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숨길로 드러가는 빛을 고디 보오”.
비뚤어지면 숨길이 막혀진다는 것이다. 숨길이 막히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목숨 길은 언제든 바르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비뚤어진 길을 잘 피해가야 삶이 완성된다.
잘 피하려면 언제라도 숨길을 잊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숨길, 곧 자기 생명이 달린 그 길만을 곧게(고이)바라봐야 한다. 이 길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빛이다.
이것이 바로 ‘빛드러’의 참뜻이겠다. 하지만 숨길로 들어가는 빛은 밝지 않고 대단히 희미하여 마치 없는 듯하다. 그렇기에 이 빛을 고디 곧장 보라(貞觀)고 했다.
이 빛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살아서도 죽은 자 있고 죽어서도 산자가 있는 법이다. 다석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세상이 좋아 할 이치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겐 자신의 말이 맛없는 소리일 뿐이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다석은 이 말뜻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익혀 살아내고자 거듭 이야기했다.
인간이 살 숨길은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다석의 한 줄 시, ‘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숨길로 숨는 길로 들어가라’는 본뜻이다.
다석은 ‘빛드러’, 즉 비뚤어 가는 빛을 ‘빚’이라 풀었다. 빚은 부채인 바, 자기 할 바를 못해 남에게 부담지우는 것을 뜻한다. 사람노릇 못해 남에게 책망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빚’은 동시에 ‘빚다’, ‘빚어내다’란 뜻도 지녔다. 무엇을 만든다는 말이겠다. 여기서는 비뚤어진 상태로 빚는(빚어진) 세상을 적시한다. 밝은 대낮에 허영으로 못된 것을 거듭 빚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빗’은 흩으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만드는 빗질을 연상 할 수 있다. 대낮에 비뚤게 빚은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이겠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바로 이런 빗질을 하는 존재들이다. 대낮의 빛을 가리고 비뚤게 된 것을 가지런히 하는 빗질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숨길을 옳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빛’은 결코 이런 빛이 아니다. 이쁜(미운) 얼굴을 보고 이쁘(밉)다고 말하는 그런 빛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란 말이다.
다석도 이런 ‘빛’ 맛을 아직 충분히 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 난 것은 이 맛을 얻고 찾기 위함이다. 앞서 말한 ㅅ, ㅈ, ㅊ의 변화가 삶, 잚, 참, 즉 ‘삶’은 죽어야(‘잠’) ‘참’이 될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단연코 세상에 ‘빚’없는 사람은 없다. 이 빚을 벗겨내고 아득한 숨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사람 사는 이유이자 목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