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12:44-50 / 대림절 첫째주일
1077년에 출간된 안셀무스의 <모놀로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존재한다.”
이미 이곳에 계신 분들은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머리로는 알지만, 자신의 삶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큰 것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여기고 사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장식품이나 혹은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서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들어있는 지니를 불러내듯이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셀무스가 이 책에서 언급한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절 첫째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Advent)은 예수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누가 오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십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의미를 담아 창조절로 끝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새로운 삶의 시작, 이 모든 것이 연결됩니다. 대림절을 상징하는 색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왕’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난’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고난 겪으시는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에 대림절의 상징색은 보라색이 된 것입니다.
■ 화육(incanation)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을 표현할 때 ‘육이 되시다(화육 incanation)’라고 표현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첫째, 당시 풍미하던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곳입니다. 여성이나 병자나 가난한 사람은 자신 아니면 조상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며 살아가는 중이며,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누리고 살아가는 이들조차도 영적인 삶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은 보잘것없는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악투성이 육체를 속히 벗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게 한 교주들과 권력자들은 이 세상의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았지요. 이렇게 부패한 세상을 성경은 ‘어두워졌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더럽다고 여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미 주어진 말씀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한 것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아신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당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오셨음에도 ‘그분 안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그분을 영영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미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하셨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 빠져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직접 그들이 더럽다는 육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세상에 오시어, 인간의 육체도 이 세상도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셨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죄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어두운 세상 풍조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그 세상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 대속죄로 오신 예수님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대림절에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반복되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2018년 대림절에도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때문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만일,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셨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십자가의 은혜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에 대속하는 방법으로 ‘어린 양’을 위시한 동물을 제물로 바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대신 죽어가는 동물의 아픔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동물이 ‘흠 없는 어린 양’이었던 것이고, 그렇게 회개의 제사를 지낼 때마다 그들의 아픔을 눈으로 봄으로 보이지 않는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대속물로 희생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도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배려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동물을 속죄 제물로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모든 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단 한 번의 완전한 속죄 제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구원이 있으며,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 한 장 남은 달력과도 같은 삶
두툼하던 달력이 어느새 한 장 남았습니다.
올해는 11월 달력을 넘기다 문득 제 삶의 달력은 몇 장이 남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새벽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저 혼자였습니다. 다 씻고 몸을 말리는데 거울에 머리가 빠져서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데다가 탄력을 잃어버린 몸, 한눈에 보아도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매력이지 않은 중년의 한 남성이 보입니다. 나 혼자 있었는데 또 누가 그 사이 들어왔나 싶어 안경을 끼고 보니 사각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입니다. 청년기를 보내고 중년의 삶 언저리에서 노년의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제 삶이 마치 한 장 남은 달력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끝난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서 살기에 좋은 시간이 남았음을 느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세월이 36년이 되어가는데, 목사로 살아온 세월이 23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저는 하나님을 알아갈 뿐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 삶에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그분이 왜 나 같은 불량품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지 못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불쌍한 한 존재가 접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알려고 하는 불쌍한 존재가 접니다. 그런데 이 불랑품인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오고 계신 것, 이것이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 빛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지난주에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습니다. 영국의 록그룹 ‘퀸’에 관한 영화였는데 멤버 중 보컬이자 키보드를 담당했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조명한 영화입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을 앞에 두고 만든 음악적 배경을 알고 나니 고등학교 시절 그냥 신 나게 따라불렀던 노래가 주는 감동이 무척이나 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몇몇 팝그룹들의 노래들을 찾아서 들어보았습니다. 아바, 스모키, 사이먼&가펑클, 비지스, 보니엠 등등. 여전히 사랑받는 노래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 평화’ 이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이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여전히 사랑받는 문학작품도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 평화’였습니다. 혐오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편향적이나 피상적인 내용을 담은 것들은 잠시 유행을 했을지는 몰라도 그 어느 분야든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폭력과 무력에 기초한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원한 인류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 평화’ 등의 메시지를 담은 것들과 끊임없이 약자의 아픔을 노래하고, 기록하고, 그들과 함께한 것들만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을 남긴 이들의 삶이 개인적으로는 뒤틀리고, 불완전할지라도 그들이 빛나는 그 순간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 평화’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남은 삶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설교나 삶이나 말의 주제는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만이 남습니다. 혐오나 폭력이나 절망을 노래하는 것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줄지언정 영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계시더라도 그 일이 ‘사랑, 긍정, 용기, 격려, 희망’을 주는 일인지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 없이 “그냥 먹고 삽니다.” 하시지 말고, 여러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십시오. 위대한 삶이나 문학작품 등은 모두 그냥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의미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빛나는 삶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본문과의 연결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 그분은 곧 하나님이셨고, 그분의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마지막 날과 심판’이라는 제목의 성경 본문을 택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이게 기쁜 소식이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고난의 시작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둘 사이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요 12:44).”
그래서 예수님은 안셀무스의 <모놀로기> 첫 문장을 인용해서 표현하면,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분이시고, 가장 큰 분이시고, 가장 높은 분”이십니다. 그분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안에 그분을 모시어,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치시는 귀한 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