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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만 구원 얻는다 222호
시작하는 말
이 지구의 역사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이 가까와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마지막 환난이 올 것이며, 그 후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구의 역사의 장이 마쳐지기 위해서는 남은 자가 와야 합니다. 남은 자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구원 받을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남은 자의 특성과 조건을 갖추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남은 자란 무슨 의미이고 남은 자란 누구일까요? 그리고 남은 자가 되기 위한 특성과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남은 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합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구원 받는 남은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난 남은 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난 남은 자
1986년 열린 뉴욕 마라톤 대회 때의 이야기이다. 행사 당일 저녁, 대회조직위원회는 대회 종료를 선언했다. 그런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도 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직위원회가 확인해 보니 “보브 윌랜드”라는 사람이 여전히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월남전에서 두 다리를 잃은 그는 두 팔꿈치에 가죽 보호대를 하고 두 팔로 힘들게 움직이며 마라톤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가 마라톤을 마쳤을 때 기록은 108시간 17분 18초, 4일하고도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마라토너 보브가 결승 테이프를 끊자, 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디에서 출발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끝마쳤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지구의 역사가 끝마쳐가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땅의 죄의 역사가 마쳐지게 하는 남은 자를 기다리고 계신다.
머지않아 세상의 끝이 오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최후의 날에 아무나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아무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가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남은 자란 누구인가?
1. 구원의 계획과 남은 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죄로 인해 파괴되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영원히 함께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류를 죄의 파멸로부터 구속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셨다. 이 세상을 망친 죄의 창시자 사단을 영원히 패배시키고 그 죄의 세력과 영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 구속의 경륜이 이렇게 선포되어 있다.
범죄한 인류의 첫 시조 아담과 하와 앞에서 선언된 이 선고는 그들에게는 한 약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앞으로 장구하게 이어질 세상의 역사 속에 존재할 모든 인류에게 해주신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었다. 이 선고는 사람과 사단 사이의 전쟁을 예언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사단의 세력이 최후에 부서질 것을 선언하고 있다.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들에게 선포될 선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슬픔이나 고통, 영원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운 사망 선고를 듣기 전에, 그들은 희망을 주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 약속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희가 나의 법과 명령을 어겼으므로 형벌을 받고 죄의 값인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벌과 사망의 고통은 너희가 당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당할 것이다! 너희의 죄의 값을 내가 대신 죽음으로써 속할 것이다! 내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너희의 대속물이 되어 너희 죄를 속하고 사단의 권세와 세력을 영원히 멸할 것이다!”
놀라운 구속의 계획 속에는 범죄한 인간 대신 죄의 형벌을 받을 자가 나타나 있었다. 죄의 벌을 대신 지고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줄 언약의 자손 여자의 후손이 약속되어 있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자 온 하늘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와 세계는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세계에 임할 죄의 저주의 결과는 처참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구속받을 수 있는 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지구의 창조 전에 이미 세워졌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께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구원의 계획을 미리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아들을 죽도록 내어 주는 것은 큰 투쟁이 아닐 수 없었고 자신을 죄의 대속물로 드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이 놀라운 구속을 실천하셨다. 독생자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 구속의 오묘함과 그 사랑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이 구속의 계획 속에는 놀라운 의미와 원대한 뜻과 목표가 들어 있다. 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사건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 역사에 펼쳐질 최후의 선과 악의 대쟁투까지 다 제시되어 있다. 사단과 여인, 곧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그리고 사단의 자손과 여인의 자손 사이에 적의와 전쟁이 있게 되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구속의 계획 속에는 특별히 마지막 지구의 역사 끝에 나타날 남은 자에 대한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준비될 이 세상 역사에 나타날 남은 자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드러난 “남은 자”
“여자의 씨는 네(뱀)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흠정역).
첫 째, 이 구속의 계획과 복음 속에는 사단의 권세를 끝장낼 존재가 나타나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여자의 씨 그리스도이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바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실 것이었다(히 2:9, 14).
두 번째, 이 속에는 마지막 시대에 구원을 받을 자, 마지막 시대의 역사를 끝낼 사명을 띤 남은 무리에 대한 이상이 나타나 있다. 이 마지막 남은 자손은 예수님이 죄의 역사를 끝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에 죄의 역사를 끝내고 지구가 구속을 받을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남은 자는 성경의 마지막 책이자 예언서인 요한 계시록 12장에 등장하는 남은 자와의 연계를 추정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함께 살펴보자.
이 성경절에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손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요한 계시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데, 이 장에는 하나님의 참교회, 하나님의 참 백성의 역사와 그 백성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남은 자손의 뿌리를 찾아서 올라가보면 하나님이 발표하신 창세기 3장 15절의 구속의 계획에 기원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사단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대쟁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구속의 계획에 나타난 약속된 여자의 후손과 사단 사이의 전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 12장에는 하늘에서 시작된 사단과 그리스도 사이의 대쟁투가 이 땅으로 옮겨져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창세기 3장의 언어와 주제를 사용하여 구속의 계획의 성취 과정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구원을 얻을 마지막 무리, 남은 자를 불러내시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한 두 적대적인 세력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동일한 성격과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원어성경을 비교할 때 더 확실하다. 인류를 미혹한 옛 “뱀”은 흉악한 붉은 용으로 등장하여 “여자”와 “여자의 씨중의 남은 자” ( remnant of her seed: KJV)들을 위협한다(계 12:9, 13, 17 흠정역).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남은 씨, 남은 무리를 보호하신다.
3) 남은 자의 개념
구속의 계획에 나타난 여자의 후손, 남은 자의 개념은 요한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남은 자손과 똑같은 개념으로 성경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남은 무리, 여자의 남은 자손의 개념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창세로부터 마련된 구속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후손, 남은 자는 영어로 “remnant” 인데, 히브리어로는 “아하리스, 샤아르, 야탈” 등으로 그 의미는 남은 자, 남겨 논 이삭, 곡식과 과일의 끝물, 종자 씨, 인내하다, 견디다, 살아남다, 끝내 승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흠정역 성경에는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의 여자의 남은 자손이 “여자의 씨 중에 남은 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자의 씨(her seed)”라고 강조되어 있다. 이 “여자의 씨”라는 표현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표현과 똑같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 헬라어 성경도 똑같이 “her seed”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대쟁투라는 동일한 관점과 “여자의 씨”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두 실체가 동일 인물인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의 남은 자손은 종말시대에 불쑥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남은 자손은 인류가 범죄 했던 창세 때에 구원의 복음의 약속 안에서 “여자의 씨”와 함께 이미 존재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었지만 정한 때에 인류를 위해 나타나신 것처럼, 남은 자손도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존재했다가 종말에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남은 자손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 남은 자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두 인물로 나타난다. 즉 여자가 낳은 아들과 여자의 씨 중에 남은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남은 자는 특별한 사명을 띠고 있는데, 이들은 구속사 속에서 사단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옹호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특별한 사명을 지녔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2장은 이들이 누구인지 식별해 낼 수 있는 예언적 코드를 담고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남은 자에 대한 연구를 해보기로 하자.
남은 자의 계보
남은 자의 계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7~28).
우리가 연구할 남은 자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남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충성되게 남아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실한 백성 중에서 여자의 후손을 태어나게 하셨고, 그를 믿는 신앙과 믿음 속에서 마지막 남은 자가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남은 자의 계보를 이으시기 위해 특별히 섭리하셨다.
1)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보존하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면, 충성된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그 남은 자들의 계보를 이으시기 위해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그분의 계명과 뜻에 순종하고 따르는 신실하고 충성된 남은 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아담의 시대로부터해서 남은 자는 늘 소수였다.
아담은 그의 첫째 아들 가인이 약속의 자손이 되기를 바랬으나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떠나가버렸다. 그는 에덴의 회복에 대한 약속도 버리고 죄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자기의 소유와 즐거움을 얻으려고 여호와 앞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벨 대신 주신 세번 째 아들 셋이 하나님 앞에 남은 자가 되었다. 셋의 후손들은 악에 물들게 하는 가인의 후손들의 감화를 피하기 위하여 산지로 물러나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하게 살았다.
2) 남은 자라는 단어의 출현
성경에 남은 자라는 개념과 사상이 나타나게 된 때는 노아의 때였다. 노아 홍수 사건 때에 비로서 남은 자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단어가 성경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남은 자의 사상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 히브리어 동사 “샤아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 7:23)에서 홍수와 악으로부터 보존을 받은 “남은 자”에 대한 단어가 “남았더라”라는 단어로 등장한다.
땅 위의 모든 생명체가 죽었지만 대홍수 심판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방주를 예비하여 그 속으로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원어를 연구해보면, “명령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계명”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곧 노아는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히 준행하는 자였다. 비가 내리지 않던 때에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다. 노아는 대격변적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로서, 마지막 심판에서 살아남을 종말론적 남은 자손을 상징할 수 있다.
말세의 남은 자손도 노아와 같은 동일한 경험을 해야 한다. 남은 자손은 심판시대에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남은 자 “샤아르”라는 단어는 ‘무가치하고, 수적으로 적은’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남은 자는 무가치하고 숫적으로 적지만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귀한 무리이다. 예수님 때문에 가치있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주님의 보혈의 피가 씻어주지 않으면, 그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고 구원을 받지 않으면, 인간은 무가치하다. 그러나 귀한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주님의 택한 자손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3) 여자의 후손의 계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도 남은 자를 준비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보면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다른 국가에 빛이 되어 이방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도록 선택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이 한 국가로서 세상에서 구원의 빛을 발하기를 원하셨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윗이 왕이 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후대의 왕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로 계속 나아갔고, 극한 우상숭배에 빠졌다. 특히 북쪽 이스라엘의 7대왕인 아합은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국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 숭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엘리야이다. 그는 갈멜산에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내었고 창조주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확히 계시되었다. 그러나 이세벨의 위협으로 도망을 간 엘리야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에서 남은 자가 언급 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말에서 나만 혼자 남았다고 말한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이런 엘리야의 주장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남은 자의 사상이 다시 상기되었다. “샤아르” 곧 살아남은 자들,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종속되었을 때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셨는데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이 사건에서 남은 자라는 개념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개념에서 개인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그후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계속 실패하였다. 결국 앗수르에게 나라를 잃고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게 망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보존하시려는 계획이 실패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내어다보시고 이제는 한 국가로서의 남은 자가 아닌, 개인적으로서의 남은 자를 보존하시려는 계획을 펼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면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언약 속에는 약속의 자손 메시야의 탄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보존하신 이유는 그 백성을 통해 언약의 자손 메시야의 탄생하실 계보를 이으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여자의 후손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마지막 시대에 역할을 담당할 하나님의 남은 백성 남은 자손을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4) 이사야가 말한 남은 자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남은 자에 대한 계획과 이상을 가지고 계셨고, 남은 자들을 남기시리라는 예언을 선지자를 통해 거듭 말씀하셨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이사야서에는 유난히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는 남은 자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예언하고 전한 선지자였는데, 그는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을 가장 잘 이해한 선지자 중 하나였다. 이사야는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 전해야 할 기별을 온몸과 생애로 전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예언을 믿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는 장자의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었다. 그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남은 자가 나타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믿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 1:8,9).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사 4:3,4).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10:20~21).
그런데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이사야의 믿음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구절은 다음의 성경 구절이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것은 누구를 기리키는 것인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외의 한 백성, 즉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리라는 예언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마지막 시대에 구원을 받을 남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백성을 고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으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분이 고대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의 구상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참백성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또 보존하셔서 그 남은 자들의 계보 중에서 결국 그렇게 고대하시는 마지막 한 백성 탄생시키실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온전한 구속의 사업의 목적이 성취되고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 백성을 고대하고 계시다. 그 사람들은 언제 나타나며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마지막 남은 자의 출현과 특성
마지막 남은 자의 출현과 특성
앞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성경에서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남은 자손, 하나님의 참 백성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요한 계시록 12장이다. 이 장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참교회, 참백성을 보존하시는 섭리와 인도하심이 잘 명시되어 있는데, 이 참교회의 정체와 남은 자의 정체성은 서로 일맥상통하며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함께 살펴보자.
1) 첫 교회의 등장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 12:1).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아내를 상징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후 11:2),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렘 6:2) 같은 표현을 봐서 알 수 있듯이, 여인, 처녀,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참 교회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해를 입은 여자는, 의의 태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지고 그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교회를 상징한다. 발 아래 달이 있다는 것은, 달은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므로, 햇빛되신 신약의 예수를 가리키는 예언을 가진 구약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구약의 예언을 기초로 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신약의 교회, 초대시대의 순결한 교회를 가리킨다. 면류관에 달린 12 별은 12 사도를 상징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직접 진리를 받은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 변하지 않은 진리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사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 묘사된 찬란한 모습의 여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한 12 사도들이 전한 복음 위에 선 하나님의 참 교회, 그 복음대로 믿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잠깐 참교회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교회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큰 건물도 아니고 국가적인 설립기관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여러 각종 교파들도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참자녀 초라한 몇 사람들 중에라도 계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고 산 연합 속에 있는 참 자녀들이 교회이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거하시는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에클레시아”(ejkklhsiva)라는 용어는 본래 “주의 백성이나 회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란 꼭 어떤 교단이나 조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참교회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적을 가지고 있고 교회의 명부에 이름이 올려져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짐승의 표가 강요되는 환란의 때에는 그 법령에 복종하지 않는 이상 조직이나 교단이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때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서야 하며 그 때에 하나님의 참교회와 참 백성으로 서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야말로 하나님의 참백성들이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곳 저곳으로 모일 것이다. 수 많은 영혼들이 혈연 관계와 교회 관계를 뛰어 넘어 진리의 깃발 아래로 모일 것이다.
교회란 하나님의 진리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살며, 그 진리로 변화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참 백성이 교회이다. 그리고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남은 교회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2) 초림 때의 남은 자를 통해 생긴 교회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구속 사업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메시야의 사업을 알아보는 사람도 극히 적었다.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남은 자 침례 요한을 일으키셔서 메시야의 초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왕의 임하심을 위해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뒤에 오시는 이” 곧 그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메시야를 백성들이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0~12).
침례 요한은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세우실 은혜의 왕국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많은 유대 백성들이 그의 기별을 들었지만 그 기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침례 요한의 기별을 받아들인 신실한 무리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위대한 사명을 성취시킬 소수의 남은 자들을 발견하셨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인 당대의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순결한 교회를 세우셨다. 오순절 성령을 통해 이제 복음은 세계 각곳과 이방인에게로 퍼지게 되었다.
3) 참교회의 역사
요한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참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이 누가 나오는가? 여자, 아이, 용이 나온다. 여자는 교회라는 것을 공부했는데, 그러면 거기 등장하는 큰 붉은 용은 누구인가? 큰 용은 옛 뱀, 곧 마귀 사단으로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 그러면 여자가 해산하여 낳은 아이, 용이 삼키려고 벼르고 있는, 만국을 다스리고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간 이 아기는 누구일까?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땅에 태어나셨다가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7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7절)라는 언급처럼 4절과 7~9절에 용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나온다. 사단은 하늘에서 최초로 죄의 반역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사야서에는 사단의 성격과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바벨론을 빗대어 사단으로 상징해서 표현해 놓았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사 14:12). 여기서 계명성은 히브리어로 “헬렐”이고 라틴어로는 “루시페르”인데, 영어로 “루시퍼”(Lucifer)로, 한국어로는 “루스벨”로 표기되었다.
용으로 표상된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진리와 참신앙을 지키는 무리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여자)가 광야로 도망가서 1260일 양육받게 하셨다. 여기에 보면 광야 교회의 정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중세기 시대에 교황권의 핍박을 피해 광야로 간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종교 탄압과 오류의 가르침을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교황권의 핍박 때문에 피신해야 하였다.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교황권의 핍박이 극렬해지자,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전수받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깊은 산과 계곡으로 숨어들어 갔다. 특히, 신실한 왈덴스인(Waldenses)들과 휴그노와 알비젠스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산 속과 광야에 숨어서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교황권의 압력과 핍박에 대항하였던 사실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보존하는 일들을 했으며,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이교의 가르침이 혼합되지 않은 올바른 순수한 복음을 가르쳤고, 사람들을 교회와 성직자에게 매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오라고 전도하였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면, 용이 여자를 핍박하여 물을 강같이 토해 여자를 떠내려 가게하려고 할 때, 땅이 물을 삼키고 여자를 도와서 보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생애의 빛에서 가르치는 예언을 연구한 사람들은 잘 주지하고 있듯이, 그것은 사단이 1260년 간의 종교 핍박시대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살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땅으로 표상된 신대륙 미국을 통해 하나님의 참교회, 참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여자의 남은 무리를 탄생시키시는 이야기이다.
4) 마지막 남은 자손의 출현 시기
요한 계시록 12장의 참교회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종말론적 남은 자가 나타나는 출현의 시기를 유추해 낼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자는 언제 나타나는가? 12장에 예언된대로 1,260년 동안의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의 핍박이 지난 후에, 즉 다니엘의 예언 중에 나타나 있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핍박시기 후에 나타난다(단 7:25, 계 12:6, 14 참고). 이 예언적 기간은 다니엘서의 가장 긴 예언 2300일 예언에 나타나 있는 기간인데, 1260년의 예언적 기간이 끝나는 1798년에 교황권의 세력이 폐해지게 되었다. 그 즈음에 종교자유를 표방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땅으로 상징된 미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대로(단 8:14),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과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중보 사역을 위해 지성소 사업에 임하시는 예언이 성취되는 때에 남은 자손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자의 특성과 경험
마지막 남은 자의 특성과 경험
그렇다면 왜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예언(단 8:14)이 성취될 때에야 마지막 남은 무리가 출현해야 하는가? 남은 자의 특성의 연관성을 연구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성경에는 남은 자의 특징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두 성경절이 나오는데 다음의 구절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마지막 남은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둘째는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것, 세번째 특성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마치 뗄레야 뗄 수 없는 세 쌍둥이와 같다. 이 특성은 마지막에 구원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해보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남은 자의 특성이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까?
하늘에서 시작된 선과 악의 전쟁의 중심에는 계명이 있었다. 처음부터 사단의 고소는 “하나님의 법은 피조물이 지킬 수 없는 불공평한 법이다”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부에 반역을 일으킨 사단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법에 도전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하나님의 법이 공의롭고 지킬 수 있는 법이며, 피조물의 행복와 안전을 보장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필요가 있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이 필요하신 것이다.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들어갈 것이고 그래야만 하늘을 또 다시 죄의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
계명, 율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다. 계명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나타나있다. 또한 계명은 울타리이다. 피조물을 보호하는 울타리로서의 법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안전하게 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계명은 또한 몽학선생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24).
그리고 계명은 거울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약 1:23).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범죄로 연약해진 본성을 타고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게 하고 거울처럼 나의 죄와 더러움을 지적해준 후,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준다. 계명에 자신을 비쳐본 사람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 때에 구세주되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남은 자의 특성 중에 하나님의 계명 다음에 예수 믿음 언급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연구해 보자.
예수 믿음을 가진 자
예수 믿음을 가진 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계명을 지키려면 예수 믿음 필요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도 없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가능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방법을 마련 하셨다.
1.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인데, 바로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보내시어 죄를 정죄하시는 일을 하게 하셨다. 곧 죄의 세력을 꼼짝도 못하게 이기시고 승리하는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뜻은 죄를 죄라고 “condemned”하신 것, 즉 죄를 죄라고 정죄하신 것을 말한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우리와 같은 인성을 타고 나셨을지라도, 비록 육신으로 보내심을 받을셨을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는 거룩한 생애를 사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뜻인데, “condemned sin in the flesh”에서 “condemn”는 “폐기처분하다”, “멸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심으로 실제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라는 구절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영어 원문으로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likeness”는 “안과 겉이 본질상 똑같은”이라는 원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모양만 취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죄 있는 육체(Sarkos hamartias)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음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 2장 16절을 보면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킹 제임스 역)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실 때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과 같은 본성, 즉 아브라함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
빌립보 2장 5~8절에도 이 사실이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문장, “likeness of men”에서 “likeness”의 원어는 “Homoiomati”로서, “본질과 똑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죄의 문제 해결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고 출생하게 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을 쓰고도 죄악적 세력이 꼼짝 못하도록 제압하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 계명을 지키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2. 두 가지 믿음
죄로 인한 연약성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타고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믿음이 필요하다. 남은 자의 특성인 예수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 두 가지이다.
A. 예수를 믿는 믿음
사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진짜 큰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해주신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믿음은 큰 일을 이룬다. 어떤 일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귀한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며 그 죄를 다 포기하고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죄를 지을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한 새 마음을 창조해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신다. 그럴 때에 그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칭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대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제 이 예수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생애에는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 받는 거듭남의 경험이 믿음으로 생애에서 지속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마음 속에 임재하시고 동행하심으로 그분으로부터 계속 은혜와 능력을 받아 새마음으로 살게 되며, 그분의 의를 매일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새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롭게 기록된다. 그 생각과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지키고자 하는 열망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모든 삶이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과정이 동시다발 적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죄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된 율법에 대한 순종이 열매로 맺히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되어 새 언약에 들어가는 경험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 마음에 써지는 것,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 하나님의 품성이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B. 예수 믿음
두번째 믿음은 예수 믿음이다. 예수 믿음이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때에 가지셨던 믿음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셨다”고 하는 사단의 거짓고소를 분쇄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이땅에 오셔서 순종의 생애를 사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또한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그의 신성에 연합시키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도 하나님과 협동할 때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성령의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힘으로 계명이 가리키는 바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본처럼 살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죄를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자의 특성은 예수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죄를 승리하는 거룩한 생애를 사는 것이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예수의 증거를 가진자
마지막 남은 자의 특성 중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의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의 증거에 대해 언급된 성경절을 찾아보며 연구해보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계 1:2).
이 구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예수의 증거는 눈으로 본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언으로, 실제로 자신이 눈으로 본 것, 계시로 본 것을 증거하는 것과 함께 또 다른 증거가 포함된다. 다음의 말씀을 보자.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여기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spirit of prophecy”로서, 예언의 영이다. 예언의 영이란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에게 주신 귀중한 예언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어질 세상의 역사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신 말씀들로 미리 예언하고 알려주심으로 오류와 배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남은 참백성이 되도록 지켜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란 계시로 본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여자의 남은 무리 남은 자는 예수의 증거, 곧 예언해석을 가지고 있다.
남은 자가 반드시 해야 할 경험
남은 자가 반드시 해야할 경험
마지막으로 남은 자의 경험에 대해 잠깐 공부하기로 하자. 남은 자의 출현시기를 보면 마지막 남은 자가 반드시 해야 할 경험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된다. 그들은 왜 마지막 심판의 시간, 성소가 정결하게 하는 시기에 출현하는 것인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2300일 예언기에 나타난대로, 예수께서는 1844년에 성소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하늘 지성소로 임하셨다. 이 사업은 예수님의 중보사역의 마지막 국면으로서,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늘에 살 자격을 갖춘 구원얻을 백성들이 누구인가 미리 조사하시고 심판하시는 사역을 말한다. 즉,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가 조사하시는 것이다. 누가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받아들여서 그 피로 정결하게 되고, 누가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고 이기는 경험을 하는 사람인지, 누가 입혀주시는 의를 받고 나누어주시는 의를 매일 받음으로 정결한 삶을 살고 있는지,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지, 누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이루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고 순복하는 사람인지 판단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하늘 성소의 정결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 사람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보사업이 마쳐지면 더 이상 인간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시는 중보사역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하늘에서 이미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는 선고가 내려지기 때문이다.
지금 하늘에서 정결사업이 이루어지는 때와 맞추어 마지막 남은 자들은 영혼과 마음의 성전에서 죄의 정결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곧 모든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똑같이 반복되는 죄의 습관과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불의를 행하는 일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 이미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성령의 역사와 꼴지으심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어 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이룬 사람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남은 자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은 자가 준비되어야 이 세상의 죄의 역사를 마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기 준비되어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마지막 증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남은 자의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성령
의 역사에 매일 순복하고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사는 마지막 남은 자손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시는 이 때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남은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가 너를 택하였노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지상의 생활은 하늘의 생활의 시작이요, 지상의 교육은 하늘의 원칙의 초보이며 이생에서의 인생의 활동은 내세에서의 인생의 활동을 위한 훈련이다. 품성과 거룩한 봉사에 있어서 현재에 가진 우리의 모습은 내세에서 우리가 가질 모습의 확실한 그림자이다. 이 세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사업은 또한 하늘에서 하시는 그의 사업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함께 일할 때에는 내세에 있어서 더욱 큰 능력과 더욱 넓은 특권을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비록 죄로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과 최고의 교육은 봉사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죗된 인간으로서의 제한에 구애되지 아니하는 내세에 있어서도 봉사에서 최대의 환희와 최고의 교육이 발견될 것인데 항상 증거한 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신 “이 비밀의 영광이… 풍성한 것”을 새로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못해 일하시거나 또 일을 시간으로 따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모든 시간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일하셨다. 낮에는 종일 피곤하게 일하셨고 밤에는 밤새도록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하늘 아버지께 은혜와 인내심을 간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의 행위의 실제 원칙이며 또 그의 행동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는 동역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그분의 사업, 곧 그분께서 성취하기 위하여 오신 위대한 구속 사업에 종속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와 꼭 같은 헌신, 꼭 같은 자아부정과 희생, 꼭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 등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받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하여 하늘이 이루어 준 일을 명상할 때 그의 마음은 무한한 사랑과 경이로운 감사의 마음으로 감동을 받는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업에 다 바쳐 헌신함으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고자 열망하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사신 소유물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자 갈망한다. 그는 수고와, 어려움과 희생을 갈망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은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함으로 그의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모든 역량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는 모든 의무를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이행할 것이다. 그의 한 가지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존경과 완전한 봉사를 받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쟁기와 제단 사이에 서 있는 수소를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거기에는 밭 이랑에서 일을 하든지 희생제물의 단 위에 바쳐지든지 “어느 것이나 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글귀가 씌어져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자녀의 자세, 곧 즐거운 마음으로 의무가 요구하는 곳으로 가서 구주의 사업을 위하여 자아를 부정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이다.
냥쭝은 아무리 적을지라도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관계되는 문제는 내가 얼마나 받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별자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8.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우리의 일 가운데서 그의 지시를 따른다면 그는 책임을 지시고 그 일을 성취시켜 주신다. 그는 우리가 성심으로 한 노력이 가져 올 성공 여부에 대하여 추측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한번이라도 실패에 대하여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실패를 모르시는 자와 협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약점과 무능에 대하여서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 주신 짐을 인하여 불평하고 그가 우리에게 맡기시는 책임을 거절할 때에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은 인색한 주인이시고, 일을 행할 능력도 주시지 않고 요구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어떤 때에는 그는 위대한 사업을 행하시기 위하여 가장 미약한 그릇을 택하신다. 이는 당신의 능력은 약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표준에 따라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표준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냥쭝을 평가하는 일이나, 우리가 할 일을 택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지워 주시는 일을 맡아서 그를 위하여 책임지고 쉼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간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감사한 마음으로 행하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될 만큼 인정됨을 인하여 기뻐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 굴복한 모든 인간 대리자들을 반갑게, 매우 반갑게 받아주신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신성과 결합시키심으로 세상에게 성육신의 사랑의 신비들을 전달하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를 지도하심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사 58:10.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가진 재산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라. 그대의 보리떡을 예수님께 가지고 가라.
비록 그대의 자원이 수 천 명을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을 먹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처럼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그 선물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정직하고 단순하게 의지할 때 갚아 주실 것이다. 보잘 것 없는 공급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 것이 풍성한 잔치가 되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매우 충만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사하는 말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실행할 수 있는 봉사이며 주께서는 이것을 그분 자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있는 사역자에게 사람을 그분과 화목시키는 은혜를 나누어 줌으로써 이 일을 효과있게 하신다.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도우사 성취되어야 할 진지한 사업이 있음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도우사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저들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완수해야 함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 저들은 홀로 일하도록 버려둠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천사들이 저들의 조력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저희의 조력자이시다. 그러므로 저들로 충실하고 꾸준하게 일하게 하라. 만일 저희가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저들은 적당한 때에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순례자는 쉼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욕망에 굴복하지 아니한다. 그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말하기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라고 한다.
너희 빛을 빛추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세계의 전역에 자비의 사자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흑암과 오류가 덮여 있는 지역 사회로 들어가고, 외국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동료 인간들의 필요를 깨닫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고 있다. 만일 그런 가정들이 세상의 어두운 장소, 곧 영적 흑암이 덮여 있는 곳에 정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그들을 통하여 비추었더라면 참으로 고귀한 사업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이 사업은 자아 희생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장애들이 제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들이 이룰 수 있었던 사업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 있고, 많은 무리들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죽어 간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상 혜택을 위하여, 혹은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하여 불안정한 지역으로 들어가 희생과 어려움을 기꺼이 견디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복음이 필요한 지역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즐거이 옮겨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적은가.
사람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그들의 위치와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그들을 가르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봉사이다. 그와 같은 노력을 통하여 그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접근할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그대의 모든 사업에 있어서, 그대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치료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 곧 생명을 주는 물결이 그대의 생애를 통하여 흘러나야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의 영역 안으로 이끌고자 노력할 때, 그대의 순결한 언어와 그대의 이기심없는 봉사와 그대의 기쁨에 넘치는 태도가 그분의 은혜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자.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1.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자하시고 무아적인 생애를 따라 살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다… 저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계획하고 연구한다. 저들은 다만 사리(私利)를 위하여 행동한다. 시간이란 저들이 자신을 위하여 모을 수 있을 때에만 귀중하다. 모든 인생사에 있어서 이것이 바로 저들의 목적물이다. 저들이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요 다만 자신들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창조하신 것은 무아적인 봉사를 행하는 세상에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저들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저희 동료들을 도와주도록 마련하셨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저들은 자신 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저들은 인류에게 동정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잘난 체하나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다...... 무화과 나무에 내리신 형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허식이 그의 눈에 얼마나 미운 것임을 예증하셨다. 그는 드러난 죄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릴 열매를 맺지 않는 자보다 죄가 가볍다고 선언하신다.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생활이 남보다 승한 모든 점으로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모든 사람 각 개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리는 골방에서는 물론이요 사무실에서도 통용되는 진리이다. 우리가 다루는 재물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바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한 것으로 현세와 내세를 위한 인류 동포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운명은 다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함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9.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지도에 굴복할것 같으면 그분께서는 그대와 나와 그의 봉사에 참가하는 각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각 사람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을 주의 깊이 듣고 자신의 모든 말과 행위가 자기의 품성에 뿐만 아니라 그가 교제하는 사람들의 품성에도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망대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건물을 완성시키고자 날마다 다듬고 계시며 이리하여 그분을 위한 거룩한 전이 되게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모든 일꾼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영예을 받는 균형지고 아름다운 성전 곧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 순결한 생애, 고상한 행실이 그의 품성에 형성 되도록 해야 한다. 건축물에는 아무런 흠도 없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돌마다 반드시 완전하게 놓여져야 하는데 이는 그 위에 놓여진 압력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잘못 놓여진 하나의 돌은 전체 건물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대와 다른 모든 일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내신다. “그대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주의하여, 그대의 건물이 영원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은 연고로 폭풍과 태풍의 시험을 견디게 하라.”
사람마다 해야 할 “각각 사무를” 받았는데 이 사무는 그 당자들에게 알맞은 일이며 자기 자신과 그 동포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 오고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업이나 직업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의 일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일에 종사하는 한, 그 결과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을 지실 것이다.
자원하는 마음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
믿음과 사랑의 단순함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자들에게 대한 은혜의 보상은 복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가치는 일하는데 소비된 시간의 길이에 의하여서보다도 그것을 행한 정신에 의하여 평가된다.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시는 바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일에 바친 우리의 즐거운 마음과 충성된 마음이다. 모든 봉사에 있어서 우리의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성심성의를 기울여 무아의 정신으로 행한 의무는 아무리 큰 일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기뻐하시는 바가 된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는 우리가 성취한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할 때에 가진 사랑과 신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
이기심이 죽었을 때, 으뜸이 되고자 하는 분쟁심이 사라졌을 때, 오직 그런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자로서의 인증을 받게 된다.
예의의 부족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의 무지와 고집에 대하여 참을성없는 태도를 보여 주고, 빨리 말을 하거나 생각없이 행동하는 일꾼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므로 그들과 결코 접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오류에서 돌이키고자 할 때는 이슬과 조용한 비가 시들어가는 식물 위에 내리는 것처럼 말이 부드럽게 흘러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이 마음을 움직이기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성실한 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3, 24.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그대의 봉사는 더욱 성실하며, 더욱 완전하며, 더욱 철저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을 섬기고, 내키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하기를 소홀히 한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인 품성을 완성할 수 없다.
크신 교사의 정신으로 나아가 진리로 영혼들을 감동시키려고 애쓰는 자들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업이 활기 있고 고된 일이 아님을 발견 할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농부들로서 일을 맡고 있으며 저들이 저희 자신들을 하나님의 봉사에 바칠 때 저들은 더욱 더 활기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성경 말씀들을 가르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젊은 남녀들은 저들의 이웃들과 다른 지방들에서 일군들이 되도록 교육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 이 때를 위한 사업에 관하여 지혜롭게 되도록 마음과 정신을 바치게 하여 저들이 최선껏 적응 할 수 있는 그 사업을 행하도록 저들에게 자격을 얻게 하라.
가정에서 올바른 성격의 교육을 받은 많은 젊은 사람들은 봉사를 위하여 훈련되어야 하며 잘 계획된 충실한 사업으로 말미암아 새 지방들에서 진리의 깃발을 높이도록 격려 되어야 한다. 저들이 더욱 나이 많은 일군들과 함께 저희의 노력을 연합하여 바로 최선의 유익을 위해 저들의 젊은 정력을 사용하는 때에 저들은 하늘의 천사들의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로서 노래하고, 기도하고, 믿으며, 용기와 자유를 가지고 일하는 것은 저들의 특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바쳐야 하며 할 수 있는 한 완전한 제물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지한 정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그대들의 최선을 다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노력을 받으시리라. 그대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의무를 택하라. 그리하여 이를 성실히 이행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의 노력은 온전히 주께 가납되리라. 어떤 좀더 큰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일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까왔으며 매우 절박하다. 일할 시간은 짧으며 남녀들은 죽어가고 있다. 천사는 “큰 빛을 가진 자들이 사람들에게 빛과 구원을 주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그분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진리의 지식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믿는 영혼들이 그분의 신성한 능력을 소유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에 대하여 작은 감사만을 나타낼 것인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류의 구원에 효능이 있으며, 우리의 크신 대 제사장의 중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유효하게 되었다. 그 계획은 하늘에서 고안되었다. 그러한 값으로 사신 바 된 자들이 큰 구원을 감사히 여기는데 실패해야 하겠는가?
선교사들은 저들이 일을 그만두도록 강요당하기 전에 일터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은 열린 문들이 사면에 있다. 그들은 몇해의 훈련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있는 해들은 많지 않으며 우리는 아직 낮이 남아 있는 동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사에 성실함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 7:24.
하나님의 종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갑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 원수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말미암는 성공을 믿으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그분의 인도 아래서 싸우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신다.
우리는 강하신 자의 능력으로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사단의 공격에 절대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전사들로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을 대항하여 서지 아니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선물들을 사용하면서 힘차게 전진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사단은 우리 앞에 유혹을 걸어 올 것이며 그는 계략으로 우리를 정복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원칙에 반석처럼 굳게 서야 한다.
이 전투에서는 휴전이 없다. 사단의 대리자들은 저들의 멸망시키는 일에서 결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반드시 모든 전진 기지를 지켜 보아야 한다. 파멸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이것은 한 없이 탁월한 사업이며 사람은 자기가 거룩하신 일군과 연합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업에서 성공을 얻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영원부터 그리스도는 사람의 구속자이셨다. 타락 이 후 여전히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업을 통하여 그와 연합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는 말씀이 들려왔다.
그리스도인은 의료선교 사업과 관련된 복음 봉사 사업을 전진시키는데 있어서 깊은 인내성을 나타내도록 격려 되었다. 그가 성실한 종교를 통하여 경험을 얻을 때에 그는 품성을 형성하는 영적 지식을 얻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한가지의 계속적인 봉사이다.
단순함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사업은 반드시 진리의 단순함으로 전파 되어야 한다. 겸손으로 그대들의 일을 진행하라.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순함 이외에 어떤것을 더하지 말라.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들어 올릴 때 그대들은 영혼을 인도하는 사업에서 성공을 할 것이다. 그대들이 겸비와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직접 어떤 종교적 사업에 관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희 생애는 무용하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촉진시키는 일에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만일 그들이 어떤 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기쁨으로 그 일을 떠맡을 것인가! 그러나 저희가 작은 일에만 봉사할 수 있는 까닭에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평범한 매일의 의무에 종사하는 동안, 곧 나무를 베고 정지 작업을 하고 농사하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활동적인 일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녀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는 목사가 설교하는 것만큼 참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그 일들을 수행함으로 생활을 향기롭게 할, 손 가까이에 있는 의무들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놀랄 만한 사업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직접 저희 앞길에 놓인 의무를 수행하라...... 우리들로 하여금 받으실 만한 봉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훌륭한 재능이 아니라, 매일의 의무를 양심적으로 수행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정신, 다른 사람들의 복리에 대한 소박하고 진실한 관심을 가지는 데 있다. 가장 천한 형편에서 참된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용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하나님께서는 위기 중에, 힘과 용기와 모든 감화가 필요되는 때에 의를 위하여 굳게 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쓰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대항하여 충실히 싸우고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에 영들을 대적할 자들을 부르신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 23).
희망과 용기는 하나님을 위한 완전한 봉사에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열매이다. 낙담은 죄요 부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시련을 위하여 필요되는 힘을 당신의 종에게 “충분히”(히 6:17)내려 주실 수 있으시고 내려 주시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사업에 대한 원수들의 계획이 잘 놓여지고 굳게 세워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 중 가장 강한 것이라도 뒤집어 엎으실 수 있으시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와 방법으로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의 신앙을 충분히 시험하셨다고 보실 때에 행하신다.
히브리 청년들이 보인 절제의 원칙에의 충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니엘처럼 감히 바른 주장을 이행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순결한 마음, 강한 손,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악과 선 사이의 투쟁에는 끊임 없는 경계가 요구되는 까닭이다. 사단은 모든 영혼에게 식욕의 방종에 빠지게 하려는 여러 가지 유혹의 형식으로 시험해 온다. 지력과 체력과 수명은 불변의 법칙에 의존된다. 이 법칙에의 순종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정복하고 자신의 기호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을 정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정하신 무기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 16,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악을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는 풍부한 방법을 마련하셨다. 성경은 우리가 전쟁을 위하여 장비를 갖추어야 할 병기고이다. 우리의 허리는 진리로 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는 의로 흉배를 삼아야 하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가지고 죄악의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하고 언제든지 기회를 얻는 대로 큰 무리들 앞에서와 사담하는 자리에서나 길가에서나 화로가에서나 친구들에게나 원수들에게나 안전할 때나 고난과 위험, 비난과 손실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도록 준비하고 사람들의 말이나 풍습을 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말씀의 진리로 책망하고 그것을 시행하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나타내어야 하였다.
죄를 미워하고 책망하면서 동시에 죄인에 대한 동정과 친절을 나타내는 것은 어려운 재능이다. 마음과 생애의 거룩함을 얻으려는 우리 자신들의 노력이 열렬하면 할수록 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더욱 예민하여질 것이며 우리는 더욱 더 단호히 의에서의 어떠한 이탈도 용납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행악자에 대하여 부당하게 혹독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하지만 죄의 흉악성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인내와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필요가 있으나 또한 그의 과오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묵인하여 그가 자신을 책망을 받을 만하지 않은 것처럼 보고 책망을 쓸데 없고 부당한 것처럼 거절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의 모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그리스도와 같은 전도인은 일찌기 없었다. 주는 하늘의 왕이셨으나 자기를 낮추어 우리들의 성정을 취하심은 인류가 거하는 곳에서 인류를 만나려 하심이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언약의 사자 곧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다. 그의 크신 의원으로서의 명성이 팔레스틴 온 땅에 퍼졌다. 병자들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주께서 지나시는 곳으로 왔다. 또한 이곳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손의 만지심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많이 이르렀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으니 그는 곧 비천한 인류의 형상을 쓰신 영광의 왕이시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큰 절기에도 참예하여 외형적 의식만 숭상하는 무리에게 하늘의 속한 일을 말씀하시며 영원함에 대한 문제를 저희들에게 보이시었다. 지혜의 창고에서 보물을 취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시며 단순하고 평이한 말을 쓰셨으므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슬픔과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모두 도우시며 친절과 예모로써 죄로 병든 영혼들을 치료하며 그들에게 건강과 힘을 주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하라. 그는 그의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인류의 선두에 서심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아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의 모본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향하신 것과 같은 순종을 오늘날 사람에게도 요구하신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를 기꺼이, 또 자유로운 가운데서 사랑으로 봉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성취하시려고 하여 오신 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너무 크다고 생각하시거나, 어떠한 수고라도 너무 괴롭다고 생각지를 아니하셨다.
인자는 섬기러 오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그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권력을 잡게 하지 않으시고 봉사하게 하시며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연약함을 도웁도록 하셨다. 권력과 지위와 재능과 교육은 동료들에게 봉사할 큰 의무를 감당하도록 그 소지자들에게 주어졌다.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 중에서 모든 면에 있어서 심부름꾼이었으며 짐지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빈곤을 나누셨고 제자들을 위하여 극기하셨으며 더욱 어려운 곳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저들보다 앞에 가시고 미구에 당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지상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실 것이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원칙은 그의 몸된 교회의 교인들이 행하여야 할 원칙이다. 구원의 계획과 기초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예수께서 끼치신 모본을 따르고 그의 양무리의 목자처럼 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 오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성정을 쓰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성정을 취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고 의의 근원으로 하나님을 가리키셨다. 그리고 실제적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긍휼을 베풀고 기도와 금식을 할 때에 자신에게 주의를 이끌게 하거나 칭찬을 받기 위하여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빈곤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주라. 기도할 때에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라. 금식할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한 마음을 안고 다니지 말라. 하나님께서 가장 가납하실 수 있는 봉사를 드릴 자는 자신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신께 바치는 자이다. 이는 대개 하나님과 사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일에 당신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노라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께 저들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들은 부유한 동포들과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분담하기를 매우 원한다. 이런 영혼들을 거절하지 말 것이다. 저들의 푼 돈을 하늘 금고에 넣게 하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마음으로 바친다면 겉으로는 보잘 것 없는 적은 금전이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고 축복하시는 귀중한 재물, 성별된 예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과부에 대하여 그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예수의 말씀은 그 동기에서 뿐 아니라 그의 예물의 결과에도 적용되었다. “두 ‘렙돈’(헬라 동전의 명칭)곧 한 ‘고드란트’(로마 동전의 명칭)”는 부요한 유대인들이 바친 헌납물보다 훨씬 큰 금액으로 하나님의 보고에 가져온 바 되었다. 이 적은 예물의 감화는 그 시작은 적으나 각 시대를 통하여 흘러내려 오면서 넓어지고 깊어지는 시냇물과 같았다. 수 천가지 방법으로 이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공헌하였다. 과부의 자아 희생의 모본은 각 나라에서 각 시대를 통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행하여지고 다시 반복되었다.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마음에 호소하였으며, 저들의 헌금은 과부의 예물의 가치를 증대시켰다. 과부의 푼돈에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은 이것을 큰 결과의 근원으로 만들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성실한 소망으로 모든 예물을 드리고 모든 행동을 하여야만 되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유익하게 하는 이 결과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충성스러운 성실로 수행한 가장 평범한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이 지정됨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마을도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를 보여주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다.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내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시었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 저들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서 인자하시고 사려 깊으신 그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하였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도 숨기지 않으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깊은 주의와 친절한 태도로 하시었다. 무례하지 아니하시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시키지 아니하셨다. 그는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써 하셨다. 그는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단연히 견책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심한 견책을 하실 때마다 그의 말씀에는 눈물이 섞이어 있었다. 그는 사랑하시는 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었는에 이 성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를 거절하였다. 저들은 구주이신 그를 배척하였지마는 그는 저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의 생애는 극기적이고 남을 생각하여 돌보시는 생애였다. 각 영혼은 그가 보시기에 귀중하였다. 그는 언제나 위엄있는 태도를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각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우리의 사업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2.
구세주의 모본은 우리에게 힘을 주어 다른이들의 유익을 위하여, 진지하고 자아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해야한다. 그는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끈기있는 종으로 이 세상으로 오셨다. 잃어버린 바된 인류를 위한 사랑은 그가 말씀하시고 이루신 모든 것에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 중 한 사람, 그들의 궁핍과 슬픔을 나누어 받는 자로 서시기 위하여 자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우셨다. 그가 가신 길은 얼마나 바쁜 생애였을까! 그는 날마다 빈궁하고 고독하며 초라한 거처에 들어가시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희망을,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보여졌다. 이것이 그가 오늘날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사업이다. 겸손하고, 친절하시고 온유하시고, 동정이 많으신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셨다. 그분께 온 자는 아무라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주셨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기회들, 그가 하신 약속들, 그가 주신 특권들은 우리에게 훨씬 큰 열심과 헌신을 품게 하실 것이다. 교회에 추가되는 매 사람마다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더욱 좋은 힘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능력은 많은 아들 딸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데 바쳐져야 한다. 우리가 하는 봉사에는 이기심이 없어야 한다. 자아를 부정하지 않고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원수에게 더욱 큰 힘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로 훈련된 우리 청년들로 이루어진 일꾼의 군대가 준비된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셔서 머지 않아 다시 오실 구세주에 대한 기별이 얼마나 신속히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인가!
그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함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1.
참된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모든것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생애의 필요 조건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낌없는 헌신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봉사를 요구하신다. 그는 마음과 정신과 성품과 힘을 요구하신다. 자신의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랑이 행위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적 원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오직 이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을 견실하게 하고 또한 그 견실성을 보전하게 할 수 있다. 이 사랑만이 시련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또한 희생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희생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희생은 너무도 넓고, 깊고 높으므로 결코 측량할 수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저희의 구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저 없이 희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구주의 영예와 영광을 아무 것보다도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분할된 봉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은 날마다 자아 복종의 의미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참 뜻을 깨닫고 그 교훈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표준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와 함께 활동하시어 최후의 시험의 때에 능히 설 수 있는 품성을 완성시키신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날마다 사람과 천사들 앞에서 고귀한 경험을 갖게 되어 복음이 타락한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심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30년 동안 평범한 노동자의 생애로 지내셨으나, 그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업을 연구하고 당신의 감화가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모든 사람을 돕고 가르치셨다. 그의 공생애가 시작된 때에는 병든 자를 고치고 마음 상한 자를 위로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아가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의 마음에는 그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소망이 생긴다. 이 소망을 붇돋아 주고 바로 인도하라. 가정에서나 이웃에, 또 학교에, 가난하고 고생하고 무지하며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재난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귀한 봉사의 기회로 여길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그 일을 하는 중에 기량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평범한 의무와 도움이 필요한 자와 고생하는 사람을 봉사하는 일을 위한 훈련을 통하여 실력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때에는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라도 무익할 뿐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것이다. 사람이 수영을 배우는 것은 불에서가 아니요 물에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주로 개인적인 면접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단 한 사람에게까지라도 깊이 주의하셨다. 그리하여 그 한 사람은 수천 사람들에게 자기가 받은 지식을 전파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취하셔서 저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 때에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그들을 교육하신다. 끊임없는 헌신은 예수와 그 제자와의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확립시켜서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 그를 닮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락을 통하여 그는 더욱 명백하고 넓은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너희는 가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마 28:19.
복음 사명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대 선교 면허장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업을 진전시켜야 하였다.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생명력을 가진 그분의 이름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은혜와 능력의 근원되신 그리스도께 집중되어야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해야 하였고 그리하면 그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들의 표어요, 그들의 구별의 표요, 그들의 연합의 유대요, 그들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권위요, 그들의 성공의 근원이 되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글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당신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나아가, 믿는 사람을 모두 교회로 모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단순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그들 앞에 분명히 제시하셨다. 허식과 자랑을 적게 하면 할수록 선에 대한 그들의 감화는 클 것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단순함을 가지고 말해야 하였다.
우리 자녀가 어느 부문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을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정의 범위 내에서 저희 생애를 보낼지, 인생의 보통 직업에 종사할지, 복음의 교사로서 이교의 나라로 갈지 모르나 모두 꼭 같이 하나님을 위한 선교사, 세상에서 자비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무아의 봉사로 그리스도 편에 서는 데 도움이 될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말씀을 전파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그리스도의 교훈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질문하는 자들에게 “기록되었으되” “성경에 무엇이라 하였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고 단순한 말씀으로 대답하시고 호의를 가진 혹 반대자들이 흥미를 나타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셨으며 복음의 기별을 분명하고 힘있게 전파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조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에 한층 더 빛이 되었고 성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시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이와 같은 깊은 뜻을 깨달은 일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청년들이 열심 있는 자들이 되어 당신의 고상한 사업에 일할 수 있는 준비가 되고, 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청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부패하지 아니한 정신을 가지고 굳세고, 용감하고 그들 앞에 있는 싸움을 씩씩하게 싸우려고 결심한 청년들을 요구하신다.
청년들이여 전선으로 돌진하라. 그리하여 그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자임을 몸소 증거하라. 그리고 그가 남겨 두신 그 곳에서 일을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하라.
그대는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영혼들을 종종 만날 것이다. 이러한 영혼들을 낙심케 하여 시험하는 자로 하여금 유리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언제든지 시정해야 할 무엇을 보거나 듣거든 너무 충실하게 하려다가 가혹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은총을 구하라. 잘못이 지적 당하는 일은 언제나 굴욕스런 일이다. 쓸데없는 책망으로써 그를 더욱 괴롭게 하지 말라. 몰인정한 비평은 상대자로 하여금 낙망에 이르게 하며 밝은 빛이 없는 불행한 생애가 되게 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5.
진리의 빛이 결코 뚫고 들어가지 못한 넓은 지역들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어느 쪽을 바라보든지, 우리들은 거두어 들여지기 위하여 준비된 풍성한 수확물을 보게 된다. 그러나 거두어 들이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진리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대들 편에서의 어떤 노력도 없이 스스로 유지되고 지탱될 수 있는 성공인가?
각성이 있어야 하고, 영적 혁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열이 고조되어야 한다. 지상의 모든 민족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 주변에서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 동안 잠자도록 어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태만에 대하여 주님께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 사람을 위한 사업이 있다. 하늘에서 온 음성은 그대들을 순종하도록 엄숙히 부르고 있다. 이 음성에 유의하여, 어떤 장소에서나, 어떤 재능으로나 즉시 일하러 가라. 왜 그대들은 종일 여기에 게으르게 서 있는가? 그대들에게는 해야 할 사업, 그대들의 최선의 정력을 요구하는 사업이 있다. 귀중한 생애의 매 순간은 그대들이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이행해야 할 어떤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나태해 있다.
영혼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모든 흑암의 악마들이 이 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동안 영광중에 있는 모든 천사는 그것에 종하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마음속에 간직된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그분의 모든 부를 상속하는 후사로 삼으시고자 제안하심으로 영혼들의 위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실증하셨다.
네 자녀들에게 고하라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 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욜 1:3.
부모들 자신이 완전한 마음으로 주의 율법 안에서 행하기 전에는 저희 자녀들에게 저들을 따르라고 명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견지에서 개혁- 깊어지고 넓어질 개혁이 필요하다...... 저들은 참을성 있게 자녀들을 교육해야 하며 친절하고 끈기 있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는 방법을 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 가족의 자녀들은 불신의 궤휼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저들은 성경을 신앙의 기초로 받아들였고 밀려오는 회의론의 물결에도 휩쓸릴 수 없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
옛날의 족장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은 장막을 치는 곳마다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야 한다. 집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자신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겸손히 탄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질서 정연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종교의 실재를 위한 불신자의 논박할 수 없는 유력한 논증이다.
가정은 어린 아이의 최초의 학교이다. 여기에서 봉사의 생애를 위한 기초가 놓여져야 한다. 그 원칙들은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가르쳐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전 생애의 훈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매우 어릴 때부터 어린이는 도와 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참된 선교의 정신이 가정에 보급되면 될수록 그 정신은 자녀들의 생애에 더욱 충분히 계발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는 데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두려움 없이 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 지니라” 렘 1:7.
하나님께서는 각 가정에 계셔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각 사람의 슬픔과 실망을 맛보시며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친구를 접대하는 것을 주목하신다. 그는 그대의 필요를 돌보아 주시나니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는 항상 그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넘쳐 흐르고 있다.
그대가 만일 하나님을 그대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대는 그대가 그의 자녀인 것과, 그의 지혜로 지도를 받고, 모든 일에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사랑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생애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일 것이다.
비록 저희 자신은 완전히 무력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전 세계의 세력을 대항한 실례가 많이 있으니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일생을 보낸 에녹은 믿음을 굳게 잡고 부패하고 조소하는 세대에 대하여 의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노아와 그의 가족은 당시의 사람들, 가장 위대한 지력과 체력을 가지고 도덕적으로는 또한 가장 타락한 사람들을 대항하였고, 홍해에 이른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력하고 무서워하는 노예의 무리였으나 지상에서 최대의 국가의 최강한 군대를 대항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왕위의 약속을 받은 목동 다윗은 군주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의 세력을 굳게 잡고 놓지 않는 사울을 대항하였고, 불 속에 들어간 사드락과 그 동료들은 보좌에 앉은 느부갓네살에게, 사자들 사이에 던짐을 입은 다니엘은 그 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원수들에게, 십자가상의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까지도 저희 의사대로 강행하려는 유대인의 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처형된 죄인으로 쇠사슬에 매인 바울은 세계 제국의 폭군 네로에게 각각 대항하였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참된 왕족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실로 이 왕족의 일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가이사의 재판정에서 그의 감방으로 돌아온 바울은 그가 겨우 짧은 집행유예 기간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울은 그의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는 일을 성취하기까지는 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동안 진리가 승리하였다는 것도 알았다. 그에게 귀를 기울인 많은 군중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를 선포한 것은 그 자체가 승리였다. 그 날에 자라나고 강하여질 사업, 네로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헛되이 방해하거나 멸하고자 할 사업이 시작되었다.
바울은 오랜 봉사의 기간을 통하여 구세주께 대한 그의 충성심이 흔들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어디 있든지, 상을 찌푸리는 바리새인 앞에서나, 로마 관원들의 앞에서나, 루스트라에서 격노한 폭도들 앞에서나, 마게도냐 토옥에서 죄를 깨달은 죄인들 앞에서나, 파선된 배 위에서 공포에 싸인 선원들을 설복시키던 때나 네로 앞에 홀로 서서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호소할 때나 그는 결코 그가 옹호하고 있는 사업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그리스도인 생애의 한 큰 목적은 한 때 자기가 그분의 성호를 멸시하였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었으니 어떠한 반대나 핍박이라도 그를 이 목적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노력으로 굳세게 되고 희생으로 순결하게 된 그의 신앙은 그를 높이고 그를 힘있게 하였다.
참 하나님의 목사는 고난이나 책임을, 회피하지 아니할 것이다. 신실하게 하늘의 능력을 구하는 자들은 유혹을 대항하여 승리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완수하게 하는 힘을 다함이 없는 근원으로부터 얻는다. 그의 마음은 주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봉사를 행하고자 사모하는 소망으로 부풀게 된다.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심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 10:38.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봉사를 위하여 구속함을 받았다. 우리 주께서는 인생의 참된 목적은 봉사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일군이시었고, 그는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의 법칙-하나님과 저들의 동포에게 대한 봉사의 법칙- 을 주신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더욱 고상한 생애의 관념을 세상에게 보여 주셨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봉사의 법칙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동포들과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자기 소유”들-당신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들-을 맡기신다. 그는 “각각 사무를 맡기”신다. 각 사람은 하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서 각각 자기의 자리를 갖고 있다. 각 사람은 영혼 구원 사업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협력하여 일하여야 한다. 하늘 집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음이 확실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특별한 자리가 정하여 있다는 것도 또한 확실하다.
그분의 생애는 끊임없는 자아 희생의 생애였다. 그분에게는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당신을 영접해 주는 친구들의 친절한 영접 이외는 이 세상에서 거할 집이 없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장 가난한 자의 생애를 사시고 가장 궁핍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일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한 채로 당신께서 그토록 많은 일을 행하신 사람들 사이로 걸어 다니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봉사 기간 동안에 설교하는 것보다 병자를 치료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그분의 이적은 그분게서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당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약속됨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으실 때에 가지셨던 그 같은 동정하는 사랑을 당신의 종들에게 나눠 주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오라”고만 할 것이 아니다. 오라는 말을 들으나 저희의 귀가 너무나 어두워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저희의 눈은 너무 어두워서 저희를 위하여 준비하여 둔 복을 보지 못한다. 많은 사람은 저희가 크게 타락된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저희는 말하기를, 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못 되는 사람이니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오 한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단념하여서는 안 된다. 부드럽고 동정 깊은 사랑으로 낙망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붙잡아 주라. 그들에게 그대의 용기, 그대의 소망, 그대의 힘을 주어라. 친절로써 저들을 오라고 권하라.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것 같으면 그는 저희가 전하는 기별에 권능을 주실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의 위험에 대하여 잘 설명하여 줌으로 사람들은 복음을 받을 수밖에 없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바 본분을 행하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놀랄 만한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나간 세대에 있은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하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많은 불쌍하고 버림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구원 받은 자들은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힘쓰게 될 것이다. 별로 이렇다 할 기회도 없이 또한 더 좋은 방법을 알지도 못함으로 그릇된 길을 걸어 온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은 가장 악한 죄와 허물 가운데서 나와서 일찌기 기회와 특권을 가졌으나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한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과 함께 가심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인간 대리자들에게는 십자가의 승리를 하나 하나 차례로 확대시킬 사업이 위탁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사단과 그의 막강한 군대가 멸망시키려고 온갖 권세를 발휘하는 자들을 개심 시키려고 활동하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극기와 자아 희생의 모본을 따르고자 그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권위있게 부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체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물든 깃발아래 모이라는 부름을 받았다. 저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움을 밀고 나아가면서 원수를 대적하여 저들의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대열에 추가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직책이 위탁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이 전쟁에서 무엇이 되거나 혹은 어떤 것을 행하기를 자원해야 한다. 교회 교인들이 기별을 진보시키기 위하여 열심있는 노력을 발휘할 때 저들은 주의 즐거움 속에서 살게 될 것이며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승리는 언제나 단호한 노력의 뒤를 따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중재의 자격으로 그분의 종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허락하신다. 영혼 구원하는 일에 인간 대리자들을 구세주의 대표자들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가 이 사업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을 그의 영의 형성시키는 감화아래 두어야 한다. 이렇게 나누어 주신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그분의 동역자들로서 주님과 결속하여 협력할 수 있다. 주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는 모든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주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순종함으로 성화된 모든 사람들에게 힘과 은혜를 주시겠다는 영원한 서약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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