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영택 화백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세웠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들이 앉아 있는 곳은 입교당으로
제자들이 수업을 받던 교실이며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라는 뜻이다
중앙은 강학당 동쪽으로는 원장이 기거했던 명성제
서쪽으로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제로 세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병산서원의 중심역활을 하는곳이다
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의 대표적인 건물로 서원건축의 백미라고 불린다
만대루의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만 하니(翠屛宜晩對)에서 따온말이다
행사때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의 역활을 항 곳으로
병산과 낙동강이 한눈에 조망되는 조형미가 특징이다
7칸의 단순하지만 집합적 질서의 묘미가 집약되어 있는 만대루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면 외부의 자연경관을
수평으로 나누는 모습이 과히 절묘한 풍경이다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는 시각적 구성은
외부에서는 폐쇠적이고 내부에서는 개방적인
서원건축의 절묘한 특징을 갖고 있다
안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우주를 품을수 있다면
더이상의 가르침이 필요하겠는가
건물은 400살이 넘은 할아버지인데 지붕은 10살짜리 어린이인 꼴이라며
단가마에서 구운 재래식 기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립다는 김영택 화백님의 말씀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배흘림 기둥의 아름다운 선을 이야기 하는 해설자를 바라보며
그들은 더욱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슴을 연다
그랭이 기법으로 세워서 못하나 사용하지 않고서도 500년을 넘게 거뜬히 지낼수있는
목조건물의 보존성을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젠 우리의 숙제가 되어 있지 않은가
입교당 마루에 걸터 앉은 그들은 이제
저마다 한편의 시를 읊는다
간데 없는 인걸이지만 남아 있는 문화재들이 보여주는
그분들의 참 모습들이 감동을 줄수 있음에
우리들 속속들이 배여 있는 뿌리의 깊음을 안다고...
저 병산을 이어 달리는 낙동강의 흐름처럼
더디게 우리들도 흐르고 있음을 ...
하지만 우리들은 후세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수 있을까
존덕사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제향영역으로
서애 류성용선생과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제수를 마련할때 사용하는 전사청과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저 배룡나무가 꽃이 필때면 장관을 이룰것 같다
껍질이 없는 나무 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 하여 선비의 묘소나 서원에 많이 심는다 한다
섬섬이 살아 있는결을 보라
닫혀 있음으로 많은것들을 보게 해 주는 선조들의 지혜가
우리를 있게 했고
우리를 지켜갈 것이다
자연안에 들어가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던 그 뜻을
우리는 꼭 따라야만 할것이다
병산을 따라 낙동강변을 나섰다
우거진 갈대숲이 푸근하게 낙동강을 안아주고
병산은 가파르게 절벽을 내어 주는데
포장이 안된 흙길의 부드러움에 마음마저 풀어져 내린다
이렇게 지켜야 할것들은 온전하게 지켜내야만 하는 의미를
훗날 저 아이들은 알게 될것이다
늘 흘러 왔어도
그자리엔 강이 되어 있듯이
우리도 흘러 가면서 그자리에 우리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회마을
이곳엔 풍산 류씨가 6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 마을 주민의 70%가 풍산 류씨이다.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살고 있었는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으며,
강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는 허정승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1642년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마을 중앙에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측되는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다.
풍산류씨 입향 시조인 전서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재앙을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풍수지리상 마을의 혈에 해당하는 곳으로 하당으로 불리며,
정월과 대보름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서낭신에게 보내는 멧세지가 요란하다
이 여인들의 가슴속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하회별신굿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긋탈놀이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서낭신에게 별신굿을 해 왔는데,
굿과 아울러 서낭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행하여 지던 탈놀이였다.
우리 나라의 탈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향해 온갖 쓴 소리를 내 뱉는다.
이는 서민의 유일한 언로였다.
1928년 이후로 단절되다가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화회탈과 함께 발굴하여 재생을 하였고,
서울대학교 이두현 교수에 의해 대사관을 통해 홍보되었다.
놀이마당은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여덟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나 한마리 잡아 먹어 보자 하고 시작하는 백정당과
굽은 허리로 유연하데 춤을 추는 할미마당과
여인을 보고 참을수 없어 파계를 하는 승려의 본능을 이야기 하는 파계승마당
양반들의 체통을 비웃어 대는 양반과선비마당
간결하면서 깊이와 내용이 들어 있는 춤사위를
어떤 춤에 비교를 하겠는가
그들이 이제 주인공이 된다
그 동작들마저 멋진 춤사위가 된다
뿌리가 깊어서 저절로 나오는 동작들...
천한 부분을 표현을 하면서도 천박스럽지 않고
양반의 위용을 무너뜨리면서도 양반에 대항하지 않는 표현들 속에는
구분된 질서가 숨어 있듯이
그들에게도 선이 분명한 질서가 있었다
그래서 아들과 딸과 동행을 해도
부끄럽지않은 문화가 정착이 되어 가고 있는 길나들이가 아닌가
조금은 불편하지만 서로가 양보만 한다면
우린 충분히 멋진 모습으로 거듭나리라
봉정사는 천등산안에 폭 안겨 있는듯한 느낌이 여느 사찰과의 다른점이다
쉽사리 들어내 놓지 않는 모습으로
웅장함 보다는 외소하지만 내용이 깊음을 본다
결코 인위적인 파괴보다는 자연 안에서 자연으로 순응하는 모습이 아니던가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일주문을 지나서 봉정암 앞에서 파수군처럼 서 있는 노송의 모습을 보라
세속의 모든 번뇌를 한몸으로 막으며 그 겪었던 번뇌의 속앓이 만큼 뒤틀려
보기에도 안스러운 모습이다
이렇게 누락 밑을 지나 가야만
자신을 보여주는 봉정사
속세의 때를 벗어 던지고
낮은 자세로 부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인것 같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기둥은 배흘림형태이며 주심포양식이다
경계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선이다
선을 물리적으로 본다면 그냥 별것 아니지만
이렇게 상징적 의미가 될때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어떤 비평가에 의하면 이건물이 오래되었다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을뿐
건축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어찌 웅장하고 화려함만이 훌륭하다고 평을 하겠는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것 만으로도
우리에겐 훌륭한 작품이 아닐수 있겠는가
봉정사대웅전은 보물 제55호이며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주칸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변경 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多包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의 힘있고 가식없는 수법은 초기의 다포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단청은 창건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안동의 문화재를 보면서
깊고도 자존심강한 선조들의 지역적 특성을 느낀다
결코 굴복하지 않았지만
거스르지도 않았던 성품들이 지혜롭게 그 시대를 이끌어 갈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렇게 우리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켜나갈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것 같다
우리 모두의 관계의 선도 그러 하리라
얕은 마음의 움직임대로만 간다면 무엇을 지킬수가 있겠는가
원칙의 선을 그어놓고
서로를 다스려 줄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소망 하나 가슴깊이 넣으며
두손을 모아 본다
늘 같이 하시는 나들이님들께 감사드리며
사진을 제공해 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봅니다
김명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