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나무와 풀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게 숲이다. 그런데 숲의 공생 원리를 지키지 않는 나무가 있다. 등나무는 홀로 서지 못한다. 큰 나무 줄기를 친친 감고 올라간다. 등나무에 감긴 나무는 목 졸리듯 서서히 말라죽는다. 냉정하지만, 등나무로서는 방법이 없다. 무언가 감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등나무는 낯선 나무가 아니다. 학교나 공원 쉼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 봄엔 보랏빛 등꽃을 피워올리고, 여름엔 초록 그늘을 만든다. 부산 금정산 자락엔 등나무 400여그루가 한데 모여 자란다. 보기 드문 등나무 군생지여서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됐다.
범어사 일주문 왼쪽 길로 들어간다. 등나무 군생지는 5.6ha. 개울을 끼고 숲이 나온다. 서어나무, 때죽나무, 참나무, 소나무, 뿌리 하얗게 드러낸 편백나무…. 등나무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 몸뚱아리를 휘감은 낯선 줄기가 보인다. 가는 것은 손목만하고, 굵은 것은 어른 허벅지만하다. 지름 140㎝, 길이 15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나긋나긋한 가지가 높이 20~30m 되는 소나무·참나무를 휘감았다. 참나무 가지의 끝은 바짝 말라 있다.
적당히 기댈 나무를 찾지 못하면 자기들끼리 몸을 꼰다. 두 그루가 배배 꼬여 올라가 소나무나 참나무에 가지를 걸친다. 그것도 안되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그네처럼 축 늘어져 있다. 바닥엔 마른 조릿대와 고사리가 자란다. 말라 죽은 나무와 산 나무, 뱀처럼 꼬여 있는 등나무가 한데 모여 숲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정글같다.
지금은 음습하고 기괴하지만, 봄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5월초 보랏빛 등꽃이 활짝 핀다. 손톱만한 꽃이 가득 달려 꿈같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범어사 등나무 군생지의 다른 이름은 ‘등운곡(藤雲谷)’. 등꽃이 구름처럼 모여있는 계곡이란 뜻이다. 매년 5월 부산 금정구청은 등나무꽃 축제를 연다.
서로 꼬여있는 모습 때문일까. 등나무가 부부 사이를 좋게 한다는 속설이 있다. 등나무 잎 삶은 물을 마시면 모든 불화가 사라진다고 한다. 등꽃을 말려 신혼부부 베개 속에 넣어두면 평생 금실이 좋다는 이야기도 있다.
등나무엔 그럴듯한 사랑의 전설이 전한다. 옛날 어느 동네에 서로 짝사랑하던 총각과 처녀가 살았다. 화랑이 돼 전쟁터에 나간 총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녀는 연못에 몸을 던졌다. 옛날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살아 돌아온 총각은 처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연못에 빠져 죽었다. 훗날 연못가에 팽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를 감싸 안은 등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고 한다.
팽나무는 등나무가 휘감아도 용케 잘 버텨낸다. 그러나 소나무는 영락없이 말라죽는다. 등나무 가지에 졸려 물과 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 게다가 등나무 잎이 하늘을 가려 광합성도 하기 힘들다. 범어사 주변 주민들은 “등나무는 지만 살라고 소나무같이 아까운 나무 친친 감고 올라가서 다 죽이뿐다”고 못마땅해 한다. 옛 선비들은 ‘기생’해야 살아남는 등나무를 ‘소인배’에 비유했다. 서로 주장이 팽팽하게 얽혀 해결하기 힘든 상황을 나타내는 ‘갈등(葛藤)’이란 단어도 등나무에서 나왔다. ‘갈(葛)’은 칡덩굴, ‘등(藤)’은 등나무를 뜻한다.
숲에선 천덕꾸러기로 찍혔지만 등나무는 쓸모가 많다. 줄기는 지팡이로 적합했다. ‘영조실록’에 신하들이 왕에게 등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가는 덩굴로는 바구니를 짰다. 스님들은 등나무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들어 썼다.
범어사 주변은 ‘암괴류’라 부르는 너덜지대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온 바위가 돌무더기를 이뤘다. 나무는 바위 틈을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렸다. 오래된 등나무의 수령은 100년 정도. 힘겹게 자라났지만 다른 나무를 죽인다고 여러번 쳐냈다. 숲도 인간 세상처럼 생존의 입장과 모습이 다양한 모양이다.
〈부산|글 최명애기자 glaukus@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4개의 일주문기둥, 4개의 숲-
◇금정산 범어사 볼거리
부산 금정산 범어사엔 숲이 4곳에 있다. 일주문에 닿기 전 도로 오른쪽으로 노송 숲이 나타나고, 일주문 옆 개울을 따라 등나무숲이 펼쳐진다. 경내엔 대숲이 있다. 기둥 4개의 독특한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불이문을 차례로 오르면 불이문 오른쪽에 작은 대나무숲이 나온다. 법당의 붉은 기둥과 푸른 대나무가 그럴듯하게 어우러진다.
네번째는 범어사에서 금강암 오르는 길의 바위 숲이다. 금정산 꼭대기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져 차례로 쌓인 것.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서어나무·참나무·소나무·팽나무·때죽나무 등이 자라지만, 바위 숲의 주인은 단연 바위다. 어른 두 명이 누워도 넉넉한 너럭바위가 지천에 널렸다. 바위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범어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히는 명찰. 678년 신라 고승 의상이 창건했다. 삼국시대의 유물인 삼층석탑과 조선 광해군 때 세운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관음전·지장전·나한전·영산전 등 당우가 30여동에 이른다. 임진왜란 승병장 서산대사, 경허, 용성, 동산스님 등 고승을 배출했다. 지장전 옆 영산각의 전망이 좋다. 단단한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첩첩 산의 능선이 부드럽다.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전의 꽃무늬 문살도 이채롭다.
부산 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을 이용한다. 부산역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린다. 지하철역에서 범어사 매표소까지 시내버스 90번이 다닌다. 운행간격 15분. 등나무 군생지는 일주문 옆 왼쪽 길로 들어간다. 범어사 (051)508-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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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 성곽따라 전통의 맛 익어가네-
◇금정산 산성마을
부산의 ‘산’은 금정산(801m)이다. 산중턱에 금정산성(사적 215호)을 두르고, 산자락엔 범어사·국청사·석불사 등을 품었다. 주말 아침 금정산 입구 지하철역엔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산행객이 모여든다. 성곽 따라 땀 흘리며 걸은 뒤 산성마을에 들러 흑염소 불고기나 산성 막걸리를 먹거나 마시고 내려온다.
금정산성은 국내에서 가장 긴 산성이다. 성곽 길이 17.3㎞. 동서남북 4개의 문과 4개의 망루가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다고 하지만, 현재 산성은 조선 숙종 때(1703년) 축조한 것. 벽돌처럼 네모 반듯한 돌 대신 제멋대로 생긴 크고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언뜻 보면 돌무더기 같다.
산성마을은 동문과 남문 주변에 펼쳐져 있다. 해발 400m의 산중 마을. 금정산 능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평지보다 기온이 2~3도 낮다. 삼국시대부터 스님이나 화전민이 들어와 살았다. 현재 430여가구 2,000여명이 산다. 행정구역으로는 금정구 금성동. 죽전·중리·공해의 3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마을 이름엔 산성의 역사가 묻어난다. 죽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중리 마을엔 예전에 중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공해는 ‘관아’란 뜻. 화약고·군기고·좌기청 등이 있던 자리다. 산성마을엔 ‘산성 흑염소 먹거리촌’이 형성돼 있다. 흑염소·오리고기·산성막걸리 등을 파는 음식점 120여곳이 성업중이다.
산성막걸리는 1980년 우리나라 민속주 1호로 지정됐다. 기원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산성마을에 살던 ‘국’씨와 ‘두’씨 두 가족이 누룩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금정산성 축조 때 막걸리를 빚어 군졸에게 먹이면서 막걸리 맛이 전국에 알려졌다. 일제 식민지 시대엔 산성마을의 막걸리 양에 따라 부산 동래와 양산의 쌀값이 오르내렸다고 한다. 짧게 잡아도 역사가 250년이 넘는 셈이다.
산성마을엔 막걸리 제조회사가 있다. 지금도 전통 방법대로 만든다. 지하 180m에서 끌어올린 물과 껍질이 두꺼운 재래종 밀을 사용한다. 쌀로 고두밥을 짓고 누룩과 버무려 발효시킨다. 맛이 구수하고 담백하다.
40여년 역사의 흑염소 불고기도 유명하다. 60년대 초반 산성마을에 초지가 생기면서 흑염소를 방목하기 시작했다. 생강·고추장·참기름·들깨 등 20여가지 양념에 재운 뒤 구워서 낸다. 육질이 쫄깃하다. 어린이·임산부·노약자의 기운을 북돋우는 보양식으로 많이 먹는다. 산성마을 120여개 음식점 대부분이 흑염소를 취급한다. 불고기뿐 아니라 전골, 탕으로도 먹는다. 불고기는 1인분에 2만5천원 정도다.
산성마을까지 버스가 다닌다. 부산지하철 1호선 온천장역에서 내려 산성마을행 203번 버스를 탄다. 동래식물원·동문·남문·공해·중리 거쳐 죽전마을이 종점이다. 음식점에서 봉고차로 손님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자가용은 경부고속도로 구서IC를 이용한다. 부산대 지하철역을 거쳐 온천장 지하철역에서 우회전. 식물원이 나오면 다시 우회전해 산성길로 접어든다. 금정산은 동래구·북구·금정구에 산자락을 뻗치고 있어 등산코스가 다양하다. 범어사에서 출발해 북문~동문~산성마을을 거쳐 내려오는 6.5㎞가 하루 나들이 코스로 적합하다. 산성마을 홈페이지(www.kumjungsansung.com)에 음식점과 약도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최명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