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林樸)의 자(字)는 원질(元質)이고, 안동부(安東府)의 길안현(吉安縣)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개성참군(開城叅軍)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을 함락하자 원수(元帥) 김득배(金得培)가 임박이 병법(兵法)에 정통하다 하여 막하(幕下)에 두고 그와 더불어 작전을 짰다.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춘추사적(春秋史籍)과 전교제향(典校祭享)의 의궤(儀軌)를 땅에 파묻어 감췄다. 적이 평정되어 다시 발굴하였는데, 군졸(軍卒)들이 함부로 버리고 수습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임박이 유구(柳玽)·이구(李玖)와 함께 나라의 전적(典籍)을 인멸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피고 검사하여 거두어 모은 것이 열에 둘뿐이었다.
〈임박(林樸)은 공민왕〉 12년(1363)에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에 갔다. 그 때 덕흥군(德興君)이 황제에게 고려(高麗) 왕이 홍건적(紅巾賊)에게 훙서(薨逝)하였다고 무고하자 황제가 덕흥군을 왕으로 삼았다. 임박이 이공수와 함께 아뢰기를, “우리 임금이 홍건적을 격파하였으며 지금도 건강하십니다.”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임박 등으로 하여금 덕흥군을 모시고 본국으로 가게 하였더니 임박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臣) 등이 만일 승려 출신의 왕[僧王]을 따른다면 부인이 지아비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뜻에 맡기겠다.”라고 하였다. 덕흥군이 임박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일 나를 따르지 않으면 죽어서도 아무런 이득이 없으리라.”라고 하면서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하여 꾀었으나 임박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맹세코 따르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덕흥군이 장차 고려로 귀국하면서[東行] 임박에게 시(詩)를 청하였더니, 임박이 병풍(屛風)에 쓰기를, “근본(根本)을 버리고 끊임없이 사소한 일을 좇으니, 태산(泰山)이 도리어 한 가닥 털끝처럼 가볍도다. 채찍을 던지고 곧바로 강을 건너가려고 하나, 떡을 좋아하다 헛되이 땅에다 그림이나 그리는구나. 술항아리 얻어 춤을 출 때는 누가 깨질 줄 알리오, 피리소리 요란한 곳에서 부질없이 영화(榮華)를 구함이로다. 그림을 그려 사람의 눈을 미혹하지 말지니, 나는 자연의 옛 돌병풍[石屛]을 사랑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학사(學士) 위소(危素)가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도 또한 충절(忠節)을 지키는 선비가 있구나!”라고 하였다. 임박이 돌아오자 왕이 이르기를, “덕흥군이 영화로운 벼슬[華秩]로 유인했는데도 그대가 따르지 않았으니 나 또한 영화로운 벼슬로 포상하고자 한다.”라고 하면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하였다.
임박(林樸)이 「정심론상(正心論相)」 20조(條)를 상소하니 왕이 그를 더욱 총애하였고, 또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임명하였다. 왕이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을 진술하라고 명령하여 다시 10여 가지의 일을 올렸더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이고[嘉納] 곧이어 영(令)으로 승진시켰다. 하남왕(河南王)의 사신 곽영석(郭永錫)이 오자 임박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다. 곽영석이 말하기를, “일찍이 고려의 산수(山水)가 빼어나고 아직도 기자(箕子)의 풍속이 남아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원컨대 지도(地圖)·예악(禮樂)·관제(官制)를 보기를 원하오.”라고 하자 임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산수의 기이함을 알고자 하면 바로 상국(上國)의 황후(皇后)와 태자(太子)가 계시는데 어찌 산천의 수려한 기운을 타고 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곽영석이 무릎을 치며 높은 소리로 읊조리기를, “드디어 천하의 부모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 낳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는 것을 중하게 여기게 하네.”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공민왕〉 16년(1367)에 제주선무사(濟州宣撫使)가 되었는데, 임박이 제주(濟州)에 이르러 만호(萬戶)에게 이르기를, “달달목자(達達牧子)는 배반하기를 좋아하니, 그대는 마땅히 진심으로 어루만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신인(神人)의 후예인데, 신라(新羅)에 들어와 성주가 되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 왕자가 되었소. 역대 임금들을 섬겨 복종하였고, 역대 임금들 또한 그대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각각 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섬길 것이며 목자(牧子)와 더불어 변란을 부채질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성주·왕자·군민(軍民)들이 모두 엎드려 말하기를,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선무사(宣撫使)로 왔던 자들이 거의 모두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침탈하니[侵漁]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으므로 목호(牧胡)가 그들을 유인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임박이 도중에 나주(羅州)에 이르러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워 돌아갔으나, 비록 차 한 잔이라도 먹지 않았으니 민(民)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로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오셨도다. 조정의 관리들이[王官] 모두 임선무(林宣撫)와 같으면 우리들이 어찌 반란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 가운데 혹 물을 길어 온 것을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전임(轉任)되자 글을 올려 비로소 오경재(五經齋)와 사서재(四書齋)를 구분하였고, 과거(科擧)는 일체 중국의 수검통고법(搜檢通考法)에 의거하였으며, 〈이후〉 대사성(大司成)·판전교사(判典校事)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성석린(成石璘)이 차자방(箚子房)의 지인(知印)에 임명되었는데,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지 않아 신돈이 왕께 참소하여 임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임박의 성품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며 거리낌 없이 말하고 또한 이름 내세우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다만 나라를 위하는 것만 알지 아직 청탁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으나 매일 밤 낡은 옷을 입고 걸어서 신돈의 집에 출입하면서 신돈을 위하여 계책을 세웠는데 종적이 은밀하였다. 신돈이 일찍이 평양(平壤)에 가자 임박이 칼을 차고 따라가면서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매번 신돈이 큰 덕을 지녔다고 칭찬하므로 신돈이 그를 좋아하였다. 지인이 되자 손수 관원의 명부[班簿]를 들고 다니면서 등급을 매겼는데, 친구로 지내는 사람은 일찍이 천거한 적이 없었지만, 환관(宦官)과 궁첩(宮妾)들은 하고자 하는 바를 얻었다. 왕의 뜻을 잘 맞추었으며, 또 신돈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헤아려 오직 영합하기에만 힘썼다. 이에 임금의 총애가 날로 친밀해져 권세가 대언(代言)보다 위에 있었는데,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 등이 그의 전횡을 매우 미워하였다.
임박이 일찍이 신돈에게 말하기를, “공(公)이 국정을 총괄하는데 마땅히 전민쟁송(田民爭訟)의 억울한 것을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신돈이 마침내 왕께 아뢰어 추정도감(推整都監)을 세우니, 〈왕이〉 신돈을 제조(提調)로 삼고 임박으로 사(使)를 삼을 것을 명하였다. 임박이 공평하게 결정한 것도 많았으나, 신돈이 한쪽 말만 들은 것은 분별하지 못하였으므로 억울한 것이 자못 많았다.
〈공민왕〉 23년(1374)에 대언에 임명되었는데, 왕이 돌아가신 다음날에 임박이 빈소(殯所) 곁에 있으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빈전도감판관(殯殿都監判官) 유원정(柳爰廷)은 성품이 강직하여 거리낌 없이 말하였으므로 일찍이 왕을 모시고 강독(講讀)할 때 큰 신임을 받았다. 이날 임박이 웃는 것을 보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그대를 일컬어 사직(社稷)을 지킬 신하라고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애통함을 망각하고 웃으시니 이것은 충신(忠臣)이 아니오이다.”라고 하였더니, 임박이 정권을 장악하자 미워하여 기용(起用)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박이 현릉(玄陵, 공민왕)의 상(喪)을 당해서는 상복을 3년이나 입었다.
우왕(禑王) 초에 이인임(李仁任)이 제안하여 백관(百官)들과 함께 문서를 만들어 장차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고 하였다. 임박(林樸)이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서명하지 않았으나, 대사헌(大司憲) 이보림(李寶林)은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려고 임박을 탄핵하여 폐출시키고 서인(庶人)으로 삼아 길안현(吉安縣)으로 유배시켰다. 처음에 예안(禮安) 사람들이 지윤(池奫)에게 아부하여 우왕(禑王)의 탯줄을 그 현(縣)에 안장시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또 안동(安東)과 더불어 땅을 놓고 다퉜는데, 임박이 길안현에 있으면서 그 땅을 살피고 길지(吉地)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이 조정(朝廷)에 고발하기를, “예안이 탯줄을 안장하기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 임박의 말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지윤이 이로 말미암아 임박을 미워하게 되었다. 지윤의 당여(黨與)인 집의(執義) 김승득(金承得)과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이 지윤에게 이르기를, “임박이 〈북원의〉 중서성에 올리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필시 심왕(瀋王)을 옹립하려는 뜻에서였으니, 이것은 죄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김승득이 마침내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상서하기를, “임박은 본래 평민이었는데 일찍이 역적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여 그의 심복이 되어 교활한 짓을 많이 하였고, 신돈이 처형당하자 또 김흥경(金興慶)에게 아부하였습니다. 전하(殿下)의 즉위 초에는 박상충 무리들과 함께 당여(黨與)를 결성하여 도당(都堂)을 멸시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거역하였습니다. 이치에 어긋나는 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상서하게 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적다고할 수 없습니다. 원조(元朝)에서 반역자 김의(金義)의 말을 듣고 심왕을 옹립할 것을 의논하자, 이에 본국 조정의 기로(耆老)와 백관(百官)들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문서를 〈북원의〉 중서성에 올리려고 했지만 임박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홀로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를 베어 형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윤승이 궁중(宮中)으로부터 그 글이 내려오자 체복(體覆) 손경생(孫慶生)을 보내어 〈임박을〉 쇠사슬로 묶어서 전법사(典法司)로 송치하였다. 100대의 매를 쳐서 무안(務安)으로 유배시켰는데, 도중에 밟아서 죽였다. 아들은 임가(林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