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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시기하지 않는 사랑/고린도전서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은 사랑의 세 번째 속성으로서 사랑은 (젤로우)하지 않는 것임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시기, 또는 질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젤로우)에서 영어 (젤러스)가 파생되었습니다. 시기, 질투입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젤로우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젤로우는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자녀, 집, 학벌, 인기, 용모 등을 부러워하며 탐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10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출 20:17).
또한 성경은 젤로우를 탐심으로 연결시키고 나아가 이는 우상 숭배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다른 말로 하면 “젤로우”를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 또는 시기가 결국 우상 숭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비교 의식이 강합니다. 지면 견딜 수가 없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거나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시기심이 작동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삐뚤어집니다. 마음이 삐뚤어지고 나면 질투의 대상을 향해 매우 작은 일에도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종종 시기의 대상을 향하여 비방과 거짓말을 꾸며내기도 합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상대의 명예를 깎아 내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 마음이 시기심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상대가 울 때 기뻐합니다. 남이 기뻐할 때는 속이 뒤틀립니다.
심지어 질투와 시기는 욕심과 연결되면서 자기만 다 갖고 남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하게 하여야 직성이 풀립니다.
가끔 보면 심보가 고약한 어린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자기 장난감은 100 개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다른 것을 가지고 놀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100개나 되는 장난감은 다 집어 치우고 다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 주면 또 다른 떡이 더 커 보여서 계속 조르기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질투의 모습이요. 철이 덜 든 모습입니다. 이러한 단점을 어렸을 적에 고쳐주지 못하면 평생 자기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만 부러워하며 질투와 시기로 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질투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한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있고, 신약에서는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먼저 사울의 인생을 살펴 보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모든 부귀 영화를 다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시기와 질투로 평생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사울의 마음 속에 질투가 들어 왔는가?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골리앗 장군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악한 골리앗은 매일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의 덩치가 하도 크고 힘이 센지라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감히 그와 맞서 싸울 장군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때 마침 소년 다윗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사자나 곰을 잡는 마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전장에 나가 물매 돌로 그 골리앗의 정수리를 맞추어 그를 죽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사는 사기를 얻고 블레셋을 쳐서 그 전쟁에서 크게 이기게 됩니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을 추며 노래를 합니다.
[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 18:6-9)
사울이 생각합니다. 내가 다윗보다 나은데 나를 천천 다윗을 만만이라 부르니, 이런 괘씸한 일을 보겠나!
갑자기 사울은 다윗을 향하여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을 위하고 그리고 조국을 위하여 생명 걸고 골리앗과 싸운 일 밖에 없는데 이유없이 사울의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자신에게 선대한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 사울! 그 시작은 질투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 이후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크신 축복을 주셨건만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그 축복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한 사울은 그 질투 때문에 왕의 품위를 완전히 잃습니다.
사울이 질투의 창사슬에 갇힌 이후 그가 왕의 권력으로 행한 대부분의 행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착한 사위 다윗을 죽이려고 평생 좇아 다닌 것입니다. 그는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이려고 온 이스라엘 땅을 샅샅이 뒤지곤 하였습니다.
사울의 종말을 보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지고 그의 아들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죽고 자신도 적군의 화살에 맞게 됩니다.
[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 31:3-6)
더욱 비참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발견하자 사울의 옷을 벗기고 사울의 머리를 베어 벧산 성벽에 못을 박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만듭니다(참조, 삼상 31:8-10).
사울 왕이 이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질투 역시 그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기억하기 바랍니다. 질투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 인생이 비참하며 나아가 죽음을 넘어서까지 수욕과 부끄러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질투와 시기가 일어나면 그러한 마음을 가볍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당장 주 예수님께 나아와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또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바꾸어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젤로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질투의 대명사로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주요 이유로 여러 가지가 나열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질투일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 질투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네가 높냐 내가 높냐로 다투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보고 질투의 늪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질투는 어느새 자신의 스승을 향한 미움과 증오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가룟 유다에게 사울 왕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배은망덕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스승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잘 대해준 것 외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네,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도록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은 30을 받고 팔아 버립니다. 이는 배은 망덕 중에 가장 배은 망덕한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시작은 질투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과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 역시 비참한 결말을 갖게 됩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그러나 자살마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가룟 유다의 자살 순간을 말하는데 그는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으나 그 줄이 끊어지면서 그 아래 바위로 그 몸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옵니다.
[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 1:18-19)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에게 선을 베푼 대상에게 악을 행하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동기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특히 질투에 빠지면 감사를 잃어 버리고 배은 망덕을 합리화 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님에게 열 자녀가 있다고 합시다. 이 부모님들은 언제나 모든 자녀들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동생 생각에는 부모님이 형만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동생의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들어갑니다. 그 후 부모를 미워합니다. 불순종을 합니다. 부모에게 반대하고 말을 안 듣고 나아가 부모 마음에 고통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못된 짓만 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이때 이 동생은 감사와는 거리가 멀어진 채 배은망덕의 죄에 빠져 있는 자신을 못 봅니다. 제 3 자가 보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인데 정작 자신만은 질투의 죄악 된 쾌락을 채우려고 막무가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도 망하고 자신도 망하더라고 상관없다는 악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질투와 시기는 사람을 쉽게 포악하게 만듭니다. 범죄학적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대부분의 무서운 죄는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성폭행 연쇄 살인범들을 보면 그들의 범죄의 시작은 질투의 늪에 빠지면서 포악해지는 패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미국 켄사스의 위치타 도시라는 곳에서 데니스 레이더라는 인물이 텔레비전에 계속 방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루터란 교회의 집사였는데 60세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그토록 무서운 “BTK Killer”였습니다. BTK란 사람을 묶어서 고문을 하면서 죽이는 살인이었습니다. 그는 약 40여명의 어린 여자아이들과 처녀들을 강간하고 고문하고 죽인 살인범입니다.
나중에 데니스 레이더의 삶을 추적해보니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여자 친구를 향해 질투를 하게 되면서 살인한 것이 연쇄 살인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즉, 이렇게 무서운 죄악의 처음 동기는 다름 아닌 질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질투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잃게 하고 비인격화 시키는 그러한 죄성입니다. 또한 질투에 빠진 사람들은 보통 공동체를 무너뜨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
시기와 질투의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체에서 다툼과 온갖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의 문제아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은 시기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을 시기로 대하면서 다투고 싸우며 망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1-4)
이처럼 질투 및 시기는 하나님의 원수가 될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는에너지가 많기 때문에 파괴력이 대단합니다. 또한 언제나 사람을 천박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며 전혀 아름답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도 시기입니다. 가룟 유다의 시기에 의하여 우리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법적 권리가 없기 때문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그러면서 많은 거짓 증거를 꾸며댑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동기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8).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주인공들은 시기심에 노예인 자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가로 막는 주인공도 시기였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행 5:17)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45)
성령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종종 육신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특징은 시기심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
20 우상 숭배와 …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하나님이 내버리신 마음은 상실한 마음인데 그 마음의 특징도 시기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8-29)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심은 사탄이 우리의 죄성에 뿌려 놓은 가장 깊은 악의 뿌리요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기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시기심은 실로 우리가 갖고 있는 죄성 가운데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2-14)
성경은 우리가 시기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며, 찬양을 하며, 경건한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덧입혀지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시기심의 덫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기심은 경쟁자가 생겨나면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 속에 시기심이 있는 것이 느껴질 때 신속하게 주께 나아가 깊은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해지기 바랍니다. 그러며 신기하게도 시기심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나 같은 추악하고 죄 많은 악인을 위해 그 귀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사모하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기를 구하기 바랍니다.
사랑은 젤로우하지 아니하며…. 오늘 이후로 젤로우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온전한 사랑의 삶이 지속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