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인기프로그램 라디오께임
진행장면이다. 학교 퀴즈프로그램의 원조다.
박종세 아나운서 김석호프로듀서, 학교 선생님들과
출연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55년의 세월이 흘러 20대의
박종세 아나운서는 80대 중반이 되었고 김석호 프로듀서는
고인이 된지 오래다, 학생들도 70대가 되었다. 이 사진
속에 나온 학생들은 물론 그 시절 이 프로그램을 기억
하는 분들에게는 더 없는 추억의 장면이다.
1960년대의 KBS라디오 게임과 박종세 아나운서 PD 김석호 이상익
라디오게임은 1959년 편성되었다가
60년 5월중단된후 1961년 9월부터 학교단위
단체전으로 재 출발한 프로그램이다. 남산방송국의
제1연주실에서도 공개방송을 했지만 각 지역 학교까지 순회
하면서 실시한 공개방송으로 대부분의 중, 고등학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중,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라도꼭 중고등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성인들 간에도 많은 청취자들이 있었다. 원래는 각 팀에서
한사람씩 교대로 나와 퀴즈문제에 도전해서 많은 정답을 맞힌 학교가 승자가
되는 방식이었는데 1962년 3월부터 양팀에서 대표선수가 한명씩 동시에
등단 계속되는 힌트에 따라 먼저 답을 알아차린 측에서 부자와
벨을 눌러 답을 맞히는 식으로 진행 되었다.
김석호, 이상익 프로듀서가
오랫동안 담당했고 아나운서 진행은 최세훈,
박종세 아나운서가 맡다가 이분들이 민영방송으로
옮긴 뒤에는 이규항, 김재영 아나운서가 그리고 기술은
홍기봉, 박규진, 고흥복 님이 맡았다. 오늘 사진은 박종세
아나운서가, 음향은 담당 프로듀서 이상익님 께서 제공
해 주셨다. 오늘 들으시는 목소리는 이 프로그램을
마지막까지 맡았던 김재영 아나운서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방송, 야구, 그리고
나의 삶」에서 라디오게임에 관한 자세한 얘기를
써 놓으셨기에 그 글을 옮긴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2015년 6월 21일 최세훈아나운서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라디오게임에 관한 얘기를 한적이 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차인태 아나운서가 라디오께임 출연 1등을 한적이
있다고 해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박종세 아나운서 라디오 게임 회고록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나는
"라디오 께임" 사회로 우리나라 학교대항
퀴즈 프로그램에 온 힘을 기울였다. 시작은 최세훈
아나운서가 맡았지만 바로 내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내 스타일로 진행되었는데 관심과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결승전 상황이 사진과 함께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고등학교에는 라디오게임반이
생기기도 했다. 게임은 두 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이 나와 양쪽에 앉고 사회자가
가운데 앉아 문제를 내면 아는사람이 먼저 버튼을 눌러서 대답하는 형식으로 치뤄졌다.
그때 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는 게임 기계도 KBS기술진이 처음 만들었는데 학생들은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보는 기계 앞애서 버튼 누르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울소재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하다가 인기가 치솟자 나중에는
지방으로도 지방으로도 내려갔고 학교가 아닌 장소에서
게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연말에는 전국의 우승팀들이 예선경기를
거치고 마지막까지 남은 두 학교가 남산방송연주소
공개홀에서 최종결승전을 벌렸다. 연말 최종결승때는
학생들이 남산으로 모이고 신문, 잡지 기자들도 취재를 와서
그야말로 열기가 뜨거웠다. 프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웃지못할
해프님도 생겨났다. 문제를 미리 알아내려고 고등학교 관계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와 애원도 하고 애교작전을 펴는가 하면 심지어는
술 대잡의 유혹까지 펼친것이다. 사실 문제의 보안은 이 프로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큰 일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한 문제라도 새어나가면
끝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대학입시 문제을 다루듯 문제를
잘 지켰고 긑까지 아무 말성없이 프로그램을 성공
시킴으로서 "라디오 게임을 킈즈르프그램의
효시 嚆矢로 자리잡게 했다.
"라디오 게임"에서 우승을 많이 한 학교는
서울여상, 경기여고, 이화여고, 경기고, 경복고, 중앙고
중동고 등이었다. 지방고등학교로는 실력도 우수하면서 유난히
고운학생도 많았던 강능여고, 씩씩한 기상이 돗보인 마산고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한번은 전남 광주에서 라디오게임을 마치고 그곳 선생닌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매실주를 주저없이 많이 마시고 취했던 생각이
난다. 나는 기차로 상경하면서 서울에 도착 할때까지 나는 내내 기차
승강구에 앉아 졸다 깨다 햇는데 술기운에 잠이 깊이 들어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한번은 전북 이리 남성여고에서
방송을 마치고 교장선생님과 저녁식사를
했다.교감선생님은 초면인데도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편안하게 해주는 인간적이 매력이 듬뿍 느껴지는 분이었다.
나는 스탶들에게 이분이 분명히 큰 인물이 될거라고 예언을
했었는데 나중에 전라북도 교육감에 오르셔서 이후
한동안 나는 관상장이로 불리기도 했다.
라디오게임 초창기에는 두 학교의 선수가
양쪽으로 갈라서서 아는문제가 나오면 "STOP"을
외치고 문제를 맞췄는데 이 소리가 동시에 나는때 누가
먼저인지 분간하기가 쉽니 않았다. 그럴때마다 단호하게 진행을
해서 문제는 없었지만 찜찜한것은 사살이다. 그래서 기술을 담당한분
들이 연구끝에 부저달린 신호기를 만들어 냈을때 기쁨은 아주 컸었다.
그런에 요즈음 텔레비젼의 유사한 프로에서 부자를 누르면 옺갖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좋은 그림들이 나오는것을
보면서 금석지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라디오게임에
출연했었다는 50대의 청년들을 만나 인사를
받는경우가 있는데 하나같이 성공을 거둔사람들이어서
그때마다 여간 흐뭇하지 않다. 라디오게임은 학교를 찾아가는
퀴즈게임 방송의 효시였다. 그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내가 중요한
일을 담당했던 데 대해 나는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당시 PD를 오래
맡았던 김석호 선생과 기술을 담당했던 홍기봉, 박규진씨.
그리고 항상명랑한 얼굴로 운정을 하면서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주던 문창남 기사가 보고 싶다.
박종민 프로듀서와 최세훈 아나운서가 라디오게임을 제작하던 때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나 봅니다.
그 우람찬 목소리와 청초한 모습이 지금은
많이도 변해 있군요. 박종세 아나운서!... 6, 70년대는
정말 대단한 인기를 누리셨지요. 뉴스나 스포스 중계보다,
한밤의 음악편지, 진행자를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 나오던, 한밤의
음악 방송 진행자의 맨트가 생각이 납니다. 계절따라 피고
지는 꽃, 세월따라 흘러간 노래, 우리들 가슴에 아롱진
추억의 노래들을 보내 드리는 힛트곡의 앨범, 오늘은
손인호,가 부릅니다. 해운대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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