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nca/쁘라빤짜)>
여기서 ‘희(戱)’는 진실이 모자란다는 뜻이다.
따라서 희론이란 허망한 언어, 무의미한 말, 헛소리,
부질없는 말에 가까운 쓸데없는 말장난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희론(戱論)은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며, 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집착과 차별에서 비롯돼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오염된 마음작용이 희론이다.
주객전도된 전도몽상 번뇌 망상이 희론이다.
사실(본래성품) 그대로 자각 인식하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사유하고 고집하는 것이 희론이다.
희론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아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상적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
세상사람 가운데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정론(正論)보다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결론이 나지 않는 끝없는 쟁론만을 생산해내는 희론(戱論)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마음만 산란해진다.
이러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희론(戱論)은 ‘나는 존재한다는 자아의식(asmīti papañcitaṁ)’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상적인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나타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싸움, 논쟁, 언쟁, 교만, 중상, 질투, 인색을 수반한다.
‘희론’은 산스크리트어 ‘쁘라빤짜(prapanca)’의 한역인데,
어근 ‘pra-pa 또는 pra-pac’ -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원래는 현상, 확장, 다양화, 상세한 설명, 발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강박관념으로 이끄는 정당화 되지 않고
이탈된 사유의 개념적 확장(槪念的 擴張)이다.
희론은 사유의 개념적 확장 등의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이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됐으며,
한역에서는 희론을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인다.
이는 희론이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
경전(經典)에 어떤 색다른 구절을 기억해 가지고
어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느니 해서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희론이다.
그래서 희론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희론(戱論)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용수는 희론을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것이라 했다.
허구적인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희론에는 어디까지나 전도된 인식이 전제된다.
예컨대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할 때 마치 그 말에 따라
어떤 영속적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경전 상에서는 자아의식과 깊이 연관돼있는 사유의
희론적 성격을 간파하고 희론의 소멸은 곧 자아의식의 소멸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나는 있다’라는 망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야 한다.
무엇이든 갈애가 내 안에 있다면, 항상 마음을 집중해
그것들을 몰아내도록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서두름의 경(Tuvaṭaka sutta, Sn4:14]
<중론송(中論頌)>의 다음 게송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의의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고 했다.
이 말을 중국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멋지게 한역했다.
참된 궁극적 실재에서는 희론이 절멸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용수는 공성(空性)은 연기와 같은 말인데,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써는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고,
연기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았다.
그리하여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은 바로 이런 망상(희론)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망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무기(無記)를 행하실 때는
대개 외도나 제자들의 질문이 희론일 때이다.
즉 질문이 ‘설명되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답이 없는, 결정하지 못하는’ 등의 것일 때 기답을 하시지 않았다.
그것을 무기라 했다.
부처님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에는 네 가지 형식이 있었다.
① 직접적인 답변
② 질문의 분석을 통한 답변
③ 반대 질문을 통한 답변
④ 질문에 의도적으로 답하지 않거나 보류하는 것.
여기서 무기란 네 번째를 말한다.
부처님은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우주의 공간이 유한한 것인지, 아니면 무한한 것인지,
또는 여래는 사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이와 같은 외도(外道)들 질문에 대해서
희론(戱論)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해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칸트(Kant)도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했다.
가령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증명 등을 비판했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칸트의 사상을 2천 5백년 전 부처님은 꿰뚫고 계셨다. .
하루는 만동자(蔓童子, 말룽꺄뿟타, 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하는가? <중아함 권 60. 전유경(箭喩經) >”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부처님 교설에는 그러한 해명이 없으므로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답변하기를 거부하셨다.
무기를 행하셨다. 그리고 그 대신 ‘화살 맞은 환자’의 이야기를 하셨다.
부파불교 당시 무성했던 아비담마(abhidhamma)에는 희론이 너무 많았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등장한 대승불교였기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심도 있게 희론을 다룬 듯하다.
허긴 침체한 우리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남방불교의 아비담마 중에도 이해하지 못할 허황된 희론이 많이 보인다.
죽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현상들을 마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듯이
논설하는 터무니없는 희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몰심(死沒心), 그리고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니
존재지속식(存在持續識)이니 결생심(結生心)이니 하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 등은 언뜻 보기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깊이 사유해보면 완전히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소리다.
때문에 오늘날 남방 상좌부불교 이론에 열광하는 범부들을 위해
마구 퍼다 옮기는 식의 행태는 곤란하다.
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는 기제에 맞서려는 듯한
아비담마가 오히려 희론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냉정히 검토해봐야 한다.
숭고한 부처님 법을 다룸에는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얼마간의 알음알이로 신중하지 못하고 종횡무진 하는
일부 남방 아비담마 전공자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