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은 나에게 자가용보다 더 친절하고 유익한 반려자다. 전철 만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교통 수단이 또 어디 있으랴. 어쩌다 회식 자리에 가면 술을 권하면서 차 가져왔느냐 물으면 의례 “그럼 가져왔지. 그런데 지하로 다니는 아주 큰 차야” 하면 모두 박장대소한다.
전철을 탈 땐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평생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한 나름대로의 자부심으로, 고마워하면서 당당히 무임승차한다. 하루하루의 일기 변화가 있듯이 그 날의 승차 기분이 천차만별이다. 여름은 냉방 겨울은 온방, 거기다 경로 우대에 전용석까지 선진국화 돼가는 우리 제도가 자랑스럽다. 언제 이런 선진국 수준에 왔나 하는 대견함도 있다. 사실 화장실 문화는 세계 첨단이며 전철 시설도 선진국 수준이다.
제도가 이쯤 선진화 되었으면 승차 문화와 민도도 따라야 할 터인데 정반대의 현상이 안타깝다. 왜곡된 웰빙의 이기적 타산적 사회풍조의 간특함이 갈수록 심해지니 한심하다.
오늘은 전철 안에서 참으로 싸자지 없는 광경을 목도 하고 마음이 처연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무엇보다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 싸가지의 어원은 사가지의 경음화에서 온 합성어인가 싶다. 싸가지라는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적어도 네 가지(四 가지) 즉, 인격 사랑 교양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전철 좌석은 경로자, 임산부,지체장애자 등을 우대하는 전용좌석이 있다. 대개의 경우는 지켜지나, 간혹 젊은 파렴치한이나 얌채족이 안하무인격으로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간혹 목불인견의 진풍경도 벌어진다. 나는 이제까지 서양인이 이 특별석에 않아 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거기에는 영어로 reserved for disabled, senior sitizen and pregnant women’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가 철면을 쓰고 않아 있는 모습을 종종 볼 때 안타깝다.
우리 전철은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서울을 거미줄처럼 방사선으로 얽어놨다. 그 중에서 가장 혼잡한 곳이 2호선이다. 나는 오늘 케케하고 시큼 털털한 2호선 전철을 탓다. 비릿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니 경로 임산부석에는 30대 중반의 딸과 70대 중반의 부모가 앉아 있다. 나는 등산 캐주얼복으로 딸 앞에 엉거주춤 섰다. 딸은 나를 힐끔 보더니 태연히 앉아서 가운데 앉은 애비와 신나게 조잘거리고 옆의 에미는 가끔 끼어들어 참견한다. 나는 딸을 보면서 아마도 장애자려니 하면서도, 유심히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아무리 보아도 사지가 멀쩡한 건강한 여자인 것같았다.
나는 전철 안에서 어지간하면 방관자다. 때로는 직무유기가 아닌가 자책도 한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언젠가 나는 전철 안에서 노인이 건장한 청년을 무안할 정도로 망신을 주는 걸 보았다. 그 청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면서도 무반응이었다. 다음 역에서 그는 내리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야단치던 노인은 그 중증 장애 청년을 부추기며 정중히 사과하는 광경을 보았다. 또 한 번은 풍성하게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어느 할머니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몸을 일으키는데 산 달이 가까운 임산부였다. 할머니는 그 좌석에 덥썩 앉았는데 마음은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주의의 시선은 일제히 할머니에 쏠렸다. 그런 황당한 일을 목격한 나인지라 좀처럼 끼어들지 않고, 이 여자도 아마 장애인인가 보다 하고 서있었다.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몰지각한 경솔한 노인도 문제다. 출퇴근 초만원 지옥철에서 출동명령 받은 공수대원 같은 산업 역군 틈에서 별로 급할 것도 없는 노인들이 자리 기웃기웃하는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안타까운 연민의 정까지 느껴진다. 이런 시간대는 되도록 젊은 이들을 위해서 승차를 삼가는 아량쯤은 베풀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근래 나이 든 것이 부끄러워 젊은 척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나이 값도 못한다는 환청이 들리는 듯해서다. 그래서 주로 캐주얼을 좋아하고 친구 간의 일상어나 행동거지도 일부러 좀 유치할 때가 많다.
마침 서울대역에 전철이 멈추자 80대 남자 노인과 그 뒤에 70대 중반의 여자 노인이 경로석 쪽 문으로 올라탔다. 타 보니 콩나물시루가 아닌가. 마침 앞의 조잘대는 삼십대 중반의 여인을 보고 눈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여봐 젊은 이, 일어나, 이 할아버지 앉혀드려.”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말꼼히 바라보는데 옆의 두 애비 에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맞은 편의 60대 중반의 노인이 벌떡 일어나면서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하니 할머니는 잽싸게 가서 털썩 앉고, 할아버지는 내 옆에 엉거주춤 겨우 서 있게 되었는데 아마도 눈과 귀가 어두우신지라 그 상황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딸이 하는 말, “아빠 참 웃기지, 할머니 생각나네, 우리 할머니도 동네 남의 일에 참견 잘 했지?” “그럼, 그래도 너의 할머니는 저정도는 아니셨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참견 안하셨어.” “이 양반 봐 할머니는 더하셨어유. 거기다 노망까지 겹쳤다구유.” 하고 할망구가 끼어들었다. 싸가지들의 대화가 덜커덩 덜커덩 전철 소리에 장단 맞춰 계속되는 도중에 노인이 기우뚱하면서 손잡이를 놓쳐 싸가지 딸년 앞으로 넘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노인을 순간적으로 부추겨 세우면서 나도 모르게 폭발했다. “할아버지 꼭 잡으세요, 여기 퍼질러 않아 있는 젊은 딸 앞에 쓰러지시면 이 사지가 멀쩡한 젋은 귀한 딸 다치세요. 꼭 잡으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그들의 있을 법한 도전에 응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번에는 그 싸가지 없는 애비 에미에게 고강도의 융단 폭탄을 투하하려는 임전태세였다. 내 소리가 격했던지 여기저기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술렁대면서 “킥킥 저런저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역에서 허겁지겁 하차하는 세 싸가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려봤다. 나야말로 싸가지는커녕 나이 값도 못하는 위선자가 아닌가 하고 자책하니, 공연히 면구스러워 다음 역에서 내려 다른 차에 올랐다.
눈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 무지몽매한 분들을 왜 좋은 말로 계도하지 못하고 극단적 칼날말로 상처를 주는 늙은 광대(廣大) 노릇을 했을까 하고 자책했다. 나아가 정신문화와 민족혼의 기수라는 우리 문단의 싸가지 없는 문인들의 가관이 뇌리를 스쳐갔다. 겸손과 인격과 철학이 결여된 싸가지 없는 천둥벌거숭이 애숭이 문인에 비하면 오히려 동정이 갔다.
나의 발광은 누구를 향한 외침인가 여기 철면피 싸가지 없는 세 사람인가, 전철 지붕인가, 청맹과니(靑盲과니) 세상인가?! 그렇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 대한 폭발이다. ‘이럴수가’ 하는 순간적 울분의 광기었으리라.
교통문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정신문화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 유교문화의 효친 사상과 장유유서의 전통사상을 파괴한 주범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이번에 유엔 기구에서 발표한 국가 쳥렴도 서열에서 필란드가 1위, 우리나라는 42라고 한다. 정신문화 청렴도가 물질문화 청렴도를 계도하는 것이 순리요, 그렇지 못하면 기형이요 불구다. 세계 경제 대국 13위권에 든다는 우리의 정신문화의 현주소가 여기란 말인가. 어그리 웰빙이 빚어낸 기형일까 불구일까. 우리 기성 지도층의 냉엄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싸가지에 대한 투명한 정답이 왜 없으랴.
정답 앞에서 저울질하는 사이비 영웅들이여
비겁한 무관심은 도미노이면서 백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나부터 탈을 벗고 인간이 되어야 하겠다.
(수필춘추 06년 12월호)
첫댓글 선생님 글을 여기서 계속 읽으니 기쁩니다. 싱긋^^
글을 읽고 나서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잠겨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속이 시원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 숙고하는 자세로 잘 보았습니다.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한수 배워갑니다! 나영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