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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경영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2세 경영인들. 왼쪽부터 김석환 아이스타일24 이사, 이해영 대림 B&Co. 부사장, 이승연 경농 상무, 박선정 GLM 상무 | |
"창업자 아들 혹은 기업 대주주라는 신분은 실제로 기업을 이끄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조직원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영자는 기업을 이끌 수 없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비웃음 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해영(38) 대림 B&Co. 부사장은 대림그룹 창업자인 이재준 회장의 손자다.
대림에 들어온 후 그는 조직원의 신뢰를 쌓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직원 의견에 귀 기울이며 전문경영자들과 함께 경영 방침을 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피가 마르곤 하죠. 나타날 모든 결과물이 제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김석환(35) 아이스타일24 이사도 같은 의견이다. 김석환 이사는 한세실업 김동녕 회장의 장남으로 미국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정보기술(IT)업체에서 일하다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지금 한세실업의 자회사인 아이스타일24라는 인터넷 쇼핑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아무리 2세라 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이상 존경은커녕 인정받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2세 경영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2세 경영인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실적을 올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요.”
대선제분 창업자 박세정 회장의 손자인 박선정(39) GLM 상무는 “요즘 대기업만 봐도 장남이 아니라 남녀 불문하고 가장 유능한 자녀에게 기업을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외아들이라 해도 마음 놓고 지내기 어렵다. 아니다 싶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서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자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 다음 살아남는 새끼만 키운다 하지 않느냐”며 경영 승계가 아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영 승계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대담 참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2세 경영자는 경농 이병만 회장의 둘째 딸 이승연(28) 상무였다. 이 모임의 홍일점이기도 한 이 상무는 “쉬는 시간이나 주말에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한순간이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책임감에서 오는 부담 같다고 설명했다. 경영에 참여한 지 6개월이 지난 이 상무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재무와 회계학을 전공한 다음 금융 회사를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경농은 한국의 대표적인 농약 제조 기업이다. 그는 조직에서 자기 사람을 만드는 것이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경험은 적지만 회사와 구성원을 위한 꿈이 있습니다. 물론 조직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솔선수범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항상 생각해요.”
이들과의 대담은 밤 9시가 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밤늦게 모인 이유는 오후 3시에 시작한 한국능률협회 주관 2세 경영자 수업이 이 시간에야 끝나서다. 이해영 부사장은 경영에 대한 갈증이 있기에 매주 모여 어떻게 기업을 이끌어가야 하나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부사장은 “다른 기업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할 때는 나만 잘하면 됐지만 경영자의 위치에 오르니 모든 구성원이 잘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며 “그러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에 대한 갈증이라는 말이 나오자 2세 경영자들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사라지고 대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김석환 이사는 “우리는 매주 월요일 오후를 통째로 비워놓고 경영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바쁜 와중에 왜 이곳에 오겠습니까? 그만큼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직장 생활까지 했다. 김 이사가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것과 국내의 경영 환경엔 큰 차이가 있다. 그가 적극적으로 경영자 모임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승연 상무도 김 이사와 비슷한 생각이다. 10년 넘게 미국에서 지내며 학업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다 지난해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 경영 환경에 대한 적응은 물론 인맥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수업 강도가 생각보다 약하다며 보다 많은 숙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여성 경영자라서 그런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 기업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상무는 얼마 전 경영자 모임에서 만난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강점을 알고 세계 무대에 진출한 것과 윤리 경영으로 사회 구조를 더 건강하게 바꾸려는 의지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죠.”
박선정 상무가 느꼈던 갈증은 자신에 대한 검증이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어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동료 경영인, 강사와 대화를 하며 생각을 공유합니다. 또 그들의 모습에 내 자신을 비춰보며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돌아봅니다.” 그는 조금 더 나아가 주위에서 경영 2세를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주변에선 부모 잘 만나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CEO는 유리 방 안에 앉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직원들은 이를 알고 반응하죠. 사생활은 적고 책임감은 막중한 삶입니다. 이를 이겨 내기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지요. 경영 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잠시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이어졌다.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F4의 모습에 대해 ‘부럽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저러면 회사 망한다’, ‘부모님에게 순식간에 쫓겨날 것 같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김석환 이사는 경영에 참여하면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데 F4처럼 편하게 인생을 즐길 수 있겠느냐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신규 사업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대기업은 주요 분야를 처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지만 중견기업은 경영자가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신규 사업은 업무를 빠르게 파악하며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직원에게 맡기기에 모호하죠. 제가 발로 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직접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부동산 관련 기업 인수·합병(M&A) 정보, 물류 처리 방식을 파악하고 있다. 박선정 상무는 자신이 아는 2세 경영자 대부분이 일에 묻혀· 산다고 말한다. “여유를 누리기보다는 일에 치여 사는 워커홀릭이 대부분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2세가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면 조직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과 없이 인정은 없답니다.”
이해영 부사장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들며 2세의 삶을 전했다.“솔직히 이곳에 모인 분들 경제적으로는 누구 부러울 것 없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데 경제적 풍요는 한계가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직원들과 함께 노력해서 이를 성취하는 일, 이로 인해 기업 구성원의 삶이 풍요로워지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을 때 기업인은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자다움을 배워야 한다
그는 한때 경영 후계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에 빠진 일도 있다고 한다. 미국 MBA에 다니던 시절 가족 기업이 이끄는 기업과 전문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을 분석하는 논문을 작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인덱스에 있는 기업 500곳의 경영구조 분석을 시작했다.
그중 지속적으로 성장을 계속하는 기업 대부분이 가족기업인 것을 알게 됐다.“전문경영인은 기업의 미래보다는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않고 기업을 이끌다 보니 장수 기업이 적은 것이지요.”논문을 정리하며 이 부사장은 5대째 가족경영을 하며 스웨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 같은 기업을 한국에서도 이끌겠다는 목표가 생겼단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가 짧다 보니 3대 넘게 이어진 기업이 손에 꼽힐 정도죠. 한국에서도 5대 넘게 이어지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김석환 이사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같은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잡스는 조직원은 물론 산업 자체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온 경영인이다.
김 이사는 아이스타일 24의 슬로건을 애플의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에서 따와 지었다. “다르게 보자(Look Different)!가 저희 회사 슬로건입니다. 다르게 봐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요. 이제는 다르게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박선정 상무는 자신이 닮고 싶어 하는 CEO 이야기를 하며 얼마 전 출간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라는 책 이야기를 꺼냈다.
책의 요지는 장남다움을 배워야 한다는 것. 장남은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동시에 가족에게 골고루 나눠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저자는 이를 장남다움이라 표현했다.“저는 경영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경영자다움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마음으로 가상 CEO의 모습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CEO로 계시는 분들의 좋은 모습을 볼 때마다 경영자답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 CEO의 모습을 업데이트하고 있지요.”
아직 20대이다 보니 이승연 상무는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농업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한국 농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농약을 제조하는 원천기술은 모두 글로벌 화학 회사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이 분야 연구를 계속해 한국 농촌에 적합한 제품을 개발했으면 해요. 더 저렴하고 친환경적인 제품을 만들어 농민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배출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