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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대 환란의 의미
말세에 대 환란이 일어납니다, 대 환란을 세 가지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 환란이 일어난다고 하니까 첫째 공포, 무서워서 그리고 우리가 이 환란을 어떻게 이겨나가겠느냐 그러고 겁부터 집어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잡고 계세요. 어떤 환란이 일어나든지 어떤 무서운 일이 생기든지 우리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겠다고 예수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절 말씀에 대 환란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환란이란, 하나님의 심판이다. 둘째, 이것은 바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거다. 셋째 마지막 때 큰 추수 작업을 하시게 된다. 대 환란의 첫째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성경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노아 시대의 대홍수 심판, 죄가 얼마나 관용했는지 하나님이 싹 쓸어버렸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의 불벼락 심판, 그러시면서 마지막 때에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이 마지막 때에는 세상을 불로 심판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시려고 전부 준비해 놓으셨어요. 그 불 중에 가장 무서운 불이 이 핵폭탄의 불이죠. 핵폭탄의 불 이게 떨어지기만 하면 세상은 완전히 불바다고 이 핵폭탄 떨어진 자리는 오십년 가도 회복이 안 됩니다. 이런 재앙은 전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일이 생기면 빨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서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근데 마지막 때는 어떤 환란이 일어나느냐 처처에 기근이 있다, 지진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난다 온역이 일어난다, 이게 네 가지 아주 가장 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면서 폭풍도 일어나고 태풍이 일어납니다. 또 바다의 쓰나미가 일어납니다. 처처에 재앙이 가득한 세상, 그런데도 마지막 때 사람들은 그런 재앙이 일어나도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 회개하지 않는 것 같아도 회개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목하시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많이 일어나게 하셔가지고 이 땅을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난이 일어날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 세상에 왜 환난이 일어나느냐, 인간이 짓는 죄는 크게 세 가지예요. 첫째 도덕적 타락입니다. 세상이 도덕적으로 너무 많이 타락합니다. 그 도덕적 타락에 제일 앞장서서 인도하는 게 음란한 거예요. 세상에는 음란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둘째가 지식적인 타락입니다. 공부는 많이 해서 아는 거는 많은 것 같은데 그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론을 가르치던 미국에서 인제는 학교 선생님이 창조론 얘기하면은 학교에서 쫓겨나게 생겼고 심지어는 대학교 교수도 창조론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런 세상이 되었고 학문은 자유가 있는데 뭘 가르치거나 그거 가지고 함부로 비판하면 됩니까? 잘못된 걸 가르치면 괜찮고 바른 것을 가르치면 정죄하고 쫓아냅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서 진리를 가르치면 쫓겨나는 세상이고 거짓을 가르치면 세상에서 환영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지식은 과학 지식 같은 거는 엄청나게 발달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은 사실상 다 무너집니다. 거짓됩니다. 그래서 이 첫째 도덕적인 타락이 오고 그다음에 진리의 타락이 옵니다. 영적인 타락이 오면 어두워집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빛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또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이 빛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캄캄해져요. 소금이 되어야 할 성도들과 교회가 소금 노릇을 못하면 짠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패가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지막 때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도 더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늘 명심하고 이 마지막 때의 대 환란을 예비하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대 환란은 하나님의 연단이다.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십니다. 불속에 집어넣어서 연단시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거는 그냥 연단을 받지 않으면 우리 평범하게 그냥 믿으면 그거는 금광석과 같아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금광석은 그 자체로 값이 나가지 않습니다. 용광로에다가 집어넣어서 뜨거운 불로 다 녹여내면 무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순금은 순금대로 무거우니까 가라앉게 되고 다른 찌꺼기들은 위에 뜨는데 순금만 싹 뽑아내게 되는 거죠. 이렇게 순금이 돼야 가치가 있습니다. 철광석도 철광석 자체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철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철이 분리되어 철만 나올 때 이것으로 우리가 필요한 병기도 만들고 농사 도구도 만들고 또는 여러 가지 기구들을 이렇게 만들고 다 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용광로에다가 집어넣어서 연단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지막 시대 사람들은 다 너무 편안한 것만 좋아해서 연단 받기를 싫어합니다.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은 다 싫고 편한 것만 하려고 합니다. 남한테 욕먹는 거 싫어하고 칭찬받기만 좋아합니다. 목사님들도 설교가 구수하게 모든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거지 책망하는 소리 안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해야 된다는 소리 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소리도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왜? 자기가 체험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잘한 것 같은데 그게 가짜죠.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따라가야 돼요. 연단 받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속에다가 집어넣으십니다. 스가랴 9장 13절-14절을 보면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큰 환란을 주시고 이렇게 불 가운데다가 집어넣으시는 거는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거예요. 그중에 3분의 2는 다 쓸어버리시고 3분지 1만 남는답니다. 지금 인구가 70억이 넘는데 70억의 3분의 2면은 46억이 죽는다는 얘기예요. 우리의 믿음도 순수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제물들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대 추수 작업이다. 마음이 가난해져 있을 때에는 회개하라고 외치면 이 사람들이 돌이킵니다. 또 그때는 하나님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십니다. 이렇게 해서 큰 추수 작업을 이루게 되신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대 환란의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대 환란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 대 환난은 하나님의 연단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연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십자가를 잘 진 사람은 이기더란 말이죠. 하나님이 하시면 반드시 다 이루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느냐. 이 환난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잘 치는 사람이 되고 이 연단을 잘 받는 사람이 돼야 된다. 우리가 지금 당장 바른 소리하고 불의에 대적하면 망하는 것 같은데 망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승리하더라, 이런 큰 승리를 맛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대 추수 작업이다. 이럴 때 우리가 뭘 해야 되겠느냐, 우리도 열심히 이 환난 당한 사람 찾아가서 전도해야 된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전도해봐야 씨도 안 먹히고 박해만 받지만 어려운 사람 찾아가서 전도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가 이 거룩한 일을 위해서 같이 힘을 모으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돼야지 하겠습니다. 세상은 금방금방 지나가고 우리의 생명도 며칠 남지가 않았어요. 얼마나 세월이 빨리 흘러갑니까? 이렇게 흘러가는 가운데 우리가 재물도 바치고 몸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힘써서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놓는 귀한 일꾼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복되고 아름다운 새 열매를 맺어 나가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77. 말세 교회에 오신 예수님
오늘은 말세 교회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나오는데 2장에 네 교회가 나오고 3장에 세 교회가 나옵니다.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계시록 1장에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 보좌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시면서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요한에게 전달하십니다. 그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즉 터키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일곱 교회이다.
첫째로 그때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고, 둘째로 이 일곱 교회라는 소아시아 지방에만 있는 게 아니고 어느 시대에나 어느 지역에나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일곱 개의 교회를 주셨다. 또 다른 말로 바꿔서 얘기하면 이 세상에 교회들이 많지만, 이 일곱 교회로 분류해서 나눌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곱 종류의 교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성경 역사학자들은 이 일곱 교회를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일곱 시대로 나누어서 초대교회는 에베소교회 첫째 교회고, 그다음 교회가 초대교회의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열심이 생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이렇게 하면서 사도들이 크게 역사를 했습니다. 이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사도들도 하나씩 하나씩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마지막 사도인 요한까지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된 100년, 기원 100년까지를 에베소교회라고 보통 해석을 해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포교의 자유를 줍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까지는 무서운 박해시대였어요. 그래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이 박해받던 시대를 서머나 교회라고 얘기한다.
서머나 교회 다음에 버가모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다가 갑자기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어떻게 되느냐, 교회는 박해받을 때 순수해요. 진짜만 믿어요. 가짜들은 교회에 안 나와요. 그런데 교회에 선교의 자유가 생기니까 그다음에는 진짜를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그리고 그 위에 안디옥 교회가 있고, 로마 교회가 있고, 서로마 동로마 이렇게 교회가 있고 이집트의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있고 이렇게 5개의 큰 교구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보니까 당시에는 정통 신앙이라고 하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이렇게 혼란해가지고는 안 되겠다해서 니케아라고 하는 도시에 다섯 교구의 대표들이 모여서 교회의 교리를 통일하도록 같이 상의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니케아 신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니케아 신경은 사도신경하고 거의 똑같은데 몇 가지가 더 붙었습니다. 사도신경의 설명이 좀 불충분한 게 뭐가 있느냐 그리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제일 많죠. 그런데도 거기도 하나 더 넣고, 그리고 제일 약한 게 성령에 대해서 없어요. 우리 사도신경 예배 때마다 외우지만 성령을 믿사오며 그러고는 끝났어요. 성령은 뭐 어떻다고 믿는 건지 성령에 대한 설명이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니케아 신경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을 두 개를 더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대개가 비슷해요. 이렇게 이제 만들어진 게 니케아 신경이었는데 이렇게 하고 나서 기독교 선교가 자유로워졌습니다. 로마가 기독교 선교를 자유롭게 해주고 기독교에 대해서 박해를 하지 않았더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편하니까 교회는 세속화됩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요한이 세상 떠날 때까지 아무런 권세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없고 열심히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시대예요. 그다음에는 무서운 박해가 있었습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효되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을 큰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때는 교회가 순수했었다. 그런데 313년 기독교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크리스천들이 드디어 해방을 받게 되니까 그다음에는 급속도로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다가 590년경 드디어 교황이 전권을 가지고 구라파를 다스립니다. 이렇게 하던 시대가 넷째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급속도로 정권과 결탁이 돼가지고 이 세상을 타락시키고 기독교가 곤두박질을 치는 시대가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시대입니다. 그러다가 1517년 마틴 루터가 개혁을 일으켜서 개신교회가 탄생합니다. 개신교회의 모토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천주교는 의식 중심이었다. 3장에 들어가서 사대 교회는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예요. 그런데 사대 교회에 뭐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나도 예수님 처음 믿으면서 종교개혁은 굉장히 좋은 거고 훌륭한 걸로만 생각을 했어요. 마틴 루터는 하나도 오류가 없이 루터가 가르친 그런 교리가 다 옳은 거였을 것이다. 순진한 마음에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 개혁시대를 살펴보고 연구해보면 사실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거죠. 루터가 뭘 가르쳤어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첫째는 성경,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셋째는 만인 사제의 원칙이에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제다. 신부만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특징이 뭡니까? 구약의 제사장은 첫째 레위지파 그 가운데서도 아론의 자손이 돼야 돼요. 다른 사람은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둘째 제사장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만 받아가지고 살게 돼 있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다 십일조를 합니다. 제사장은 절대로 세상적인 직업을 가지면 안 돼, 세상에서 돈을 벌면 안 돼, 성전에서 나오는 것만 먹고 가지고 그것만 먹고 살아야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종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사데 교회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그리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렇게 가르쳐 놨더니 행함은 필요 없는 것처럼 기독교의 복음을 싸구려로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믿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니까 이렇게 교회에 나오게 된 거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한번 예정하셨으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뺏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있는 거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이거를 가르쳤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는 결과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떤 문제가 생기죠? 타락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율법적으로 타락합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마귀는 이 틈새를 노리고 자꾸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거죠. 그러니까 네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거를 깨달아라. 그렇게 해서 너 돌이키지 않으면 큰일 난다.
이렇게 해서 한 200년 지나게 되니까 교회가 타락해요. 타락하면 반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친첸 도르프 백작을 중심으로 모라비안파의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이 경건하게 살자,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강조하게 되고, 영국도 그래서 아주 극도로 타락하는데 거기에서는 요한 웨슬리가 일어나가지고 큰 부흥 운동을 일으키죠. 메소디스트 감리교회의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미국도 청교도들이 나라를 세웠지만 이 후손들이 부모의 신앙을 제대로 계승시키지를 못하고 전쟁이 나고 그러면서 세속화됩니다. 이런 가운데 백성이 타락하니까 미국에서도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이 큰 부흥 운동을 일으킨다. 이게 18세기 요한 웨슬리가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독일에서는 친젠 도르프가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미국에서는 또 이렇게 대각성 운동이라는 게 일어나고 그러다가 19세기 들어오면서 무디가 일어나가지고 무디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미국도 위대한 부흥사들이 이렇게 곳곳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미국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 세기가 바로 빌라델비아교회의 시대예요.
그리고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도 자유주의가 들어오고 신학계에도 자유주의가 들어와서 신학교를 점령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타락해요. 이렇게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는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큰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그러니까 이런 게 다 구라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기독교가 복음이 들어가 있는 곳에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거기를 때리는 거지 이렇게 동양같이 기독교 복음이 안 들어와 있는 곳에는 사실 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걸 때려서 뭐 알겠어요. 물론 타락하면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지만 하나님의 징계의 우선순위는 항상 기독교 복음이 있는 곳이다. 복음이 들어가면 각성하는 사람은 각성하지만 못된 인간들은 타락합니다. 그래서 나라 망치는 짓들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에 전 세계로 선교운동을 이렇게 벌리고 남미도 아프리카에도 전부 이렇게 복음이 들어가죠. 이런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시대라고 말한다.
20세기에 자유주의가 들어오고 또 한편에서는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나요. 또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도 있어요. 그런 것도 일어나고. 근데 근본주의는 너무 교리적이죠. 율법주의적이고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는 조금 둔감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은 미국의 침례교회 같은 데는 굉장히 율법적이고 한데 성령의 은혜를 몰라, 반대로 오순절 교회는 성령의 역사만 높이 강조하죠. 그래서 침례교회하고 오순절 교회하고는 성격이 정반대입니다. 이게 20세기에 다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세계가 구라파가 타락하니까 드디어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납니다. 그러고도 정신 못 차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두들겨 맞습니다. 이 시대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예요.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펴보겠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예수님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아멘이시오 둘째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셋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을 이렇게 세 가지로 표현했다. 일곱 교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른 단어로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표현한 거는, 이 시대에는, 마지막 시대 말세 교회에 제일 중요한 게 뭐냐, 첫째가 진실로, 진리가 없는 시대다, 진리가 없는 시대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아멘이다. 내가 진실이다. 이렇게 나타나시는 거예요.
둘째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왜 그렇게 나타나세요? 그 시대에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없으니까. 가짜가 넘쳐나는 시대예요. 눈을 씻고 찾아보려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을 찾아보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가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잖아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진짜 믿음의 사람을 찾아보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인해요.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창조의 근본을 부정한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진화론을 더 믿는다, 지금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 가르치면 선생님 쫓겨나요. 심지어는 대학교 교수 학문의 자유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강조하는 대학교에서까지도 교수가 창조론을 가르치면 쫓겨나는 시대가 됐단 말이에요.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되겠느냐 보나마나 뻔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통하여 내치리라” 그러니까 마지막 시대 사람들의 신앙은 미지근하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미지근한 신앙.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미지근합니다. 마지막 시대 교인들의 그 신앙 상태는 어떠냐? 첫째 팔팔 끓을 때까지 가지를 않아. 성령 충만, 은혜 충만 가슴이 뜨거워지고 막 열심히 하고 이러는 게 없어요. 둘째 막 열심을 냈다가 나중에 불을 꺼버렸어. 자기도 모르게 자꾸 식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번 은혜 충만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체험하고 그랬으면 그다음에는 계속해서 첫째 기도해야죠. 둘째 성경을 계속 읽고 말씀을 공부해야죠. 그래야 계속 뜨겁습니다. 이 온도가 유지돼요. 그런데 이것이 끊어지면 식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시대에 처음에는 옛날에 기도 많이 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세상이 좋아서 기도가 식어져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무섭게 말씀하시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러면서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너 나한테 와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세 가지. 뭘 사야 돼요? 첫째 주님께 가서 불로 연단한 금, 베드로전서 1장에 “너희 믿음이 불로 연단하는 금보다 더 귀하다” 우리 믿음은 연단 받아야 된다는 거죠. 연단을 많이 받아야 된다.
둘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그다음에 흰옷을 사서 입으래요. 그래서 부끄러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라. 흰옷을 사서 입는다는 건 행실을 정결하게 하라 그 말이죠. “거룩하게 하라” 그 말이죠. 이게 19장 8절 “흰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다. 죄 짓지 마라” 셋째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라. 뭐가 안 보이나요. 우리 눈에 잘 보이는데 그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거. 뭘 봐야 합니까? 영의 눈이 열려야 돼요. 마음의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나의 초라하고 추하고 악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죄가 가득 들어찬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지만 합니다. 이것이 보여야지 드디어 회개할 수 있게 되고 고침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이거를 안 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데 주님께 이 세 가지를 구해야 돼요.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 주님이 나와 함께 식탁에 함께 앉아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신다, 이거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 환란의 날이 올지라도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78. 인류역사의 종말은?
인류 역사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주변의 나라들을 다 무너뜨려서 큰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더 뺏을 땅이 없다 할 정도로 그 사람들이 알던 세계의 땅은 다 자기 거를 만들어 놨는데, 그래서 소원을 다 성취했으니까 참 행복해야 될 것 같은데 사람은 그런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통일하여 큰 땅을 차지하고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 보고 칭송하고 그러는 가운데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앉아있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은 처음에는 좋아도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게 두려움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죽이지 않을까 이런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삽니다.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호위하며 지키려고 하지만 이름 없이 빚도 없이 사는 사람은 누가 나를 해칠 놈도 없고 빼앗아갈 사람도 없고 평안하게 사는데 높아지면 그만큼 불행해진다.
둘째는 허무함이 생긴다. 다 차지하고 나면 만족함이 있고 행복이 있을 줄 알았는데 죽음의 공포가 자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워진다. 그래서 내가 죽고 나면 첫째 나는 어떻게 될까? 둘째는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뭔가 큰 것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느브갓네살 왕도 바벨론의 왕이 돼가지고 전 세계를 침략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다 자기 앞에 굴복시켰어요. 그런데 자기에게 찾아온 거는 내가 죽고 나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알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 우리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하고 비교도 안 되게 크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다. 그래서 벌떡 깼는데 꿈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용하다고 하는 사람들 다 불러 모아가지고 너희들 이 꿈을 좀 알아내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다 두려워가지고 그러죠. “왕이시여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말한 왕이 없었습니다. 왕은 잘 생각해 보시고 그 꿈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 꿈을 해석하겠습니다.” 그런데 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생각이 나야지. 그러니까 “네 놈들이 다 사람 속이는 놈들이다. 내가 꾼 꿈도 알아내지 못하는 놈들이 뭐 박사라고 그러고, 해몽 잘한다고 그러고, 뭘 잘났다고 그러고, 이게 다 우리 백성들을 속여가지고 이제까지 벌어먹고 산 거 아니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것을 해석해내지 못하면 너희 놈들 다 내가 쳐 죽여버리겠다”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가지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까지 와서 다니엘도 잡아가려고 하니까 다니엘이 “왕의 명령이 왜 이렇게 급하시냐, 꿈을 해석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낼 테니까 좀 참고 기다리셔라 그러면은 우리가 이 꿈을 알아내겠다” 그러니까 다니엘을 잡으러 왔던 신하가 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 나라에서 잡아 온 포로 가운데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말하더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혹시나 생각이 들었겠죠. 왕은 꼭 알고 싶고 박사들이고 뭐고 잘난 사람들 아무리 닥달을 해봐야 이 사람들이 알아내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가르쳐주신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자 자” 다니엘 덕에 그 나라의 박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다 살아났는데 다니엘을 죽이려고 못된 짓을 꾸미는 걸 보면 타락한 인간은 어쩔 수가 없고 결국 다 그렇게 살다가 멸망하는 거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 세 친구들을 불러가지고 함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기도예요. 그런데도 세 친구들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줄 믿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꿈을 잊어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그 꿈은 우리에게 알게 해주실 거다. 분명히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는 우리가 잘 몰라도 이렇게 간절히 네 사람이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 꿈을 알려주시는데 똑같은 꿈을 꾸게 돼요. 그런데 다니엘은 꿈을 꾸고 났어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첫째 꿈을 꿨어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둘째,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왕에게 “내가 알아냈습니다. 왕을 만나겠습니다. 왕께 이 꿈을 알려드리겠습니.” 왕이 기뻐하면서도 혹시 저놈이 거짓말 하는 거 아닐까, 그렇지만 자기가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다니엘이 와서 얘기하면 그게 다 생각이 나겠죠. 다니엘이 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왜 그런 꿈을 꾸게 됐는가, 당신은 왕께서 이 세계를 통일하시고 마음에 큰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고 고민을 한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자도 없는 그거를 대신들 모아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거고 왕만의 자기 혼자의 고민거리고 그리고 알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에요. 그래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왕에게 꿈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래 맞다 내가 정말 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 때문에 고민이 돼서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그러고 있었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꿈을 꿨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왕이여 왕의 꿈에 큰 신상을 하나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불현듯이 생각난다. 큰 신상을 봤지.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봐라. 그 신상의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슴과 팔은 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와 넓적 다리는 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리와 발은 철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니까 자기가 보았던 환상이 환하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발에 열 발가락이 철과 흙으로 섞여 있었고 이것이 하나가 되려고 해도 하나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 뜨인 돌 하나가 나타나서 이 신상을 때렸더니 신상이 와장창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신상은 무너지고 돌이 큰 산을 이루어서 이게 태산이 되었는데 이 돌의 나라는 영원하게 될 것입니다.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이 황금으로 된 머리고 이 황금머리는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조금 세월이 지나면 이보다 못한 은나라가 생깁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예요. 바사는 이란입니다. 그러니까 메데라는 나라와 페르시아라고 하는 두 민족으로 연합된 이런 나라가 생겨가지고 이라크, 바벨론을 멸망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다음에는 놋 같은 나라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두 나 메데, 바사가 무너집니다. 놋 같은 나라는 헬라, 그리스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 성경책들이 다 그리스 말로 쓰였어요. 문화를 전해주었기 때문에 로마는 통일은 시켰지만, 문화는 그리스에게 점령당합니다.
뜨인 돌은 하늘에서 떨어진 돌, 공중에 비행기처럼 날아다녀요. 이 돌이 날아와서 이 신상을 때리니까 신상이 와장창 무너져 사라져버리고 이 돌로 큰 나라가 이루어져요. 다니엘도 그 돌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어주신 이 모든 것을 같이 연결해서 볼 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다 하는 것을 알죠. 인류의 마지막 때는 결국 지금의 이 세상은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는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갑자기 세워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한 나라가 일어나는데 그 나라가 한국이다.
계시록 7장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만 4천 명이 나오고 그다음에 아무도 셀 수 없는 무수하게 큰 무리,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큰 환란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라 설명하고 있어요.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해서 이 세상이 새롭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돌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곧 머릿돌이 되었다. 이 돌이 태산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약속을 받아가지고 삽니다. 은혜로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됩니다.
79. 하나님의 어린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오늘 핵심은 29절입“다.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는 우리 성경에 몇 번 나와요. 구약에 대표적으로 중요한 거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 모리아 산에서 이삭 대신에 죽은 어린 양, 이삭의 죄만 짊어지고 죽는 게 아니고 이삭이 죽을 뻔했는데 이삭은 살려내고 이 어린 양이 대신 죽었다. 또 유월절에 죽은 어린 양은 누구죠. 두 마리의 염소를 택해가지고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져서 죽고 아사셀 그 염소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광야로 보내지고 그렇죠. 그러니까는 어느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여호와를 위한 양, 죽는 게 더 중요한 겁니까? 안 죽고 살려 살아나는 게 더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어느 거예요?
첫째부터 봅시다. 이렇게 대표적으로 세 가지 그 외에도 많이 나오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이렇게 나와요. 창세기에서는 이삭 대신에 모리아산에 바쳐져서 죽은 어린 양 그 어린 양이 바로 예수님의 상징이었다. 예수님의 상징이었다는 거죠. 거기에서는 우리가 뭐를 배웁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이삭 대신해 죽으셨다. 그러면 이삭을 대신해서만 죽느냐,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양은 이삭을 살려내고 대신 죽으셨다. 여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시냐? 내가 죽어야 될 걸 내 대신 죽으시고 나를 살려내셨다. 우리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거는 이 대신 죽으시고 내가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이 모리아 산 제단에서 우리가 깊이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도 어린 양을 준비해 놓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놀라운 거를 예비해 놓으셨대요.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깊이 깨닫고 주여 나를 주님께 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생활을 해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실 때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놀라운 보물들이 내 앞에 쌓여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애굽 땅에 이미 9가지 무시무시한 재앙이 쏟아졌어요. 이제 마지막 열째 재앙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어요. “너희는 어떻게 해라, 내가 이제 이 애굽집의 장자들을 다 쳐서 죽이리라, 너희 이스라엘 집은 어떻게 준비해야 된다” 1년 된 수컷 어린 양 준비해가지고 정월 14일 해지기 전, 저녁 해가 지면 날짜가 바뀌잖아요. 예수님은 사흘 만에 14일 날 되기 전날 13일 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15일 지나서 부활하셨다. 13일, 날이 끝나기 3시부터 6시 사이에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문설주와 안방에 발라놓고, 집에 다 들어가서 그 날이 지나기까지 밖에 나가면 안 되고 집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가족들이 다 먹어야 돼요.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느냐. 13일 날 죽으신 거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시각은 오후 3시, 그때인 거예요. 그래서 3시부터 6시 그 사이에 장사 지낸 거죠. 급하게 무덤에 이렇게 장사를 지냈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이 시간을 맞춰가지고 그렇게 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라,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은? 그분의 피를 우리도 문설주와 안방에 발라놔야 된다. 그러면 우리 집에 문에다가 갖다 발라놓을까요? 그 얘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 자기 마음 문에 발라놔야 돼요. 그러면 이 피가 있는 집에는 재앙이 못 들어와요.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만 말할 게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래서 내 죄도 지고 가셨습니다. 입술로만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그의 피를 우리 마음에 발라놓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아가야 되겠죠. 손을 들어서 그 십자가 위에서 흘리시는 주님의 보배의 피를 두 손으로 받아 그래서 우리 마음 문에다가 바르자, 이렇게 발라놓으면 첫째 재앙이 못 들어온다. 죽음이 못 들어온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서 앞으로 닥칠 많은 환난 많은 재앙 이런 것에서부터 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정말 이제 마지막 때예요. 우리에게 너희들 정신 차려라. 예수님 잘 믿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긴장해서 예수님 잘 섬기는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셋째 어린 양은 대 속죄일 1년에 한 번 민족 전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것이 칠월 십일 날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다 양에게 뒤집어 씌워 죽이고 이 양의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기도를 한다.
신학자들이 도무지 해석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데 아사셀이 뭐냐는 거예요. 아사셀을 위한 양 여호와를 위한 양이다. 오케이, 그거는 쉬워. 하나님 앞에 그래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거니까 아사셀을 위한 양이다. 이건 뭐냐, 그러니까 학자들이 설명을 제대로 못 해요. 첫째 설명은 영어로 에스케이트 고트(도피하는 염소),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는 죽는 염소고 하나는 죽음에서부터 도망쳐 나와 광야에 버려지는 거죠. 그래서 살아나는 염소예요. 이게 두 가지의 염소가 있는 거를 보여주는 거다. 그래서 도피한다고 하는 뜻일 거다. 그렇게 설명을 해요. 또 한 사람은 이 버려진 장소를 가리켜서 아사셀이라고 그랬을 거다. 그런데 딱 그럴 듯 하면서도 사실은 이게 뭔가 안 맞는 거거든요. 셋째 아사셀이라고 하는 거는 아마 마귀가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지는 양, 또 하나는 마귀에게 바쳐지는 양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거 아니냐. 근데 그렇게 말하면 아니, 이 양을 마귀한테 바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는 우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이거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 것이냐. 제일 처음 제사로 말미암아서 둘로 갈라진 게 아벨과 가인입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했어요. 여호와를 위한 양. 가인은 살아났어요. 그리고 쫓겨났어요. 광야에 버려졌어요. 그는 아사셀에게 바쳐진 거예요. 내 죄벌이 너무 중요해서 내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깎아주시질 않아요. 너는 네가 지은 죄에 대한 그 죗값을 짊어지고 고생을 당해야 해.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가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져서 죽어요. 아벨처럼 죽어요. 하나는 안 죽어요. 살아나서 광야에 보내서 방황하고 사는데 이놈도 이스라엘 모든 불의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거예요. 불의와 죄를 짊어지고 사니까 그런 거 안 짊어져도 나 하나 먹고 살기도 사실 쉬운 거는 아니잖아요. 풀이 많은데 좋은 데 가서 살면 그놈들도 쉽겠지만 풀도 없는 데 가서 먹으려면 매일마다 풀 뜯어 먹으려고 산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고 그러고 돌아다니면 여러 가지 사나운 짐승들한테 잡혀 먹힐 수도 있고 얼마나 위험해요. 이런 위험한 속에서 이 염소가 몇 년이나 더 살지 몰라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그러니까는 가인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은데 하나님은 죽이시지를 않고 그냥 내버리셨어요.
그러다가 새롭게 깨달아진 게 뭔가 하면 고린도전서 5장이에요. 아까 5장 7절에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 앞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아주 무섭게 책망합니다. “너희 가운데 내가 듣자 하니까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 하는 놈도 있더라” 그러니까 아버지의 후처든지 첩이든지 그런 여자가 자기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될 그런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있더라.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 교회에서 그런 놈을 쫓아내지 않고 감싸고 있느냐. 그런 자들을 쫓아내라”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쫓아내서 그런 자들을 사탄에게 내주래요. 그래서 아 여기에 답이 있구나. 아사셀을 “마귀다, 사탄이다”라고 설명한 것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제물로 준 거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죄지은 자를 교회에서 내쫓아라. 교회에서 이놈을 자꾸 끼고 있으면 하나님이 징계를 못하셔. 왜? 징계를 하면 예수 믿는 사람도 저렇게 벌 받고 예수 믿는 사람도 저렇게 망하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니까. 이 보호막 안에 들어있을 때에는 하나님도 징계를 안 하신단 말이에요. 내쫓아버리면 바깥에 가면 하나님이 징계를 하실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사탄에게 내줘라. 사탄이 그 사람에게 벌을 준단 말이죠. 사탄에게 매어서 실컷 고생을 하게 만들어라. 죽을 고생을 하는 가운데 드디어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그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 하는 게 사탄이냐. 죄 지은 놈들 때려가지고 벌 줘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게 사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사탄을 벌주지 않고 놔두시는 거지. 그러니까 죄지은 놈들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주셨어.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 말씀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탄이 건드리지 못해. 이 세상에 무시무시한 환난이 일어나지만, 악인들은 이 환란으로 인해서 죽을 고생을 당하고 이렇게 고통당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이 아사셀에게 준다고 하는 얘기는 아사셀이 이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염소도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거예요. 죄를 짊어지고 사니까 죽을 고생을 하고 사는 거예요. 내가 나 하나의 죄만 짊어져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데. 내 가족들의 죄를 다 짊어진다. 나 하나 죄도 감당하기 힘든데, 내 처자식들 것까지 다 짊어진다. 그거 얼마나 무거워요. 그것까지는 그런 대로 내 식구니까 된다. 그래도 이스라엘 전체 내 백성 전체의 죄를 짊어지고 산다. 이거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러니까 인생의 괴로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어려움이 옵니다. 뭐가 잘 되는 것 같은데 잘 되는 게 아니에요. 이제 죽을 고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셀이다.
아사셀의 둘째 의미는 그 아사셀을 위한 양 아사셀에게 던져준 바 된 양, 그게 누구냐. 그거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 전부 다예요. 그런데 저 바깥사람들은 그걸 몰라. 그 염소가 그걸 알겠어요? 그건 모르는 거예요. 누가 깨닫습니까? 성도가 돼야 비로소 깨달아요. 아~ 내가 나의 죗값으로 인해서, 나의 죄만이 아니야. 작게는 나와 내 가족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지고 이런 고생을 하고 사는 거고, 더 크게는 이 나라 내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예요? 예수님은 둘 중에 여호와를 위한 양이잖아요. 예수님은 두 염소를 갖다 놓고 제비뽑기를 했을 때에 예수님은 죽는 양으로 뽑혔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는 양으로 뽑혔어요. 왜 살아야 됩니까? 아사셀에게 던져줘서 실컷 고생 당하라고, 고생하면서 첫째 내 죄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죄를 깨닫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아 알게 만드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달게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도록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 역사를 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이런 일이 있었나 그런 거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거를 찾아내야 돼요. 그래야 비밀이 풀리는 거예요. 마가복음 15장 7절에 보면 우리 공동 번역 성경, 천주교하고 같이 만든 이 성경에 그렇게 말했어요. 빌라도가 묻습니다. “너희는 이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또 하나는 바라바 예수냐?” 바라바의 이름도 예수예요. 영어 성경 가운데는 NEB 성경, 뉴 잉글리시 바이블이라고 하는 이 성경이 그렇게 번역을 했어요. 두 예수가 있다. 두 염소가 있다. 한 염소는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진 염소. 또 하나는 사탄에게 내준 바 된 염소. 그래서 바라바는 염소니까 자기는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염소로 이렇게 놓임 받는다는 걸 몰라요. 그런데 바라바는 어떤 사람이냐. 특별히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 원어를 가지고 이렇게 해설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으로 인해서 이제 사형수가 되어 있는 그런 죄수였는데. 민란이라는 게 뭐냐? 이것이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이었다는 거죠. 로마에 대항에서. 우리로 치면 옛날 일제 때 일본에 대항해서 애국운동하던 사람. 그래서 목숨 걸고 싸우고 투쟁하고 백성들 선동해가지고 막 폭동 일으키자, 그러고 폭동과 민란으로 인해서 잡힌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좋게 얘기하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사람이다. 좋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만 볼 거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성경에서 빌라도를 훌륭하다고 추켜세운 게 아니니까. 오히려 애국 운동하는 척 하면서 그거를 이용해가지고 돈벌이를 하고 자기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잘난 척하고 이제 그런 짓하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깨달은 건 바라바가 바로 이거로 놓임 받은 염소였구나.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렇게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다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는 놓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다 놓임받은 사람들, 이것을 우리가 깊이 깨닫고 이제 주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상태까지 가야 됩니까? 우리도 내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쳐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이런 자리에 우리가 나아가야지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도 제대로 짊어지지 않고 그렇게 살아요. 최소한도 내 죄라도 짊어지고 십자가를 달게 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깨닫고, 그리고 내가 또 어떻게 십자가를 쥐고 주님을 따라가야 될 것인가 하는 거를 깊이 깨닫고 악하고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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