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묵상
우리가 부패하였나이다.
수없이 많은 죄악 때문에 우리는 부정한 자가 되었나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우리는 타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나이다.
폭풍우가 우리를 휘몰아칩니다.
폭풍우 같은 우리의 악한 죄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비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거두셨나이다.
우리의 죄악이 토기장이의 그릇 같은 우리를 징벌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돌아보소서.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잊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주님의 어린양을 보내주소서.
그가 광야로부터 시온의 왕국을 세울 것이며 영광의 보좌에 오르리이다.
우리의 사슬을 풀고 우리를 자유하게 할 권세를 가진 다른 분은 없나이다.
(로버트 웨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은 과거의 어느 날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사람 몸이 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성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말씀이 됨으로 몸을 지닌 인간 삶이 지닌 깊은 의미를 보여줍니다.
성탄의 아침, 이 성탄이 갖는 의미를 우주적 범주에서 이해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단 한 구절의 성경을 암송하고 있다면,
그 구절은 분명히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대상을 인간으로 제한하여 읽었습니다.
생태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사”를 올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지없는 하나님 사랑을 들려줍니다.
그 하나님은 온 세상(cosmos) 전체 피조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육화가 인간만을 위함이 아닌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육화의 참된 의미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적 범주에 머물지 않고, 우주적 범주로 끊임없이 확장됨입니다.
이렇게 우주적 범주를 지닌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고 육화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이는 우리 인간이 창조세계와 맺는 새로운 관계를 제안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거대한 신성의 바다”의 일부를 더욱 빛나게 만듦을 알게 됩니다.
피조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일찍 프란치스코 성인이 맛보았던 우주적 형제애입니다.
그리하여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예수님의 탄생으로 “장엄함”으로 채워지는 거룩한 성전임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