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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사마리아인 교사
루카복음 17장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한꺼번에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마태복음 8장에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치유 받은 그 나병 환자처럼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들도 그처럼 예수님의 손길에 터치되어 치유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격리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피할 때 그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 뉴스였을까요.
그들이 간절한 마음에 예수님, 스승님 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시어 손을 대고 치유의 말씀을 해 주시어 자기도 낫게 해 줄 것을 기대했었지만 예수님은 멀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너희 몸을 사제에게 보이고 모세가 얘기한 그것을 증명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을뿐입니다. 율법에는 나병에 걸렸을 때도 제사장에게 선고를 받듯이 역시 나았을 때에도 그 제사장의 선고를 받아야 정상인으로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이 낫지도 않았는데 왜 제사장에게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고, 속으론 불평이 쌓였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가까이 오시지도 않고 직접 손을 대어 치유해 주지 않는가? 만져주시지도 않고 치유의 말씀도 없이~~.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그 나병환자처럼 그 모습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도중 한 두 사람씩 나병이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중 아홉 명이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들의 병고침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가까이 오시지도 않고 손을 대지도 않았으며 깨끗함을 입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기에! 그들은 나병이 원인 없이 우연히 왔던 것처럼 지금 나병 또한 우연히 떠나갔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은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2000년 전 이 사건은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나병이 하느님의 죄를 상징하는 이유는 살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듯 우리도 죄를 범하고 심지어 죄를 지을 때조차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고리대금업자, 마약 중독자,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사람, 간음하며 바람을 피울 때, 이들은 죄의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아홉 명의 나병 환자에 속합니까? 아니면 돌아온 한 명의 나병 환자입니까? 당시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치유 받으러 감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 따라 고침 받았음을 선언 받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로 그들이 소리치며 애원했을 때 예수님 대답은 이미 선포와 동시에 치유되었으니 가서 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 선포와 동시에 치유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마태 8.8절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그 맥을 같이합니다.
백인대장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수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종이 나았다고
"내가 10명을 고쳐주지 아니했느냐? 그러나 어찌하여 너 이방인 외에 다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물음에 비추어 볼 때 돌아오지 않은 9명의 나병환자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질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애석함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아홉 명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여기지 않기에 감사할 생각조차 없었고 병이 나은 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고정관념의 눈이 열려 유대인 선민사상에 젖어 동료였던 사마리아 사람과 대척점으로 분리되어 다른 길을 갔습니다. 아홉 명은 자신들의 신원 회복을 위해 법정으로 내달렸고 한 명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러 본체이신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저주의 병에서 구원받았음을 예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치유 받은 10명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 나병 환자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했던 것입니다. 치유 받은 사마리아 나병 환자는 자기를 낫게 하신 지극히 위대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감사하며 시인한 단 한 사람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유대인 이었습니다.
이는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보다 우리 열심인 신앙인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우리보다 선한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감사할 줄 아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닐까요?
고로 우리는 직시되지 않은 즉각 확인되지 않은 응답에서도 감사드릴 때 가다가 나병이 낫듯이 우리는 참 기적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 사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수녀님이 책임자로 계신 공동생활 가정 공동체에서 불쌍한 정신 지적 발달장애우 자매를 받아들여 돌보고자 하나 그 가정이 너무나 가난해서 월 이용료 20만 원을 낼 수가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수녀님이 제게 전해 오셨습니다. 후원자를 연결해 달라고. 일단은 "예, 알았습니다. 저는 힘이 없지만 기도하겠습니다. 그분께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후원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몇 분께 전화통화로 또는 문자로 부탁을 드렸지만 당시에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동생이 하는 조그만 개척교회로 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응답받았습니다. 내면에서 예수님 말씀이 들리는듯 했습니다.
'디에고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려 그 수녀님을 통해 네 영혼의 문을 두드렸건만 너는 왜? 그 복을 남에게 주려 하느냐!" 그때 결심했습니다. '‘맞아, 나도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로 국가로부터 매월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그 누구도 가족조차도 돌볼 수 없는 그 불쌍한 자매를 위해서 매월 내 수급비에서 20만 원씩 지불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수녀님께 다음 날 즉시 전해드렸습니다. "수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자매 월이용료 후원할 분을 하느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기적이라시며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휴대폰이 울려 받아 보니 제가 몸담고 있는 ‘빈첸시오 한국 이사회’의 김인태 야고보회장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형님, 형님 메시지를 이제야 보았네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자매님 이용료는?" 내가 사유를 설명하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왜! 그것을 형님이 하십니까? 빈첸시오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사무장에게 얘기해 놓을 테니 형님이 하지 마시고 우리 사무장에게 연락해서 후원 계좌번호를 알려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기도하였지만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려 제사장에게로 달려간 아홉 명의 유대인 중에 한 명이 아닐까 반문해 봅시다. 루카복음 착한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타인의 유익을 위해 봉사한 착한 사마리아인, 감사할 줄 아는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처럼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또 강도 맞은 이웃을 외면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길 반대편으로 간 사제와 레위인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현실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일단 예수님 말씀에 순명하면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비록 나병에 걸렸지만 예수님을 속으로 인정했을까요?
그들은 마태복음 8장에서 나오는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소문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그들이 떼로 몰려갔지만 그들은 예수님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찍이 서서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멀찍이서 “가라,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당시 율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그들이 사제에게 갈 수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레위기 규정대로 ‘나는 부정하오, 나는 부정하오.’ 외치며 수염을 가리고 격리되어 있어야만하는 나병환자가 병도 낫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어떻게 사제에게 다가갑니까? 그래도 일단 그들은 갑니다. 왜냐 달리 어찌 해 볼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들의 심정은 이러했을 겁니다. 나병에 걸려 죽으나 돌에 맞아 죽으나 희망이 없으니 가라 하는 한마디에 그냥 발길을 예수님의 말씀하신 방향으로 돌렸을 뿐인데 가는 도중 모두 병이 나은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 말씀에는 즉시 순명함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가라 하는 순간에 그들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홉 명과 한 명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갈라섰습니다. 병이 치유되고 나서 보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의 신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적대적으로 분리가 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않습니다.
병들어 함께 격리되어 생활하던 문둥병 공동체에서 치유되고 나니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 분리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적대자인 예수에게 갈 필요가 없었고 또 속으론 직접 치유해 준 것도 아닌데하며, 예수에게 감사하러 갈 마음조차 없었겠지요.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어떻게 그들과 함께 제사장에게 갈 용기가 생겼을까요? 나병환자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함께 살았던 저주받은 동질의 병자들로서 동료 의식과 연대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초록은 동색이니까. 동안의 나병환자로서 함께 구별없이 살았던 정과 연민이 있었기에 사제에게 다가갈 용기가 있었지만, 모두가 나병에서 치유된 이후에 이들의 나병 환자 공동체는 치유와 동시에 분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너는 너, 나는 나 나는 선민 유대인, 너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 그래서 치유 받기 전 동거동락했던 10명의 나병 환자 공동체는 9대 1로 분리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할 때 셋방살이 하며 한 방에서 일곱 여덟 명이 화목하게 살던 그때는 서로 아끼고 양보하며 부모에게 감사하고 사랑받으며 성장했던 가족들이 부모의 양육과 교육, 시집장가 보내 주는 그 헌신을 통해서 가난해서 벗어나 경제적 사정이 호전되고 어른이 되어 부자가 되고 아쉬울게 없어지면 누구 하나 늙은 부모를 찾아가 감사드리는 자녀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건강하고 잘 살 때는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예수님께 감사 기도할 겨를도 없지요. 누리고 제 하고 싶은 것 하느라고 자녀가 잘 살 때는 부모를 외면하고 삽니다. 사업이 파탄나고 사고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 우리는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찾습니다. 부모님을 찾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기꺼이 손잡아 주십니다. 부모님 또한 배은망덕한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라지 않고 오셔서 병실에서 쪽잠을 주무시며 자녀를 간병하십니다. 어느 부모는 버려진 손자 손녀를 허리에 병을 얻어가며 돌보아 주기도 하십니다.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간절히 예수님께 부르짖던 나병 환자의 그 초심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무조건 순명합시다. 내 뜻이 아니라 마태복음 8장에 그 나병환자처럼 내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에 나를 맡깁시다. 마태복음 8장 2절 말씀입니다 그때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이 바로 마태8장에 등장하는 한 명의 나병 환자가 받은 진단이었습니다.
루카17장 열 명의 나병 환자 사례에서 '너 말고 다른 아홉 명은 어디로 갔느냐? 그들도 낫지 않았느냐?"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대비!
"디에고야!. 너는 어디 있느냐?" 하는 예수님의 애타는 부르심에 치유받고 등돌린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 처럼 피하지 말고 얼른 뛰쳐나와 무릎꿇어 감사 기도드리는 사람으로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나도 구원받은 나병환자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된 축복의 말씀의 주인공이 됩시다. "디에고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복음 10장 25절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수님 비유 말씀은 이웃 사랑의 모델입니다. 율법학자가 주인공으로 되고 싶어했으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그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가장 큰 계명 (루카10~25-28)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29-37)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복음 17장 열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치유 받은 이야기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그 모델이 되었습니다. 두 이야기는 한 쌍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주인공 모두 당시의 유대인으로 열심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그 구원의 주인공들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은 구원의 표본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내 영혼에 질문을 던집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외면한 그 사제와 레위인. 나병을 치유받은 9명의 그 유대인들은 다 어디 가고 이방인인 너 사마리아사람 한 사람만 왔단 말이냐?
디에고야! 가서 그들도 데려오너라. 답은 내가 곧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신 나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해낼 수 있습니다. 성체 나눔의 정신으로 나를 그들에게 내어주면 나머지는 예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그럼 복음사가 루카가 이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는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에 이 기록은 믿음이 모호한 시절 유일신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재해서 살던 1세기, 곧 모두가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 살던 바로 그 시절 복음사가 루카는 용기있게 바로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 환자의 감사 고백을 통해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구원에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대변되는 제사장에게 간 아홉 명이 아니라 치유자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온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그 암시였습니다.
이 말씀 대목을 통해 진정 믿고 우리의 심장을 걸어 놓을 곳은 어디인가? 어느 사람은 자신의 심장을 돈에 걸어 놓고 삽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심장을 권력을 쫓는데 걸어 놓습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누구는 도박에, 마약에 자신의 심장을 얹어 놓고 삽니다. 심장은 곧 양심이기도 합니다. 돈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남을 짓밟고 비방하며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보험금 노린 청부살인, 정적 제거 암살 등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심장을 예수님께 걸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나의 심장을 얹어 불태웁시다.
그럴 때 양심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죽기 전 나도 두봉 레나도 주교님처럼 남들 앞에서 '나는 떳떳해요.' 하고 소리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겨 드리며 그분 뜻에 순종하는 삶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사즉생 생즉사 죽기를 각오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타적 삶은 여기가 천국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나로 인하여 내 곁에 있는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사는 것이 되니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렇듯 말씀에 즉시 순종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로부터 sos 긴급한 부탁을 받으면 능력은 없지만 노(NO)하지 않습니다. 첫 마디가 "예, 알겠습니다. 저는 힘이 없으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필리피서 4장13절 말씀을 의지합니다. '나에게 힘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저는 이 기도로서 치유받은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소리에 귀기울여 행동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례 한 가지를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문둥병 환자가 예전부터 기거하던 시설 지금은 몇 분 안 계시기에 지적발달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보름동산'이 있는 영주 다미안 공동체 어느 수녀님의 부탁. 빔 프로젝트 사건입니다. (내용은 구술로 발표) 홍스텔라 아들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복음 말씀을 통해 봉사자인 나에게 세 명의 스승으로 사마리아인을 보내 주셨습니다. 정상적이라 여기는 유대인들이 비하하고 강아지처럼 여기고 사람대접 해 주지 않던 그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들. 그들이 상종하지 않았던 원수가 봉사자인 저에게는 삶의 모델입니다.
지금 여러분 주변에 원수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미워하며 원수라고 지칭하는 그 사람이 진정 나의 원수일까요? 혹시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의 원수가 아닐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비방하는 그 원수가 도리어 내가 먼저 다가가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손길을 느꼈을 때 심정으로 그들을 손잡아 주고 화해해서 보듬어 안아 주어야 할 참 이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짜 원수가 아닌데도 내가 원수로 지목해 놓고 손가락질을 하며 판단의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난민들, 또는 무국적 추방자, 불법 체류자, 성향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정치색이 달라서 원수로 여기며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이념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한 가지만으로 그들을 원수 삼아 미워한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는 내가 지정해 놓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라는 이름으로 내가 뒤집어씌워 놓은 혐오와 배제를 이제 예수님 복음의 사랑으로 벗겨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은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원수는 누군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에게 원수는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부끄러운 얘기 한 가지를 고백합니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나의 대자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원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몇년 째 그와 단절된 지옥을 살고있습니다. 결과는 나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지금 난 그를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자의 단맛에 취해 어찌보면 그의 악한 일을 밀어주고 부채질하여 더욱 그를 예수님과 멀어지게 한 그에게 있어서 영적으로는 내가 그의 원수가 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반문해 봅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관념과 생각 속에서 돌아오지 않은 돈의 잣대로 그를 원수로 만들고 나는 수시로 그를 미워하며 판단의 죄를 반복하여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덮어씌운 원수의 탈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벗겨내 주고 그에게 용서를 청하며 내 자신은 그 교만한 유대인의 나병에서 치유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역시 오늘 강의에 등장한 세 명의 사마리아인과 동일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과 동전 한 닢을 찾는 마음으로 우리를 불러내어 구원해 주셨으며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늘 이런 식으로 경계 밖에 있는 소외된 이웃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분은 불가능과 한계에 봉착한 우리가 찾기만 하면 팔 벌려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의 사마리아 사람은 봉사자인 내가 본받아 배워야 할 스승입니다. 세 분의 사마리아인 스승을 간략히 다시 한 번 요약하며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 마태복음 8장 1에서 4절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 나병 환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한 회복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요구가 아닌 막상 예수님께 다가갔을 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께 내어 맡겨 드렸습니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온전히 내맡긴 겸손함을 봅니다. 그에게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어찌 보면 이 치유받은 나병 환자 사마리아 사람은 드러나지 않는 복음 선포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 이 소문을 듣고 나병환자들이 10명씩이나 떼로 몰려왔으니1!]
두 번째. 루카복음 17장 11절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자신들과 같았던 나병환자 그가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아 사이 마을에 들어가실 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떼로 몰려와 멀찍이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쳐 대었습니다. 가는 도중 병이 모두 나은 유대인들은 병을 고쳐준 의사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새롭게 회복시켜 줄 신분을 되돌려 줄 제사장을 찾아 법원으로 달려갔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은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세 번째 루카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여행객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은 정작 하느님 사랑을 설교하고 실천해야 할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만을 위해 시체에 다가가면 부정탈 것이라는 율법에 따라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그 강도당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이웃을 못 본 체 외면하고 길 반대편으로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참봉사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이는 곧 이웃 사랑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마침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저희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저희의 자녀다운 마음을 열게 하시고, 성모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한 후안디에고를 본받아 저도 당신의 뜻을 실천하게 하소서. 또한 마리아와의 만남을 통하여 너그럽고 온전한 마음으로 저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함으로써 참된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버림받은 이들 안에서, 몸과 마음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 안에서, 또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게 하시고, 그들이 인격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살아있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