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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8월 부산국제불교박람회를 큰스님께서 공들여 준비하셨다.
7일부터 10일까지 짐모아에서 마련해주신 무비스님 부스에 수많은 분들이 다녀가셨고, 큰스님께서 대선스님과 함께 준비하신 모든 법공양물이 다 공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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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경반 분들이 팀을 나눠서 매일 자원봉사를 나갔다고 했는데, 참여했던 마니주 보살님은 토요일에 <다음카페 염화실 영상일기> 방 사진 댓글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토요일을 불교박람회로 모인 젊은이들이 대견스럽습니다. 오후 용학스님 법문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섰다가 길에서만 1시간30분을 보냈네요. 온통 불교박람회에 가는 차들로 길이 메워진듯 했어요. 용학스님의 유모어섞인 설법에, 큰스님 법보장에 감탄하고 감격하는 젊은이들이 귀엽고 대견했었어요. 불교의 장래에 빛이 보이는듯 했어요.희망이 가까이로 다가오는 듯…”
같은 날 아침, 큰스님께서도 <다음카페 염화실 감사메모방>에 글을 올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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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양 법보시에 동참하신 모든 불자님들 감사합니다.
불교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법입니다.
이번 부산에서 박람회를 인연으로하여 부처님의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양올리고 기타 여러가지 봉사하는데 동참하신 모든 분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낱낱이 사진을 통해서 활동사항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두마디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8월 9일 아침
범어사 여천무비 합장 3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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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학스님의 책 <보리심의 공덕>도 준비한 양이 일찍 동이 났고, 원봉스님이나 지원스님을 비롯해서 여러 스님들께서 돌아가며 오셔서 <보리심의 공덕> 책에 사인을 해주시는 장면도 <다음카페 염화실 영상일기> 방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박람회 중 가장 피크였던 토요일에 용학스님 특별법문에 인파가 몰렸다. 남녀노소의 청중이 스님의 <보리심의 공덕> 법문을 들었다.
용학스님은 법문 첫머리에 무비스님께서 준비하신 일지경을 모든 청중이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법문이 끝나고도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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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께서 이날 준비하셨던 여섯 개의 문구가 든 일지경을 진여화님과 메리오닐님이 영어로도 번역해 주셨다.
<일지경(一紙經)>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1.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이 한 문장이 바로 지난 6천 년간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 현자들이 동의한 부분이다
2.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
3. 지금까지 내가 얻은 모든 결과는 100퍼센트 내 책임이다
4. 수처작주(随處作主) : 너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다.
5. 세상에 불안은 없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만 있다.
6.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One-Page Scripture"
All Things Are Created by the Mind.
1. People Become What They Think.
This truth has been echoed by sages, philosophers, and spiritual teachers for over 6,000 years. The quality of your life is rooted in the quality of your thoughts.
2. It’s Not Your Fault to Be Born Poor, but It’s Your Fault to Die Poor.
3. I Am 100% Responsible for My Results.
4. You Are the Master of Your Own World.
5. There Is No Anxiety in the World—Only Anxious Thoughts.
6. We Exist Only to Help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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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만난 큰스님은 대선스님께 이런 질문을 하셨다.
“이제 법보장은 어지간히 매조지 지어졌고, 그다음엔 이제 뭘로 법보시를 하면 좋을까? 법보시를 계속해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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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자로 <다음카페 감사메모방>에는 큰스님이 방문하신 보살님들에게 “지금 하는 일이 필요한 거예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게 과연 내가 필요한 건가, 그걸 한 번 자세히 점검해 봐야 해. 만약 그걸 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는가,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욕심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을 활발하게 운영하는 엔진이야, 사실은 좋은 거야.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데 조절을 잘해야 돼.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엔진을 마력수가 소화할 만큼 달려야 하고 짐을 실어야 돼요. 일을 하는 것도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만치.” 라고 말씀해 주시는 비디오 클립이 올라왔다.
그렇게 점검을 통해 큰스님은 새로운 법공양을 준비하시느라 “범어사에 좋은 장소를 개발해서 보제루 아래 법공양물을 놓고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하셨다.
화중연화 대전집이나 여섯 구절이 닮긴 한 장의 일지경이나 매일매일의 화엄법문이나 찾아오는 분들게 일러주는 2분짜리 소참법문이나 큰스님의 정성이 한결같았다. 큰스님은 불심(佛心)이라고 적힌 포토카드에 펀칭을 하는 울력을 하면서도 웃으시고,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노트에 사인을 해주시면서도 파안대소를 하셨다.
큰스님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웃는 모습만 편집해서 올려줄 수 있느냐고 보내주신 비디오 속에서 큰스님은 “그 정도의 몸이라면 웬만한 병은 화내지 않으면 다 나을 수 있습니다. 꼭 낫습니다. 믿습니까?” 하고 물으시면서 또 쾌활하게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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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저녁, 화엄전 마당에서 한 보살님이 큰스님을 못 만났다면 선방만 다니다가 그 수많은 경전들을 못보고 끝났을 것이라고 끝없이 감사하셨다.
큰스님이 두 번이나 “요즘 무비스님의 법문이 달라졌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달라진 무비스님의 법문이 <다음카페 염화실 감사일기방>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금박지처럼 작고 빛나는 법문들로 큰스님께서 불자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수월도량(水月道場)<다음카페 염화실>이 다시 개금불사 중이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七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五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5. 五十門의 十地答
(4)焰慧地
반갑다. 오늘은 이세간품 이천문답중에서 십지문답을 하는 중이다. 지난 시간에 염혜지의 한동가리를 끝내고 오늘 염혜지의 ‘나’단 두 번째 할 차례다.
페이지로는 404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되겠다.
지난 시간 마지막 부분이 ‘즉득보살결정법(則得菩薩決定法)이라’ 보살이 이러한 법에 안주하면 ‘뭘 떠나서 떠나는 주체 마음의 당처가 결정되면 얻을 바가 있어질 것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오늘은 그 소득심에 대해서, 이 결정법을 가지고 다시 얻어지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출세간의 결정법을 얻는 까닭이다’라는 말이 나올텐데, 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반대말이잖은가? 확정, 결정은 의심의 반대말인데 ‘결정법을 얻었다, 출세간의 결정법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청정해진 것을 밝히는 것이다.
‘득피내법(得彼內法)하야 생여래가(生如來家)하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안쪽으로 법이 청정한 것이 얻어지면 생여래가라,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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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느 철인가 동안거를 지내면서 총림에서 반결제 살림이 있었는데 방장스님께서 그러셨다.
“오늘은 대중을 위해서 중참 이상 열심히 수행하신 이삼십 년 납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법문하겠습니다.”
그 법문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여기 모인 대중께서도 법화경 오천퇴석 처럼 부처님 말씀대로 쭉쟁이가 다 날아가고 알맹이 몇이 남아 있는지, 쭉쟁이가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알맹이가 이렇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중참스님들을 위해서 오늘 말하겠습니다, 범은 쥐를 잡지 않는다. 그리고 여왕벌, 왕벌은 집을 한번 떠나면 다시는 그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 방장스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했던 이세간 법문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결정한 법이 있는데, 그 결정한 법, 결정법에 사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데 대해서, 쪼잔한 이익에 대해서, 그렇게 메이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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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지금 우리가 15년 가까이 이렇게 화엄경을 쭉 보고 있는데 굉장히 천천히 보고 있다. 천천히 보고 있으나 마음은 아주 부드럽다. 운전을 하든지 붓글씨를 쓰든지 기타를 배우든지 처음에는 다 천천히 배우게 되어 있다.
천천히 배우면서 기초를 다진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할수록 부드러운 동작이 쉬워진다.
그래서 그 부드러움이 몸에 완전히 배기면 붓글씨를 쓰다가도 완전히 운필이 되어서 붓하고 나하고 같이 부드러움이 무르녹아진다. 그렇게 부드러움이 녹아지고 숙달이 되면 갑자기 초서를 확 갈겨 쓸 수가 있다.
운전을 할 때도 그렇다. 처음에 운전면허학원에서 운전을 배울 때는 천천히 배운다. 운전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천천히 천천히 익히지만 완전히 부드러움이 나한테 숙지가 되면 쏜살같이 차를 몰고 달릴 수가 있다. 아무리 빠른 곳에서도 컨트롤이 다 된다.
경전이나 수행도 그와 같지 않을까 싶다. 소걸음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부드럽게 시작을 해도 계속해서 한다면 선정의 힘에 탄력이 붙고 결국 ‘중생성불찰나중(衆生成佛刹那中)’이 된다. 아무리 콩알만큼 작아도 총알은 빠르다. 빠르면 힘이 있다. 일념이라도 한 생각이라도 부드러움이 완전히 장착되고 나면 굉장히 빨라져서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도 부드럽게 빨리 하겠다.
나. 菩薩의 十種決定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決定法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決定於如來種族中生하며 決定於諸佛境界中住하며 決定了知菩薩所作事하며 決定安住諸波羅蜜하며 決定得預如來衆會하며 決定能顯如來種性하며 決定安住如來力하며 決定深入佛菩提하며 決定與一切如來同一身하며 決定與一切如來로 所住無有二가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결정한 법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결정코 여래의 종족에 태어남과, 결정코 모든 부처님의 경계 속에 머무름과, 결정코 보살의 할 일을 분명히 앎과, 결정코 모든 바라밀다에 머무름이니라. 결정코 여래의 대중에 참여함과, 결정코 여래의 종자 성품을 나타냄과, 결정코 여래의 힘에 안주함과, 결정코 부처님의 보리에 깊이 들어감과, 결정코 모든 여래와 동일한 몸임과, 결정코 모든 여래와 머무름이 둘이 없음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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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결정법(十種決定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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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유십종결정법(有十種決定法)하니: 열 가지의 결정된 법이 있는데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청정에 대해서 밝히게 된다.
그 열 가지 중에 앞의 다섯 가지는 자분(自分)이라 그런다.
화엄경에는 계속해서 자분과 승진분(勝進分)이 반복된다.
자분이라고 스스로 자(自)자 분수할 때 분(分)자 몫이라고 하는 글자를 쓴다.
자분은 예를들어서 초등학교 때 익히는 것을 자분이라고 하고 졸업반이 되어 다 익힌 상태에서 졸업 예정자가 나아가는 것은 승진분이라고 한다. 이길 승(勝)자 나아갈 진(進)자 승진(勝進)이다.
중학교에서도 중학교 과정을 다 익히는 것은 자분, 해야 될 몫과 그 졸업반 과정을 다 마친 사람은 승진분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과정을 다 익히는 것은 자분이 되고, 고등학교 과정을 다 익혀서 졸업이면 승진분이 된다.
화엄경에서도 십주에서 다 익히는 것은 자분, 다 익혀서 마지막에 가면 승진분이 된다.
십행에서 다 익히는 것은 자분이 되고, 십행에서 다 익어지면 승진분이 된다.
이런 것은 화엄경의 본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부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말씀은 돈(頓)으로 원(圓)으로 바로 말씀하시고는 싶으나, 중생의 근기가 미혹한 관계로, 없는 법문을 만들어서라도 십주법문을 하고 십행법문 십회향법문 십지법문 이와 같이 단계를 두고 법문을 하는 것이다.
화엄은 일승별교라서 무두무미(無頭無尾)라.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허공이 앞뒤가 없듯이 허공의 무게가 천년 만 년 지나도 늘어나지 않듯이, 없는 것을 툭 설해 놓으면 그것이 화엄경이고 그것이 본질의 설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분법이 있고 승진법이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
소위결정어여래종족중생(所謂決定於如來種族中生)하며:소위 반드시 여래의 종족에 태어남과
결정어제불경계중주(決定於諸佛境界中住)하며 : 반드시 부처님, 여래의 경계 속에 머무름과
결정요지보살소작사(決定了知菩薩所作事)하며: 반드시 보살의 할 일을 앎과
결정안주제바라밀(決定安住諸波羅蜜)하며: 반드시 여러 바라밀다에 머무름과
결정득예여래중회(決定得預如來衆會)하며: 반드시 여래의 대중에 참여함이라.
거기까지가 자분이 되고 그다음 결정(決定)하면서 뒤에 다섯 개가 나오는 것은 승진분이 되겠다.
이길 승(勝)자, 우승할 때 승자, 그 결실이 돼어 완전히 익어야 다음에 씨앗을 뿌려서 또 다음 단계를 기약할 수가 있잖은가.
꽃이 어중간하게 피는데 씨앗도 어중간하게 영글었다면 다음 생이 옹골차게 연결이 안 되고 기약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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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능현여래종성(決定能顯如來種性)하며: 반드시 여래의 종자의 성품을 나타냄과
결정안주여래력(決定安住如來力)하며: 결정코 반드시 여래의 힘에 안주함과
결정심입불보리(決定深入佛菩提)하며:) 결정코 반드시 여래, 부처님의 보리에 깊이 들어감과, 깊이 증득함과
결정여일체여래동일신(決定與一切如來同一身)하며: 결정코 반드시 모든 여래와 동일한 몸이며
결정여일체여래(決定與一切如來)로: 또 결정코 일체 부처님과 더불어서 머무르는 바가
소주무유이(所住無有二)가:둘이 없는 것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이것이 열 가지니라.
다. 菩薩의 十種出生佛法道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出生佛法道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隨順善友가 是出生佛法道니 同種善根故며 深心信解가 是出生佛法道니 知佛自在故며 發大誓願이是出生佛法道니其心寬廣故며忍自善根이是出生佛法道니知業不失故며一切劫에 修行無厭足이是出生佛法道니 盡未來際故며 阿僧祗世界에 皆示現이是出生佛法道니成熟衆生故며不斷菩薩行이是出生佛法道니增長大悲故며無量心이是出生佛法道니一念에 徧一切虛空界故며
殊勝行이 是出生佛法道니 本所修行을 無失壞故며 如來種이 是出生佛法道니 令一切衆生으로 樂發菩提心하야 以一切善法資持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大丈夫名號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선지식을 따르는 것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착한 뿌리를 함께 심는 연고며,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함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부처님의 자유자재함을 아는 연고이니라.
큰 서원을 세움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그 마음이 너그러운 연고며, 자기의 착한 뿌리를 참아내는 것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업이 잃어지지 않음을 아는 연고며, 온갖 겁에 수행하되 만족하지 않음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하는 연고이니라.
아승지 세계에 모두 나타남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중생을 성숙시키는 연고며, 보살의 행을 끊지 않음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큰 자비를 증장하는 연고며, 한량없는 마음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한 생각 동안에 모든 허공계에 두루하는 연고이니라.
훌륭한 행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본래 닦은 행을 잃지 않는 연고며, 여래의 종성이 불법을 출생하는 길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즐겨 발하게 해서 일체 선한 법을 도와서 지니게 하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대장부의 이름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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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출생불법도(十種出生佛法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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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십종출생불법도, 보살의 열 가지 불법의 도, 불법의 길을 출생시키는 것이 있다.
이것이 열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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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유십종출생불법도(有十種出生佛法道)하니 : 열 가지 불법을 내는 길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소위수순선우(所謂隨順善友)가: 선지식을 따르는 것이다.
입법계품에 보면 덕생동자 유덕동녀가 선지식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도 미륵보살장으로 가서 선지식을 모신 사람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보리심에 대해서 또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선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다.
우리가 지금 화엄경을 보고 있는데 화엄경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다.
또 우리 어른스님이 화엄경을 쭉 해 오시는데 어른스님을 화엄경의 대선지식으로 보는 제자들도 있고, 어른스님을 그만그만한 범부로서 대하는 이들도 있다.
스승을 굉장히 거룩한 선지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스승을 대할 때 나나 스승님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또 자기가 잘났다고 스승을 무시하기도 한다.
옛날에 한의사가 되려고 한다거나 전래적으로 한약을 배우려면 스승을 따라서 산에 올라가서 똑같이 약초를 캐고 약초 캐는 법, 약초 고르는 법도 배우고, 환자가 왔을 때 진단하는 법, 약달이는 법, 침 놓는 법을 옆에서 다 배운다.
호리유차(毫釐有差)라도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스승이 사시는 걸 유심히 살펴보고 하나하나 메모한다.
우리 스님이 그런다.
“스승보다 낫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스승만큼 되면 스승의 은혜를 반 밖에 못 갚는다. 스승보다 나으면 스승의 은혜는 다 갚는 것이다. 하물며 스승보다 못하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
스승이나 선지식을 모시는 태도가 어때야 되느냐? 화엄경을 보는 태도가 어때야 되느냐? 화엄경을 일반적인 경전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여러분들이나 우리처럼 ‘이것이 내 인생이다’ 인생을 걸고 보는 분들도 있다.
계속 이렇게 15년이 넘도록 꾸준하게 결석 안 하시고 와서 공부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다.
화엄경을 대하는 태도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출석하시려고 먼 거리에서 오시는 것만 봐도 ‘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거울에 비춰봤을 때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얼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스승을 대할 때도 예를 들어 스승 추사를 대할 때도 ‘아유 추사 글씨, 우리 선생이 뭐 글 쓰겠나?’ 이래 버린 사람은 자기 글씨도 늘지 않는다.
그런데 추사를 딱 봤을 때 ‘우리 스승님만큼 글 쓰는 사람은 없을 거야’ 하면서 계속 따라하다 보면 추사를 능가할 수도 있다.
특히 불교 전통에서나, 티벳 불교에서는 ‘스승을 바라볼 때 꼭 부처님 같이 바라봐야 자기가 부처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얘기까지 한다.
화엄경도 그렇게 바라봐야 안 되겠나 싶다.
그것을 비유하여서 화엄경에서는 어떻게 예시를 드냐하면 ‘선재동자가 선지식 53참을 하면서 어떻게 선지식, 스승을 바라봐야 되느냐?’ ‘모든 조건 다 떼고 선지식을 존경해야 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내도 외도 가리지 않고 입법계품에서 53선지식을 참방하잖는가.
그런데 우리는 ‘요거 나쁘고 저거 좋고’ 이렇게 이야기해 버리니까 스스로 발전이 없다.
그러면, 선지식을 잘 따르는 사람의 태도나 보리심을 낸 사람을 보고 선지식은 또 그 제자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삼척족하에도 예배를 올린다. 삼척동자 발밑에도 예배를 올린다는 이야기다.
53 선지식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가장자 편에 나온다.
미가장자가 선재동자를 보고는 법상에서 쫓아내려와서 엎드려서 오체투지 절을 한다.
“제가 발심했습니다.”
“뭐 했다고? 발심?”
발심했다니까 선재동자의 발밑에 와서 절을 해 버리는 것이다. 발심을 했다니 선지식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렇게 발심한 제자가 있으니, 이 법이 이어가고 전승된다, 그러니 선지식으로서는 제자가 너무나 고마웠을 것이다.
여기 수순선우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선지식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선지식을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을 따르고 법을 믿는 것이며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 불법을 내는 길이니 선근을 함께 심는 연고다.
동종선근고(同種善根故)며: 동종선근고라. 부처님 같은 선근, 관세음보살님 같은 선근을 심는다.
선지식을 관세음보살로 모셨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심심신해(深心信解)가: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신해행증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그것이 바로 출생불법도라, 불법을 내는 길이니
지불자재고(知佛自在故)며: 이것은 부처님의 자유자재함을 아는 연고다.
선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나왔다.
물 긷고, 직접 모시고 살아야 되는데 요새 우리는 어떤가?
어른스님한테 건당하고 전강했는데 ‘증’ 받아가지고 명함에다가 ‘전강제자’, 이런 것은 사칭이다.
의대 입학도 못한 사람이 의사자격증을 사칭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디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부족하면 더 하고 더 묻고 평생 그렇게 해야 어른스님의 전강제자로서, 스님께 욕이 안 된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부끄럽지도 않다.
그런데 이름만 떡 걸어 놓고 건당식만 참석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질타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게 바로 사칭이다.
바깥에서는 검사 사칭을 하면 구속이 되지 않는가?
전강 사칭도 구속시켜야 된다.
그러니까 전강을 해도 부족하고, 부족한 우리가 전강을 한다는 것이 그냥 열심히 하라는 격려이지 그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저도 어른스님이 ‘전강해라 전강해라’ 해도 몇 년을 미뤘었다.
“스님은 충분하시나 우리가 받을 자격이 안 됩니다.”
대학원서 미루고 또 미루다가 지금 동화사 율주로 계시는 현진스님이 그때 마침 송광사 강주로 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모두 송광사에서 무비스님께 전강을 받았다.
강주로 가려면 전강을 해야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해사 대학원 졸업하고 스님 모시고 3년 살고 난 뒤 한 10년 더 지나서 전강하겠습니다.” 했는데, 그때 받은 것이다.
사실 지금도 저는 전강받을 자격이 안된다.
‘강사라고 하는 것은 학인보다 두 배 공부하는 것이고 강주라고 하는 것은 강사보다 두 배를 공부하는 길이 있다’
전강식 때 보성스님께서는 힘든 길이지만 ‘무비일등(無比一燈)이 점천등(點千燈)이라’ 하셨다.
무비스님의 등불 하나가 천 개 만 개 등불이 번져 나갈 수 있도록 전강을 하는 것이지, 이 말법시대에 자격이 돼서 뭘 받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당, 전강을 했으면 계속 꾸준히 공부를 해야 되는데,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뜻이 있다.
발대서원(發大誓願)이: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불법을 내는 길이니
기심관광고(其心寬廣故)며: 그 마음이 너그러운 까닭이다. 심관광고라. 대원을 세운 사람의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악독하지 않다.
스승이 부처로 보이면 자기도 부처가 되고, 스승이 범부로 보이면 자기에게서도 범부가 보이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어른스님 바로 옆에 있으면서 스님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씀을 잘 드린다. 신기하잖는가?
어른스님은 사자 문수다. 가만히 이렇게 모시면서 보면 모든 하시는 일이 다 그러시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도 ‘참, 영광스럽다, 고맙다’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인자선근(忍自善根)이: 자신의 선근을 스스로 깊이 인식하고 제대로 알고 지혜롭게 판단한다.
인(忍)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 지(智)자와 똑같은 것이다.
완전 확실한 것, 자기를 승인하는 것, 확실한 지혜를 인이라고 한다.
중생을 알면 중생인(衆生忍) 법을 알면 법인(法忍), 무생을 알면, 무생법을 알면 무생법인(無生法忍), 자신의 선근을 알면 선근인(善根忍)이다. 스스로의 선근을 인식함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불법의 도를 내는 길이니
지업불실고(知業不失故)며: 업이 잃어지지 않음을 아는 연고이다.
*
일체겁(一切劫)에: 일체겁에
수행무염족(修行無厭足)이: 수행무염족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시출생불법도라. 온갖 겁에 하루종일 한 달 내내, 평생토록, 영원토록 수행하되 무염족이라.
화엄경에 많이 나오는 게 무피염심이잖는가.
무염족심 무염족왕도 나온다. 아나라왕(阿那羅王)이다.
무염족(無厭足), 물리지 않고 질리지 않는다.
맨날 숨 쉬는데 공기가 질리면 어떻겠는가? 맨날 먹는 물, 맨날 먹는 밥이 질리지 않듯이 맨날 공부하는 수행이 질리지 않는다. 일체겁에 수행하되 무염족이다. 그냥 늘 정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을 내는 길이다.
큰절에 같이 사는 학인스님이 있다. 율원 연구반에 있고, 저한테서 화엄경 대교도 공부한 스님인데 지난달에 여기 처음 내려와서 공부했다.
“스님, 제가 감각을 좀 잃어버린 거 같아서 스님이 화엄경 강의할 때 내려가서 공부 좀 하겠습니다.”
“매주 온다고?”
“예?”
“그럼 한달에 한 번 온나.”
그래서 지난달에 한 번 딱 왔는데 오늘은 어디 가 버렸다.(사실은 오셨음) 등치는 얼마나 큰지, 그러니까 그게 소임이다. 두 번 오면 그 스님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화엄경을 보면서 막 읽혀진다. 왜 안오노?
“어, 왔네? 없는 줄 알았더만. 자기 욕한 줄 알고 다음 주에 안 오겠다. 늦게 왔구나.”
그러니까 화엄경을 한 달에 한 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하루종일 앉아서 자기가 공부를 해야된다.
민망스럽다. 안 왔다고 욕 실컷 하고 나니 제일 뒤에 앉아 있다.
공부는 계속 끊임없이, 한 달에 한 번 우리가 여기서 하는 거지만 집에 가서도 계속하셔야 된다.
진미래제고(盡未來際故)며: 미래제가 끝나도록 하는 연고이니라. 언제 어디서나 세월을 잊은 마음으로 수처작주한다.
아승지세계(阿僧祗世界)에: 아승지 세계에
개시현(皆示現)이: 모두 나타남이니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이것이 불법을 내는 길이니
성숙중생고(成熟衆生故)며: 중생을 성숙시키는 연고다.
여기서 하나는 시간적으로 하나는 공간적으로 이야기한다.
‘아승지 세계에 몸을 나타낸다’는 것은 자비심이 있어야 된다. 자비심이 있는 분들이니까 한 집 두 집이 아니고 모든 집에 나타난다. 일불 이불 삼사오불 이종선근(而種善根) 이어무량(已於無量) 천만불소(千萬佛所)에 기도를 해야 된다.
부단보살행(不斷菩薩行)이: 보살의 바라밀행을 끊지 아니하는 것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불법을 내는 길이니 출생불법도니
증장대비고(增長大悲故)며:이것이 대비심이 일어난다.
바라밀도 그렇다. 베풀어 주지 않는 사람이 계율을 지킬 리가 만무하다. 계율을 잘 어기는 사람은 인내심이 없다. 인욕바라밀이 성취되지 않는다. 계율을 안 지키면 자기 욕심껏 성질머리대로 마음이 비좁게 살아간다.
계율을 안 지키는 사람은 인욕이 없고, 인욕이 없는 사람들, 탐진치에 끄달리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부지런할 수가 없다. 정진 바라밀이 안 된다.
계속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참는 것이 반복되는 정진을 함으로해서 서서히 우리에게는 삼매의 선정, 선나바라밀이 생긴다. 거기에서 본지풍광이 돋아난다. 반야바라밀이 일어난다.
다른 데도 그렇지만 화엄경 입법계품 같은 데도 보면 반야바라밀이 전체의 주를 이루고 있다. 그걸 반야도태라. 반야 바라밀로서 모든 것을 도태시킨다고 한다. 번뇌를 도태시킨다. 도태(淘汰), 쌀일 도(淘) 쌀 일 태(汰)자를 쓴다.
쌀을 조리질해서 건져낼 때 쌀만 건져지고 뒤에 남는 돌을 도태시킨다고 하지 않는가. 도태, 반야도태라.
결국은 반야바라밀에 정착하기까지 그전에는 무조건 베풀어 야 된다.
결론은 베풀어 주는 사람이 계율을 지키게 되고, 정직을 지키게 되고, 정직한 사람이 참을성이 있게 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 계속 반복해도 싫어할 줄을 모른다.
싫어할 줄 모르고 계속 끊임없이 정진하시는 분들에게 고요함이 증득되고 그 고요함 속에서 지혜가 증득된다.
본래부터 그런 것이지만 중생은 무명으로 덮인 까닭으로 한 거플 한 거플씩 벗겨내야 된다. 그렇게 바라밀을 정의해 놓는다. 화엄경은 거기다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십바라밀까지 더 해놓는다.
무량심(無量心)이 : 무량심이, 한량없는 마음이 뭐냐? 한량없는 마음, 헤아릴 수 없는 이 마음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불법을 내는 길이니
일념(一念)에 : 한 생각이
변일체허공계고(徧一切虛空界故)며 :모든 허공계에 두루한 까닭이니라. 일념에 변일체허공계인 연고이니라.
수승행(殊勝行)이: 수승행이, 꿈과 이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꿈과 이상이 다르다.
부처님을 닮아가는 훌륭한 행이 수승행이다.
열 번째는 수승한 행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제도할 때는 ‘위엄과 자비’ 두 가지로써 해야한다.
자비스러운 것도 있어야 되고 위엄도 있어야 된다.
원각경 첫 대목에는 ‘위엄이 지나치면 사람이 화를 내는 진노심이 돼 버리고, 자비가 지나치면 애착이 돼 버린다’고 나온다.
그 자비와 위엄을 부처님처럼 물방개가 물에 빠지지 않듯이 잘 갖춰야 된다. 그게 수승한 행이다. 이 수승한 행이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불법을 내는 길이니
본소수행(本所修行)을: 본래 닦은바 행을
무실괴고(無失壞故)며: 무실괴고다. 본행, 본원 ‘지장보살의 본원력과 본행력’이라는 말도 있다. 근본원력이다. 본원, 본행 이런 말을 기신론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정리해 놨다. 본행, 본원.
본래의 행원을 다른 말로는 본지풍광,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거기에 가닿기 위해서는 본원, 본행이 있어야 된다. 본래 닦은 행을 잃지 않는 연고다.
본래 닦은 행이 뭐냐? 근본행은 정직심이다.
진심, 부처님 행, 부처님의 닦은 바, 불소행찬 하는 것처럼 불소행, 보살이 닦는 바 행, 소행, 본소수행을 정말 깨끗하게 닦은 행위다. 훌륭한 행을 함으로써 더욱더 빛이 난다.
여래종(如來種)이: 여래의 종, 여래종이 여래의 종자 정반대는 패종(敗種) 썩은 종자라고 한다.
패종보다 더 심한 종자는 볶은 종자라고 한다.
볶은 종자는 싹이 나지 않는다. 무슨 싹이 안 나는가? 보리심의 싹이 나지 않는다.
보살행을 해야지, 보살의 길이 볶은 종자가 안 된다.
성문이나 연각 이승의 종자는 볶은 종자라 한다.
그러니까 이승의 종자도 안 되고, 완전히 범부 종자 중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 치우친 걸 갖다가 화엄경에서는 썩을 패자를 써서 패종이라 한다.
여래의 종자, 연꽃 같은 종자가
시출생불법도(是出生佛法道)니: 불법에 도를 내는 길이니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낙발보리심(樂發菩提心)하야 : 보리심을 내게 하고
이일체선법자지고(以一切善法資持故)라: 모든 착한 선법을 도와주고 유지하는 연고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대장부명호(則得大丈夫名號)니라 :즉득해서 그 사람은 대장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라. 菩薩의 十種大丈夫名號
佛子야菩薩摩訶薩이有十種大丈夫名號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名爲菩提薩埵니菩提智所生故며名爲摩訶薩埵니安住大乘故며 名爲第一薩埵니證第一法故며 名爲勝薩埵니覺悟勝法故며名爲最勝薩埵니智慧最勝故며名爲上薩埵니起上精進故며 名爲無上薩埵니開示無上法故며 名爲力薩埵니 廣知十力故며 名爲無等薩埵니 世間無比故며 名爲不思議薩埵니 一念成佛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得此名號하면 則成就菩薩道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대장부의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보리살타’라 이름하니 보리의 지혜로 생긴 연고며, ‘마하살타’라 이름하니 대승에 머문 연고며, ‘제일살타’라 이름하니 제일의 법을 증득한 연고이니라.
‘수승한 살타’라 이름하니 수승한 법을 깨달은 연고며, ‘가장 수승한 살타’라 이름하니 지혜가 가장 수승한 연고며, ‘상上 살타’라 이름하니 상품이 정진을 일으키는 연고며, ‘위없는 살타’라 이름하니 위없는 법을 열어 보이는 연고이니라.
‘힘의 살타’라 이름하니 열 가지 힘을 널리 아는 연고며, ‘같을 이 없는 살타’라 이름하니 세간에 견줄 이가 없는 연고며, ‘부사의한 살타’라 이름하니 잠깐 동안에 성불하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이름을 얻으면 보살의 도를 성취하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대장부명호(十種大丈夫名號)
*
그 사람의 덕행, 품격이 중심에 꽉 차면 그 고운 이름이 애써 찾지 않아도 여러 사람에게 다 알려진다. 낯선 사람도 그 이름을 다 알고 있다.
대장부 이름이 유가사지론 같은 데는 열여섯 분이 나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열 분 정도만 언급을 한다. 화엄경은 무조건 열[十]이다.
보살의 덕을 따라서, 그 사람의 덕을 따라서 지은 이름이 대장부명호다.
이번에 어른스님께서 어느 스님의 책 서문을 써주시는데 제가 같이 공부하던 스님이었다.
마음이 이각형인 스님이다. 삼각형도 엔간히 모가 났지 않은가? 사각형은 좀 덜 모나고 육각형도 있고 원만하면 제일 좋지만 그 스님은 자기한테 맞고 안 맞고에 따라서 왔다갔다 하는 이각형이다.
어른스님께서 이각형스님의 책 서문에 어떻게 써주셨냐면 ‘대심장부 모모스님’ 이라고 쓰셨다.
“스님 대심이라니요, 소심도 지금 안되는데요? 졸심 이렇게 써야 되는데요?” .
“아, 글이라도 이렇게 써줘야 그 스님이 자꾸 넓어지지.”
어른스님을 모시면 그런 데서도 배운다.
보살의 덕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다.
안에 중심이 꽉 차면 밖으로 향기가 난다.
복숭아도 다 익으면 바깥에서 단내가 솔솔 난다.
하다못해 풍선도 바람이 안에 들어가야 부풀어 오른다.
안에 쭈굴쭈굴 있으면 밖으로 단내가 날 리도 없고, 안에 빈 깡통 같은 게 있으면 밖이 푹 부풀 리도 없다.
여기서 대장부라는 이름이 바깥으로 탁 나올 때까지는 그 안이 채워져야 된다.
대웅이라는 말도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대장부도 화엄경에 나온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어떤 사람이 ‘단군이 대웅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은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 모신 곳을 대웅전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대웅은 영웅 중의 영웅, 킹오브더킹, 부처님이다. 경전 중의 경전 화엄경이라고 하듯이.
오늘 화엄경 소초를 다 번역하신 수진스님께서 새로 출간된 번역책을 가지고 화엄전에 인사하러 오신다고 하셨다. 제가 여가가 없어서 뵙지 못했다.
그런 분들은 참 보통 분들이 아닌 것 같다.
이번에 서울 무상사에서 의상조사 1400주년 기념 법문을 하면서 화엄경소초를 다 하셨던 스님들도 몇 분 초청되어 법문을 하셨다. 저도 말석으로 갔다왔다.
거기서 수진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법화경은 경중의 왕이다라고 하는데, 화엄경은 경중의 황제다’
경의 황제 화엄경, 그렇게 해도 외람되지 않은 것이 화엄경 화엄4조 청량국사가 소초를 다 쓰셨는데, 청량국사는 7대 황제가 왕사로 모셨던 스님이잖은가? 황제가 스승으로 모셨으면 황제의 스승이 보던 경은 ‘경의 황제’라도 무방할 것 같다. 경의 황제.
불자(佛子)야 :불자야, 전에 가서 보니까 수진스님께서 소초를 다 번역하시고 태산같은 원고를 이 책상만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계셨다. 그런 분들이 하신 말씀이니까 저는 옆에 있다가 ‘경의 황제’ 그런 말을 얻어 들은 것도 복이다 싶었다.
얼마 전에 갔을 때 각성스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 내가 스님을 테스트할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곤란하게 할라는 것도 아닌데 이거 한번 해석해 봐요. 스님 견해가 어떤지 내 한번 들어 보려고.”
좋고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어쩌든지 전해 주시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른 거 이제 많이 볼 거 없어요. 지금 보는 거 화엄경 쭉 계속 보면 다른 경전은 쭉 따라오게 돼 있다고, 내 말 믿어도 돼요.”
화엄경만 쭉 봐 버리면 금강경 천수경이 자동으로 다 따라온다는 것이다.
전에 은해사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이번에도 딱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
“강사는 선사보다 더 명쾌함이 있어야 강사를 하는데 강사가 시원찮으니까 아무렇게나 해석을 해 버리고 뜻도 모르고 해석해버리니까 선사들도 다른 사람들도 낮춰본다. 지식적으로만 해 버리니까 이상하게 됐지 않냐.”고 하셨다.
원래 대선사들은 경허스님으로부터 해서 동산 양개화상이나 위앙종의 위산 영우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황벽스님 같은 대선사들, 일자무식의 육조스님까지 전부 경을 충분히 보고 마음에 입지해서 해석해 낼 수 있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강(講)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하는 것이고 그런 자기의 소질이 있는 분들이 강사다. 강(講)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므로 선(禪)에 밀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중국 국청사는 천태지자 대사가 사시던 곳이므로 국청강사(國淸講寺)라고 아예 이름을 붙여놓았다.
중국 불교 강학에서 교학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천태학이고 하나는 화엄학이잖은가.
천태지자 대사께서 사시던 국청사라서 선사(禪寺)나 선원(禪院)처럼 아예 국청강사라고 현판을 걸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곳도 문수선원이 아니고 사실은 문수강원이다. 우리 회장스님인 입승스님께서는 항상 문수강당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주 올바른 말씀인 것 같다.
강당이란 말 자체가 부처님 법을 전하는 곳이다.
각성스님은 현존하시는 어른스님들 중에서 우리나라 제1강백이라고 누구나 자타 공인하시는 스님이잖은가. 그런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강은 왜 그렇게 강사가 중요하냐면 부처님의 경을 강의하는데 어떻게 선사보다 모자랄 수 있어요? 부처님의 경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강사가 자기의 마음을 어쩌든지 밝히기도 하고, 그 이치를 충분히 살펴서 경의 뜻을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설명을 해 나가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강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대장부명호(有十種大丈夫名號)하니 : 대장부의 이름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대장부 이름이 몇 가지냐?
대장부 이름 하나씩 하나씩 지어보는 것이다.
소위명위보리살타(所謂名爲菩提薩埵)니: 첫째 이름이 보리살타다. 보리살타. 보살이다. 그러니까 보살이라는 이름도 구체적으로 딱 얘기해 놓은 경전이 화엄경이다. 보리살타라 이름하니
보살지소생고(菩提智所生故)며 : 보리 지혜로 생긴 연고다.
명위마하살타(名爲摩訶薩埵)니 : 또 이름이 마하살타다. 보살마하살. 마하살은 뭐냐?
안주대승고(安住大乘故)며 : 안주대승이라. 대승에 머무는 연고다. 나 혼자만 성불하고 열반하는 게 아니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의 사람이라서 마하살타다.
명위제일살타(名爲第一薩埵)니: 또한 이름이 제일살타다.
증제일법고(證第一法故)며: 제일법, 견성성불을 증득한 연고이기 때문에 제일법,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제일법, 무상심심미묘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제일법, 최고의 으뜸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제일살타다.
그러니까 화엄경을 안 읽은 사람은 ‘제일살타’ 이러면 ‘지가 막 지어낸 말이다’ 하겠지만 화엄경을 읽어 보면 이렇게 제일살타가 나온다.
명위승살타(名爲勝薩埵)니: 수승한 살타라 이름하니
각오승법고(覺悟勝法故)며:수승한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승살타라고 한다.
*
명위최승살타(名爲最勝薩埵)니: 가장 수승한 살타라 이름하니
지혜최승고(智慧最勝故)며 :지혜가 가장 수승한 연고고
명위상살타(名爲上薩埵)니: 상살타라 이름하니
기상정진고(起上精進故)며 : 최고 으뜸가는 정진을 일으키는 까닭이라
명위무상살타(名爲無上薩埵)니: 위없는 살타라 하니
개시무상법고(開示無上法故)며: 이것은 무상법을 개시하기 위한 까닭이며
*
명위력살타(名爲力薩埵)니: 이름이 역살타라. 힘의 살타, 열 가지 힘, 부처님의 힘을 가진 것이다. 부처님 힘을 가지면 써도 써도 무궁무진해서 태양이 매일 그냥 이렇게 뜨는 것처럼, 바람이 매일 부는 것처럼 끝없이 무궁무진하다. 그런 것이 십력이다. 충분한 십력이다. 열 십자라고 하는 것은 원만 완전무결한 힘이다라는 뜻이 있다. 부처님의 힘은 그렇다.
광지십력고(廣知十力故)며 : 광지십력고라. 열 가지 힘을 널리 아는 연고라.
*
명위무등살타(名爲無等薩埵)니:이름이 무등살타라, 같을 이 없는, 무등등주할 때 무등살타라 하나니
세간무비고(世間無比故)며: 세간에 견줄 수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등살타라. 무비살타.
명위부사의살타(名爲不思議薩埵)니 : 이름이 부사의살타라. 마지막에 회통하면서 열 번째는 부사의살타라.
그래서 화엄경을 부사의경이라고 한다.
부사의경을 일승별교(一乘別敎)라 한다.
원돈성불(圓頓成佛)할 때, 돈교(頓敎)위에 원교(圓敎)라고 한다.
원교에 와서도 일승법화경은 동교(同敎) 같을 동(同)자 가르칠 교(敎)자를 써서 동교라고 하고, 화엄경은 원래 가르침은 화엄 일승별교라고 한다.
아무나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세주묘엄품에도, 입법계품에도, 십지품에도 그렇게 나온다.
어떻게 나오는가?
십지품에도 해탈월보살이 “법문 좀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금강장보살이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난승지(難勝地)현전지(現前地)원행지(遠行地)부동지(不動地)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 법문 끝”해버린다.
“왜 이름만 이야기하고 그 내용은 얘기 안 합니까? 지목을?”
“지목을 하나하나 분석해서 얘기해주면은 법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삼세제불이 이 법을 다 닦았는데 너희는 법문을 해줘봤자 알아듣지도 못한다. 눈이 지금 안 보이는데 안 보이는 사람에게 글자를 영어를 쓰든지 빨간 걸 쓰든지 노란 걸 쓰든지 아무 의미 없으니까 너희하고는 해당이 안돼, 그만 가.”
“우리는 마음이 청정하고 법문들을 태세가 되었습니다. 법문 해 주십시오.”
“아이 그거 귀찮다니까 가라니까.”
세 번을 청해도 가라고만 했다.
“너희는 법문들을 화엄경 법문 들을 이치가 없어.”
금강장보살이 법문을 안 해준다고 했다.
대중이 떼거리로 와서 법문을 해 달라고 해도 안 해줬다.
부처님께서 가만히 있다 “해 줘라.”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럼 법문 해줄게” 한 것이 십지법문, 환희지부터 나오는 법문이다.
입법계품에 가면 그런 것을 또 해놓았다.
일승별교(一乘別敎)의 법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법문을 다 해줬는데도 다 똑같은 자리에 참석했는데도 경지가 되는 사람들만 알아듣는 것이다. 보살경지의 사람들만 부처님의 사자빈신삼매 속에서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에 방광하는 그 장엄한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돈교(頓敎)부터는 부사의 법문이라.
점교(漸敎)에서는 삼승점교에서는 말로 하고 문자로 쓰고 설명도 하고 이런 게 침을 튀어 가면서 얘기를 하지만, 돈교부터는 소리를 치든지 안 하든지 돌아서든지 돌아서서 염불하든지 물구나무서서 하든지간에 여기서부터 도대체가 도장 쾅 찍는 것부터 해서 무시무종이다. 처음도 끝도 없고 앞뒤도 없고 관고금하고 무두무미하고 검기는 칠흑보다 더 검고 밝기는 태양보다 더 밝다. 그런데 도대체 눈이 깜깜한 놈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거기서부터는 돈교이다. 돈교보다 더 뛰어난 것이 원교(圓敎)가 아닌가?
원교로 들어오면 법화경에는 그래도 회삼승귀일승이라. 삼승을 회통한다. 모두 다 함께 가자 하는 동(同)자가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일승별교로 딱 설해버리니까 근본법회에서, 대중이 도대체 알아듣지를 못한다. 문수, 보현이나 알아듣지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정말 못 알아들으니까 여농여맹이라. 눈먼 사람 같고 귀먼 사람 같다. 화엄경에서 동교(同敎)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수준을 부처님의 입장으로 올려서 하기때문에 별교다.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십지법문을 듣는 것이 이세간품이다. 이세간품, 입법계품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십지법문을 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보살의 입장에서 십지법문을 하는 것은 십지품이다.
특히 세주묘엄품 같은 경우 거기에서 나오는 십지법문이라든지 이러한 것들, 부처님이 시성정각하는 법문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부처님의 입장이기 때문에 일반 범부는 해당 되지 않는다.
허공의 모습이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처럼 끊어졌는데 자꾸 모습과 이름을 따라가는 중생의 입장, 명자를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해당이 안 된다. 그래서 ‘입부사의해탈경계(入不思議解脫境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이렇게 이야기하잖는가.
부사의란 말 자체가 돈교 이상 원교를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다.
부사의살타라 이래 버리면 화엄보살이다 이 말이다.
화엄보살,
화엄을 빼고라도 여래보살이라고 보면 된다.
부사의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입장을 붙여서도 불부사의법품이 있다. 화엄경에 불부사의법품, 거기부터는 묘각이다.
부사의한 것 말고 일반적으로 명사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사의(思議)라고 하잖는가. 생각 사자 의논할 의자. 논리할 때 의자.
사의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설하느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설한다.
부사의(不思議)는 누가 설하시느냐? 부처님께서 설하신다.
어떻게 설하시느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라, 한 글자도 없는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한 글자도 없는 가운데서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설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부사의살타라.
어린 애들은 밥을 못 먹으니까 씹어서 이유식을 먹이고 우유를 먹인다. 우리도 그런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다. 돌덩이 같은 것은 씹을 수가 없다.
그 돌덩이가 들어와도 다 녹여버리고 무장무애가 된 것이 부사의해탈경계라, 부사의살타다.
무등살타도 굉장하지만 부사의살타 이것은 마지막에 부처님의 결과를 가지고 살타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앞부분까지는 바라밀행의 꽃의 냄새라든지 이런 걸 가지고 한다면 여기서부터는 열매가 완전히 무르익은 걸 가지고 부사의살타라고 하였다.
부사의살타가 되면 다음 생을 기약하더라도 계속 그 종자를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사의살타 이것이
일념성불고(一念成佛故)라 : 일념성불고니라. 거기 나왔잖은가. 일념성불고니라.
중생성불찰나중이다. 화엄경이 이 정도로 치밀하게 해놨다.
그러니까 삼승원융이라고 청량국사의 삼승원융관에 보면 삼승원융이라고 볼 때 삼승이 원융한데 비로자나가 바로 문수고, 문수가 바로 비로자나고, 문수가 바로 보현이다.
원융하다는 것은 서로가 구분 없이 똑같이 녹아있는 것이다.
밤의 허공이나 낮의 허공이나 똑같은 허공이듯이 완전히 원융되어 있다.
그것이 안 나타날 때, 본체로 돌아갔을 때는 비로자나법신이라 하고, 바깥으로 현신해서 나올 때는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가 되든지 문수, 보현으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시위십(是爲十)이니: 시위십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약제보살이
득차명호(得此名號)하면: 이 명호를 얻는다 하면 그 사람에게 걸맞게 대장부 이름을 얻는다면 보리살타 이름을 얻는
즉성취보살도(則成就菩薩道)니라: 보살도를 성취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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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처서가 지나고... 가을이란 단어가 어찌나 반갑던지요. 애쓰셨어요.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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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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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중심이 꽉 차면 밖으로 향기가 난다 복숭아도 다 익으면 바깥에서 단내가 솔솔 난다. 하다못해 풍선도 바람이 안에 들어가야 부풀어 오른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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