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방산은 곡성의 내로라하는 산에 비해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수 없다.
그러나 들머리의 고려 충신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덕양서원과 날머리 심청한옥마을은 충분한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어 뵌다.
거기다 보성강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압록유원지와 기차마을,그리고 레일바이크도 한몫해주고 있다.
50년 전만해도 단군과 웅녀의 설화가 있다고 웅방산(熊方山)으로 불렸다.
곤방산(困芳山)이란 이름은 중국 풍수가 주사춘(朱士春)이 남원으로 유배와 방씨 집에 살다 돌아가면서 방씨의 선산을 잡아 줘 부자로 살게 하였다.
더욱 욕심이 난 방씨가 중국으로 찾아가 명당자리를 부채에 그려 달라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부채를 잃어버리고, 명당을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방(芳)씨를 피곤하게(困) 한 산이라는 의미로 곤방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양서원 뒷산을 천덕산(551.7m)이라고 한 것은 ‘임금(天)이 큰 덕을 베푸는 산’이란 뜻이지만 곤방산에 능선이 이어져 있으니 위성봉인 셈이다.
산 전체를 부를 때는 곤방산, 주봉은 큰봉(727m), 지도상에 곤방산으로 표기된 곳은 곤방봉(715m), 덕양서원 뒷산은 천덕봉으로 부르면 되겠다.
정상에선 지리산과 곡성시가지, 고리봉과 문덕봉, 서쪽 동악산과 통명산이 지척이다.
풍수지리상 장군대좌(將軍臺座) 명당이 있어 서로 묘를 쓰다 보니 묘소가 많다.
마을 어귀에는 심봉사와 심청의 조형물이 있고, 1,700년 전 곡성출신 만고효녀 심청의 효를 재조명하는 심청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고대소설 픽션속의 가공인물 심청이가 논픽션 현실세계로 환생한 셈이다.
산행궤적
약 10km를 5시간 20분 걸린 셈.
고도표
덕양서원(德陽書院) 표석과 안내도가 그려진 뒤 포장도로로 진입을 한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눈에 묻혔다.
그 옆에 또다른 표지판 완계정사(浣溪精舍)는 1901년에 건립되었다.
안훈(安壎, 1881∼1958)은 곽종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137인 중 한 명으로 아명은 안자정(安子精)
이다. 그는 완계정사(浣溪精舍)를 설립하고 해방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1911년 의병장 이석용이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적극 지원하였다.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며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고, 1941년에는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완계정사는 이같은 안훈의 지도 아래 곡성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완계정사는 해방 이후 크게 훼손되어 2002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완계정사 표석
덕양서원 입구의 홍살문을 들어서...
태극문양의 솟을삼문은 잠겨있고...
그 앞엔 비석 4기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 현판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산앙문(山仰門)
잠긴 문 덤넘어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덕양서원(德陽書院)과 그 아래 반쯤 가려진 덕양강당(德陽講堂)현판.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 ~927)의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은 왕건을 도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몇 년 뒤 후백제의 견훤이 공격하자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신숭겸이 태조를 구하고 후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선조 22년(1589년)에 창건하여 소실과 중건,그리고 훼철을 반복하였다.
건물은 강당, 동재인 연서재와 신실인 덕양사, 서재인 신덕재, 전사청, 그리고 외삼문, 내삼문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덕양서원 건사사적비와 강당과 연서재의 내부현판 19개가 있으며 출생지인 용산재와 함께 도 지방 기념물 제56호로 지정.<자료인용>
덕양서원 우측을 돌아 바로 좌측으로 꺾어 돈다.
대밭을 지나니 정면에서 낮은 산자락이 마중을 나와 있다.
바로 능선으로 오르는 등로가 열려있지만 선답자가 없어 러셀이 되어있지 않다.
꾸불꾸불 임도를 돌아 20여분 만에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나는 팔각정자를 찾으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보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보니 팔각정자는 당산마을에서 올라오는 능선에 있었다 .)
산행채비를 갖추고 맞은편 계단을 오른다.
등로는 된비알로 이루어져 있어 선행자의 러셀에 힘입어도 상당히 힘든다.
진행 좌측으로 내려다보니 당산마을에서 올라오는 능선자락에 팔각정자인 듯 지붕이 살짝 보여서...
살짝 당겨보았더니 팔각정자가 확실하다.
팔각정자가 있는 능선갈림길과 만나고...
힘겹게 오르는 등로의...
적설량은 더욱 더 많아지더니...
이윽고 전망이 터지는 데크전망대에 오른다.
데크전망대 아래에 이정표겸 깃대봉 표지판과 석주형 사각정상석이 있다.
데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산세.
우리는 전망좋은 깃대봉 데크전망대에서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마산형님은 거리가 먼 곳에서 오는 데도 불구하고 귀한 치킨을 산중에서 호강시켜준다.
거기다 진한 솔향이 배어있는 고농도의 솔술(松酒) 두 잔을 곁들이니 겨울날 추위를 잊게하는 자양분임에 틀림없었다.
사방이 훤히 뚫린 깃대봉 정수리에서 누리는 산중호사로 이만한 게 별로 없을 터.
그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갈 길을 재촉,
천덕산 표지판은 부지불식간에 지나치고...
눈뭉치 덕지덕지 들어붙은 무거운 발을 들어올리며 힘든 발걸음을 이어간다.
오늘 나와 함께한 마산형님은 여든이 넘으신 데도 불구하고 잘 걸으시지만 다리에 쥐가 나면서 걸음이 늦어졌다.
일행들은 모두 앞서가고...
나는 형님과 같이 컨디션을 조절하며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걷는다.
큰봉 헬기장에서 여유를 조금 갖다가...
이정표 표지판과...
또다른 표지판.
그리고 뒷쪽 조망대에선 나아갈 능선이 소갈비짝처럼 펼쳐진다.
견두지맥 방향으로 보이나 식어빠진 산행기를 쓰다보니 분간이 잘 안된다.
눈속에 빠져...
쥐난 다리를 끌며...
그래도 걷지 않으면 안된다고...
안간힘을 쓴다.
고스락을 바라보며...
숨차게 정수리에 올라섰더니...
바위에 분재된 듯 멋지게 생긴 향나무가 정취를 뽐낸다.
돌아섰더니 묘지가 잘 조성되어 있었는데...
'용호광산김공철수지묘(龍湖光山金公喆洙之墓)'
내가 광김(光金)의 39대 용(容)자 항렬이고, 우리 작고하신 부친이 38대 수(洙)자 항렬이니...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지도상 곤방산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
힘든 형님을 돌려 세웠다.
돌아서며 하얗게 눈이불을 덮어쓴 묘지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곤 마지막 봉우리 감투봉에 섰다.
무명의 봉우리지만...
서래야님은 전국의 무명봉에다 임의로 작명, 코팅지를 붙인다.
이후 가파른 내리막을 밧줄에 의지해 쭉쭉 미끄러지며 내려서서...
다시 무덤지역 능선을 내려서다...
펼쳐지는 조망에 잠시 넋을 놓고 호남의 산하를 스캔해 본다.
견두지맥인 형제봉과 천왕봉이다.
천왕봉 우측 뒤론 갈미봉으로 견두지맥이 이어지고, 우측 앞 고개를 내민 봉우리는 국사봉인 듯.
이제 능선길을 버리고 우측 흥부마을로 꺾어 내린다.
이 지점의 이정표엔 심청마을이 불과 300m.
길을 막고 쓰러진 아취형 소나무 위로 수북히 눈이 얹혀있다.
반듯반듯 잘 지어진 심청마을의 한옥 지붕에도 어김없이 하얀 눈이 쌓여 있다.
담벼랑에도 하얀 눈이, 초갓집 처마에는 주렁주렁 수정 고드름이 달려있다.
♪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해님이 문안오시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오시네.♬
심청과 곡성의 인연은 지난 2000년 연세대학교의 심청 관련 연구결과 발표를 근거로 KBS 1TV 역사스페셜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유근기 곡성군수는 “심청전이나 판소리 심청가는 근원이 곡성의 홍장설화이기 때문에 곡성군이 바로 심청전이 탄생한 고장”이라고 주장했다.
전남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된 ‘관음사 사적기’에는 삼국시대에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간 원홍장이라는 처녀가 불상을 만들어 보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설화가 적혀 있다. 곡성군은 원홍장이 심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심청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따라서 심청의 고향은 관음사가 있는 곡성이고 인당수(印塘水)는 변산반도 격포 앞바다의 임수도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나온 작가 미상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심청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황주 도화동에 눈멀어 앞을 못 보는 심학규와 곽씨 부인이 살았는데, 이 부부는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자식이 없는 게 걱정이었다”라고...
황주는 고려시대부터 황해도에 있다.
그러니 심청의 고향은 황해도 황주군이란 주장이다.
중국과 교역하던 장사치 뱃사람들이 공양미 300석에 사서 서해 인당수에 제물로 바쳤으니 서해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륙으로 깊숙한 지리산 자락의 곡성이라니 어리둥절하다고 한다.
서해 인당수에 천착해 인천시 옹진군도 심청의 고향과 심청전의 지리적 무대가 백령도라며 1999년 심청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픽션속의 고전소설이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자기 지역으로 끌어와 스토리를 엮고 있으니,이는 비단 심청이만이 아니다.
남경상인에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간 심청이를 기다리다 환생하여 아버지 심봉사를 만나 눈을 뜬다는 스토리는 대표적인 해피엔딩.
조금 아래의 주차장에 우리 차가 보인다.
부근에 막 인당수에 뛰어내리는 심청이의 조형물이 있고,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환생하여 아비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을 통하여 효(孝)를 일깨우고 있다.
시락국밥 한 그릇과 소주 큰 두 잔으로 급히 마무리하고 귀가를 서두른다.
이렇게 늦게 식어빠진 산행기를 올리다보니 산중에서 보았던 동악산을 비롯한 주변 산군들의 흔적은 확인할 길 없어 아쉽기만하다.
踏雪野中去 답설 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 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 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 후인정.
눈 내린 벌판을 밟아갈 때에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히 하지 말라
오늘 걸어 가는 나의 발자국이
반듯이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서산대사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