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 시제 "화부화(花復花)"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관련된 이에 얽힌 이야기를 전재합니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선생은 본관이 평강(平康)이며, 호는 번암(樊巖)이다.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아들로 홍주에서 출생하였고, 1743년 문과 정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폐위를 거론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1771년 호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예조 판서를 지내고,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1793년 영의정에 오르는 등 10여 년간 재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였다. 당파에 온건히 대처하여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못하도록 한 공이 후세에 전해지며,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임금은 과거 시험을 치룰 때 매번 흔하지 않은 책에서 아무도 모르는 과제(科題)를 내어 시험을 보였다. 한번은 '화부화(花復花)'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내고 싶었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 후 채제공(蔡濟恭)이 죽자 정조는 다시 이 제목으로 문제를 내기로 하였다. 영남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다가 용인에서 날이 저물었다. 하룻밤 자고 갈 집을 찾다가 한 노인이 살고 있는 집에 묵게 되었다.
그 날 밤 노인이 말하기를, "금번 과제는 '화부화(花復花)'일 것이니 그대는 그 것을 제목으로 과거시험 준비를 하시오.” 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뜻을 모르자 선비는 어떤 책에 나오는 글이며, 또한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화부화(花復花)는 목화(木花)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목화는 꽃이 피는 것은 물론이오, 꽃이 지어 솜이 되어도 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여 과제를 보니 바로 '화부화(花復花)'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다른 선비들은 모두 그 뜻을 몰라 붓방아만 찧었으나, 그 선비만은 당당히 제일 먼저 답안을 제출하였다. 정조가 시험 답안을 살피던 중 자기가 의도한 대로 답안을 낸 자가 있어 급히 불러 묻기를, "자네는 누구이며 어느 누가 그 뜻과 제목을 가르쳐 주었느냐?" 하자, 선비는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임금이 다시 그 노인의 용모와 사는 곳을 물으니 용모는 채제공이요, 사는 곳은 그의 무덤이었다. 임금이 감탄을 하며 말하기를, "채제공은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하였다. 체재공의 묘 앞에는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은 '채제공 선생 뇌문비'를 모신 각(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