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내성·울오·어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저족·금성·철원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의 왕건 부자가 투항해왔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견주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당성·청주·괴양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배현경·신숭겸(申崇謙)·복지겸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