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골로새서 1:24-29
골로새는 오늘의 튀르키예 서쪽 에베소 근처에 있던 도시입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가 골로새서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이기에, 그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의 성격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바울서신과는 다르게 현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세를 포기하고 내세를 바라보지 않고, 고난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말고 견디어 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 1장에서 바울은 3차례 소망을 말하는데, 첫 번째는 믿음과 사랑의 근거인 소망이고(골1:5), 두 번째는 우리가 붙잡고 지켜야할 복음의 소망입니다(골1:23),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골1:27)입니다.
소망이라는 말은 보통 사용하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절망의 반대말입니다. 역경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예견하며 현실을 버티어내도록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에게 희망이란 “희망고문”처럼 들려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희망이라는 말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독일 튀빙엔 대학의 신학교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박사가 1964년에 <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중세 신학자 안셀름(Anselm)이 남긴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이라는 말에 대응해서 “나는 알기 위하여 희망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몰트만은 믿음과 희망을 동격으로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만일 절망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절대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때로 쓸데없는 희망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더라도 말입니다.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Jane Goodall, 1934-) 박사는 올해 90세인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관찰하고 연구한 침팬지 사회분석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통찰력을 전 세계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침팬지 무리는 매우 자주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싸움만 할 것 같은 침팬지 무리 안에 화해를 이끌어내는 침팬지들이 있답니다. 두 수컷이 물고 뜯고 싸워서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한 암컷이 두 마리를 따로따로 털을 골라주고 가까이 오게 한 다음에 자기는 슬쩍 빠져버리니, 두 수컷이 매우 어색하지만 서로 털을 골라주었다는 그녀의 보고는 참 놀라웠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환경문제, 자연재해, 전쟁, 식량, 에너지 문제 등등으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류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쌍한 것을 보면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 이것이 인류에게 남아있다면, 그것이 희망입니다. 구달 박사는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신앙의 눈으로 이것을 깨달았다고 1999년에 저술한 <희망의 이유, Reason for Hope>라는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현대인들은 역경을 당하면 “고난의 이유”를 찾는데 집중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때로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누구나 한 번쯤은 또 그 이상이라도 겪게 되는 고통과 고난에게 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1:24)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영광스런 비밀입니다. 원래 비밀이란 알려주어도 모르는 게 비밀입니다.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하는 것이 바로 이 비밀이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다 겪는 고난이 나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밀”(mystery)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광의 소망, 즉,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통도 해를 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희망을 굳게 붙들고 사는 동안에는 그렇습니다.
2024년 7월 28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