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老年期) 심각한 질병(疾病)과 마지막 생명(生命)의 선택(選擇)]
“사람이 온 천하(天下)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有益)하리요?” 많은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을 ‘선택받은 삶’으로 생각한다.
100살 정도 살았으면 매우 장하고 여전히 살아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인간자신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죽음은 필연이기도 하다.
물론,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 놓여 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행복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꿈꾼다.
미국 영화 “바이센티니얼 맨”(Bicentennial Man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 1999)에서는 로봇이 인간으로 진화하지만 결국 늙고 연로한 몸이 되고 만다.
침 흘리고 눈물 흘리며 늙어서 주름살 생기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기에 얻을 수 있는 축복이라고 위로한다. 아니 삶과 죽음은 한 묶음으로 묘사된다.
분명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손실의 시간이고 세포의 분열이다. 노인의 질병은 노화과정에
따른 신체적 변화에서 오는 질병으로 매우 복잡한 징후를 나타낸다.
자리에 가끔 누워 지내게 되면서 식욕감소, 일상생활의 장애, 인지 및 기억력 쇠퇴 등 미묘한 변화가 자주, 연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초기 질병 증상은 다양한 통증, 자기상실감, 요실금, 무력증, 신경성 식욕부진 증(anorexia), 호흡곤란, 피로감 등이 겹쳐 발생한다.
게다가 노년기의 숨겨진 질병으로 우울증, 요실금, 근골격계 질환, 골다공증, 청력 약화, 치매, 치아손실, 영양부족, 성기능 장애 등이 따라온다.
1. 노화(老化)와 질병(疾病)
이렇게 인간이 건강 장수를 꿈꾸지만 다양한 통증과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돼 있다. 예를 들어 노년기에는 알츠하이머병, 파킨스병, 관절염(고관절염, 류마티스), 각종 암, 심부전,
치매, 당뇨병, 독감, 불안장애(GAD), 심장병(심장마비), 고혈압, 관상동맥질환, 청력상실, 고콜레스테롤, 고관절 골절, 경부골절, 골다공증, 폐질환(폐렴), 척추협착증,
안과질환(황반변성, 백내장, 녹내장), 요로감염(전립선염, 전립선암), 수명장애 등이 올 수 있다는 것이 의학계의 진단이다.
특히,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신적 질병인 알츠하이머병, 파킨스병, 치매, 뇌졸중, 정신병(환각, 망상, 감각상실)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힘들게 한다.
다시 말해 노화과정 속에서 각종 질병은 계속된다. 의료덕분에 오래 살지만 만성질환의 확산과 낮은 삶의 질은 여전하다.
당뇨병, 고혈압, 비만은 더욱 확대되고 있어 아픈 상태의 삶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큰 고통을 준다.
그래서 평소 노인이 있는 가정의 경우 그들의 노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상생활의 지원 대책, 질병기록 관리, 자활자립의 지원,
홈케어, 호스피스케어, 요양소입소, 유언장 작성, 장례절차 등의 자료들을 모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늙어서 병들면 집에서 요양원으로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가며 생을 마감한다. 또 병원에서는 집중치료실에서 중환자실로, 그리고 때로는 ‘희망 없는 퇴원’으로,
아니면 마지막 임종단계에서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노인들의 질병이 심화되면서 가족 모두에게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의 도움과 병원으로부터 최신의 치료받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가 있다. 자신의 치
료와 관련해 의사결정을 보호받을 수 있고, 의사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치료해야 한다.
환자들은 가족들이나 의사 등으로부터 어떤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 환자에게는 평등권, 인권 존중, 수명연장거부 치료가능성의 확대 등 전체 이익을 극대화하여 치료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은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최신의 의료기술에 따라 치료해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2. 식물인간 상태에서의 생명(生命)의 선택(選擇)
현대의학이 발전하지만 인간의 죽는 시기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다. 100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지만 자신이 ‘죽을 때가 됐다’ 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노인으로서 잘사는 만큼이나 잘 죽는 것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지막 생명관리에 필요한 대책을 강구해 놓는 일말이다.
예를 들어 ‘지속적 식물환자 상태’(PVS, persistent vegetative state), 혹은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 및 이와 유사상태에 빠졌을 때에 동원되는 심폐소생술(CPR) 이용,
신장투석, 인공영양 및 수분공급 등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사전지시서’(advance directives)를 미리 준비해 두는 일이다.
즉, 노인들이 죽음 막바지에 인공호홉기를 달지, 아니면 심폐소생술을 받을지, 진통제를 쓸지 여부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미리 정해 놓는 일이다.
물론, 이런 결단을 내리기란 환자 자신이나 가족, 의사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가족들은 환자의 죽음에 대해 감정적으로 연민, 존경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때는 윤리적 딜레마와 불확실성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임종을 눈앞에 둔 환자가 직접 안락사를 희망하거나 무의식 상태에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를 두고 가족들이나 의료진은 윤리적 고민에 빠진다.
누가 과연 내 삶의 남은 가치를 판단 할 수 있는가 하는 궁극적 물음이 제기된다. 즉 자신의 생명을 끊을 권리 혹은 누가 남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가이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생명을 연장하거나 환자의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고 존경과 존엄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것은 의료적 원칙이지만 그렇다고 소생 불가능한 환자의 생명을 한없이 연장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윤리적 법적(인간의 기본권리)원칙에 따라 잠재적 생명연장치료를 의학적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가정에서 수명연장을 포기하고 담당의사가 소생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때 생명연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여기서 시한부 생명의 판단은 주요 변수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환자의 생명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의 문제다. 환자의 삶의 끝이란 향후 12개월 이내에 사망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아니면 죽음이 임박(몇 시간 혹은 며칠 이내) 했을 때를 의미한다. 이런 생명의 시기를 고려해 향후 생존가능성, 치료가능성, 희망 없는 치료 여부, 갑자기 합병증, 급성으로 인한 사망 등의 위험성이 고려된다.
다시 말해 말기 암환자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된다면 전문의사들, 환자가족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모아 진료여부, 진료방법 등을 결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고 자연스럽게 품위 있게 죽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존엄사)은 호스피스에서 말하는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안락사와는 다르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기계적으로 생명연장치료를 중단함으로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형식이다. 이런 정도의 소극적 안락사를 받아들이는 나라는 적지 않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일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 사이에는 복잡한 고민이 많다. 이와 관련해 고려할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01. 첫째는 환자가 스스로 자기 생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여부이다.
의사와 환자 환자의 가족들은 (1)환자의 의료기록 관찰, (2)임상 경험적 소견, (3)의사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에 의한 판단, (4)가족들의 의견을 종합해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가지고 논의 해 결정한다.
02. 둘째는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1)의사가 환자의 자기 결정 능력을 할 수 없는 상태 확인, (2)환자의 의료기록 확인, (3)치료 방안의 제시, (3)가족의 법적 권한 여부확인, (4)환자의 최대 이익을 보장하는 한계에서 결정한다.
한편, 담당의사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즉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의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할 때 ‘당신은 해야’(you must)하는 원칙과 ‘당신은 뭐를 하는 게 좋다’(you should)는 식의 암묵적 선택을 해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해야’ 한다는 뜻은 최우선의 의무내지 기본원칙(생명구원)에 충실 한 것이고, ‘당신은 뭐를 하는 게 좋다.’는 것은 의사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놓고 충고하거나 선택하는 과정이다.
곧 생명연장을 포기할지 혹은 치료할지의 여부 판단은 의사의 기술적 판단이다. 사실 생명을 유지시키는 일은 의사의 의무로서 최선의 의료지식과 기술을 통해서 아픈 신체를 치료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가망이 없더라도 환자를 살리려는 방어적 진료 혹은 과잉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의료현장 모습이다.
3. 무의미(無意味)한 생명연장(生命延長)
사실상, 우리는 소생할 가망이 없음에도 값비싼 치료에 매달리며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
국내에서는 해마다 15만 명의 암 뇌졸증, 간경화 등 중병 말기환자가 끔직한 고통 속에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효(孝)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마지막 가시는 길’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값비싼 치료에 매달린다.
가능한 약이나 기계로 죽음을 연장시키려 한다. 아니 사망의 끔찍한 좌절감과 생명의 한계를 거부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 다트머스 의대 교수 ‘데니스 맥컬러’(McCullough)는 이런 방법은 무의미한 치료가 고통스런 삶의 연장에 불과하다며 존엄스럽게 죽을 권리를 막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기 환자에게 덜 공격적이고 돈이 덜 드는 접근법을 슬로매디신(slow medicine)이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 소생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폐소생 수술을 받거나 항암제에 의존하지 않고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생 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인공호홉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의 모습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여하 간에 죽음자체가 금지된 지식은 아니다. 얼마든지 대화 할 수 있는 주제이고 궁극적 관심 대상이다. 죽음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어보지 못하는 즉 직접적 경험을 할 수없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유기체의 무자비한 해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없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이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하고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정말로 모른다. 죽음에는 다양한 이유로, 모습으로 죽어갈 뿐이다. 극단적 자살을 할 수 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몸뚱이 주변에 의사, 간호사, 가족들이 다 모이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죽음을 돌봐주는 호스피스들에 의하면 여유롭고 흔쾌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보기에도 싫은 힘든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가 많다고 했다. 원래 삶이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어서 ‘완벽함’은 죽은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히 자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 할 수 있다.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 죽을 때 신(神)은 그 영혼을 담을 그릇을 내민다고 한다.
따라서 쉽지는 않지만 죽음을 아는 것, 그것이 곧 삶을 알아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말기암환자들로부터는 미리 죽음의 전 단계 모습을 볼 수 있다.
매 순간의 삶은 죽음의 순간과 직결돼 있어서 현재의 순간 또한 소중한 것이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별의 한 과정이라고 했다.
요는 잘 죽는 것의 요체는 평화스러운 죽음이다. 이상적인 죽음은 편안한 마음 상태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죽는 것이 좋은 이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답이 나올 것이다.
노년후기로 접어들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우 정 著>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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