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미지를 ‘약속’ ‘원칙’ ‘신뢰’라는 말로 대신해 온 정치인이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래서 지난 대선 기간 동안 많은 유권자들이 그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지 않은 이들도 '박근혜의 대표적 공약들'은 지켜질 것으로 믿었다.
철석같은 ‘약속’, 시작부터 깨지는 소리 요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새 정부가 꼭 그 짝이다. 대통령직 인수위까지 포함하면 새 정부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한지 70일. 벌써부터 국민에게 철석같이 한 약속이 깨지거나 변질된 게 수두룩하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이게 박 대통령의 슬로건이었다. 이 슬로건으로 유권자들에게 어필됐고, 그 덕분에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수상하다. ‘약속’이라는 ‘박근혜 브랜드’의 유통기한이 당선 시점까지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대선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27일 대전에서 있었던 유세에서 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하늘같이 알고 지키겠다”며 스스로 ‘약속 정치인’의 종결자임을 자처했다. 허언이었나. ‘당선을 목적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것 아니냐’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말 바꾸고 부인하고...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약속 -> “그렇지 않다”며 말 바꾸기
대선 당시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료 등 3대 비급여 항목을 건강보험에 적용시키겠다”고 분명히 약속해 놓고는 당선이 되더니 “비급여 항목은 처음부터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말을 바꿨다. 때문에 시민들은 화가 났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4개 시민단체는 대통령과 진영 복지부장관을 지난 8일 사기 및 허위사실 유포죄로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경찰청장 임기 보장 약속 -> 스스로 파기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언론에 나와 “경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면서 본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경찰청장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임기가 1년 남은 경찰청장을 측근인사로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허태열 비서실장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드인사란 얘기다.
▲검사 청와대 파견 않겠다는 약속 -> 완전히 깨졌다.
검사의 청와대 파견 관행은 검찰이 청와대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박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이것을 바로잡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약속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려 4명의 현직 검사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법무부에 사표를 냈다지만 ‘검찰 사표 ->청와대 근무->검찰복직’이라는 과거의 관행이 그대로 재연될 게 확실해 보인다.
파기하고 변질시키고...
▲노인기초연금 20만원 지급 -> 차등지급으로 변질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의 공적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노인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당선이 된 뒤 재원 마련이라는 현실문제에 부딪히자 말을 바꾼다. 국민연금 가입자ㆍ수급자와 미가입자ㆍ미수급자를 구별해 차등 지급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인사 공정하고 투명하게” -> 도덕성 논란, 편법임명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인물을 신중하게 발탁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도 실천되지 않았다. 장관 후보자들의 투기, 탈루, 병역, 부당행위 등이 MB 정권보다 더 심하다. 편법임명도 있었다. 금융위원장의 제청을 받아 임명하도록 돼있는 금감원장을 금융위장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임명했다.
▲“장관에 대한 3급 이상 인사권 보장” -> 지켜지지 않았다
“3급 이상에 대한 장관의 인사권을 보장하겠다.” 대선 공약집에 나와 있는 약속이다. 이 약속도 물거품이 됐다. 기재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공석이 상태에서 그 산하 기관인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병무청, 방위사업청에 대한 청장 인선을 대통령이 직접 행사했다.
‘약속’을 하늘같이 알겠다더니...
▲“호남 중용, 대통합 인사 하겠다” -> 영남·수도권 편중인사
국무총리와 17개 부처 장차관 39명,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비서관 52명을 출신지역으로 분류해 보면 영남과 수도권이 압도적(62%)으로 많다. 호남은 충청보다 적은 15%에 지나지 않는다. 호남을 아우르겠다더니 편중인사를 한 것이다.
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중앙선관위장-헌재소장 등' 5대 헌법기관장'과 검찰총장-국정원장-경찰청장-국세청장 등 '4대 권력기관장'에 호남 출신은 단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논란이 되자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황당한 해명을 내놓아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자는 서울 출생이지만 선산이 전북 군산시 임피면 미원리다. 선산을 매년 다니고 있으니 (호남) 지역을 고려한 인선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대탕평 인사 하겠다” -> 극우편향, 육법당 인사
MB정권보다 더 편향적인 정부다. 5.16을 찬양하고 유신독재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극우 인사들이 대거 발탁됐다. 법조인 출신과 육사 출신 장성들이 대통령을 겹겹이 호위하는 진용을 갖췄다.
▲“무료 야간 돌봄교실 운영” -> “무료가 아니고 유료다”
지난해 11월 21일 박근혜 후보가 획기적인 공약을 제시한다. 맞벌이 가정을 위해 초등학생들을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돌봐주는 ‘돌봄교실’을 무료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후보자 때 한 약속은 당선인이 되자 확 달라진다. 인수위가 ‘무료’라는 말을 슬쩍 빼자, 교육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후 5시~10시에 운영되는 야간돌봄교실을 유료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약속주의자가 아니라 편법주의자?
▲“경제민주화 강력하게 추진하겠다” -> 경제 각료 모두 재벌옹호자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장관 후보자,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정자 등 박근혜 정부의 ‘경제 라인’ 모두 경제민주화와 거리가 먼 시장주의자들이다. 경제민주화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니다.
▲“공직자 청렴해야...검증 필요” -> “인사청문회를 비공개로”
국회 인사청문제도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도입을 추진한 게 바로 박 대통령이다. 막상 대통령이 되더니 딴소리를 한다. 자신이 내정한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곤혹을 치르는 게 보지 좋지 않았는지 후보자에 대한 도덕성 검증만큼은 비공개로 하지고 주장해 빈축을 산 바 있다.
▲“국민과 소통, 야당과 대화” -> 불통, 오기 정치
‘밀봉 인수위’로 시작하더니 ‘불통 정부’가 돼 가고 있다. 정부조직법 원안을 한두 군데 수정하자는 야당의 요구를 끝내 거절했다. 의혹투성이인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와 현오석 부총리 내정자에 대한 임명 역시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약속을 깨려면 양해를 구해라
약속을 잘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소한 약속도 그럴진대 국가 경영과 관련된 약속이라면 더욱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엊그제 다짐한 약속을 금세 깨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하늘같이 알고 지키겠다”는 다짐이 헛것이 아니었다면 약속을 실천하려는 진심은 보여줘야 한다.
새 정부 시작부터 약속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한 게 아니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한 것으로 밖에 달리 이해할 방도가 없다. 대통령의 공약에 기대를 걸고 있는 국민이 적지 않다. ‘약속 대통령’의 약속을 믿었던 국민은 대체 뭐가 되나.
약속을 파기할 수밖에 없다면 그 사정과 이유를 밝히고 양해를 구하는 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우물쭈물 편리한대로 하나씩 깨자고 만든 게 공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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