고 있다.
둘째는 나라 안에서 서교를 신봉하거나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세력들, 곧 이승훈이나 김홍집 등 서학신봉자 또는 개화파들도 왜양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나라의 적은 왜양만이 아니라 국내의 개화파를 그 범주에 넣고 있다.
세째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민씨의 세도정치도 척화·척사의 범주에서 타도의 대상으로 꼽은 것이요, ‘동도서기론’을 제창한 곽기락(郭基洛) 등 일부의 유생들도 ‘적변’의 무리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양요(洋擾)나 개항 때보다 척화·척사세력의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3) 복제변개(服制變改)와 용하변이설(用夏變夷說)
1884년 5월에 들어 고종은 개화파의 권유로 복제(服制)를 고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의복의 제도는 고칠 것이 있고 고치지 못할 것이 있다. 조제(朝祭)와 상례(喪禮)의 옷같은 것은 모두 선성(先聖)의 유제이니 이것은 고치지 못할 것이다. 사복(私服)을 때맞추어 만들어 입는 것은 그 편리함을 따르는 것이니 이것은 고칠만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복은 도포·직령(値領)·창의(氅衣)·중의(中衣) 같은 것이 있는데 몇겹의 넓은 소매로 하여 행동하기가 불편하다. 옛날 제도를 찾아 보아도 이와 사뭇 달랐다. 지금부터 조금 고칠 것이니 좁은 소매의 옷과 전복·사대(戰服絲帶)만을 입어 간편하게 하라.
곧 평상복으로 도포와 같은 불편한 옷을 입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만 관복의 개정은 유보해 두었는데, 뒤에 갑오개혁에 와서 관복개정이 단행되었다.
이 복제절목(服制節目)이 내려지자 조정은 반대논의가 들끓었다. 이 변개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이나 선왕의 법제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재야로 전해지자, 유중교(柳重敎) 같은 유생은 통곡을 하며 “이것은 선왕의 법복을 헐어서 오랑캐 제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외쳤다.
남원의 유학 이흥우(李興宇), 청풍의 유학 김상봉(金商鳳) 등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전면 반대하기도 하고 절목의 일부를 고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송근수(宋近洙)·송병선(宋秉璿) 등은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그들의 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째, 귀천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의(周衣)를 통일하여 입게 되면 양반·상민의 구분은 물론, 유생·하례(下隷)를 서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의관·문물은 선왕의 제도요 문명인의 기준이 되는데, 옛 제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고치게 되면 선왕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요, 또 선왕의 법도를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세째, 소매를 한겹으로 하거나 짧게 하는 것은 좌임(左衽)의 제도로 서양의 풍속을 따랐다는 것이다. 일본이 서양의 의복제도로 바꾸어 이미 서양 오랑캐가 되었는데 우리나라도 간편을 위주로 의복제도를 바꿈으로써 오랑캐가 된다고 했다. 이 이론이 ‘용하변이론(用夏變夷論)’이다. 더우기 명나라의 의복제도에서도 간편을 위주로 하지 않는 점을 들어 중국의 제도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소중화(小中華)의 미풍인 ‘장삼광수(長衫廣袖)’가 이로써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송근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릇 의복은 옛 성왕이 문장(文章)을 삼고 귀천을 나타낸 것이다. 대개 귀천을 표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길흉(吉凶)을 변별하고 남녀를 구분하고 화이(華夷)를 정하게 한 것이다. 의복을 고치면 명분이 옮겨지고 명분이 옮겨지면 의리가 제대로 설 수가 없기 때문에 요임금의 옷을 입으면 요임금이 될 뿐이요, 걸임금의 옷을 입으면 걸임금이 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제의 개정은 귀천·남녀 또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없이하는 것이며 소중화의 표상이 상실된다고 보았다. 더우기 이 문제와 연결하여 당시 군복이 간편한 복장으로 바뀐 것까지 거론하였다. 곧 군복도 상하를 엄격히 구분하는 표상이 되는데 간편만을 내세워 이 기준을 흐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복제개정에 대한 논란은 바로 ‘용하변이’의 문제로 연결되었고 또 의상을 서양 오랑캐 식으로 차츰 이행하는 데에 반발한 반양무(反洋務)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때에 조복(朝服)·관복(官服)이 고쳐지자, 단발(斷髮)의 문제와 함께 의병항쟁의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