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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를 받는 요건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어떤 요건에서 임하는가?
성령 세례가 어떤 요건에서 임하는가를 아는 방법은, 제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 외에는 없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였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기까지 제자들의 훈련 과정을 보면 어떤 요건에서 성령님이 임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지금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데, 제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제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마가의 다락방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성령 세례를 받는 요건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성령 세례의 요건은 성령 충만의 요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성령 세례에 의한 성령 충만의 개념과 사역을 유지하기 위한 성령 충만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상세한 것은 PartⅠ. 07. 성령 충만에서 논하기로 한다.)
1. 모든 것의 포기
성령 세례의 첫 번째 요건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 배를 버리고(마 4:22) 세관직을 그만두고(마 9:9) 주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고(막 10:28) 고백한다. 집, 가족, 직업, 명성, 재물을 다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조롱하였다. 예수님이 멸시받으실 때 제자들도 멸시를 받았고, 예수님이 조롱을 받으실 때 제자들도 조롱을 받았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이 이것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것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는 회심할 때 버려지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는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실제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였으면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주인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야 한다. “주여!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에 오류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재산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일반적인 오류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인 사람들인가를 반문하여 한다. 이런 사람들의 삶 속에 ‘주여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라는 고백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을 실제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없다. 이런 상태, 즉 자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는다.
점검해야 할 것은 복음을 위해서 부모나, 처자식이나, 집이나, 전토를 버릴 수가 있느냐이다.(막 10:29~30) 복음을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다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2. 주님을 사랑하는 것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 16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 (요 14:15~16, 한글킹)
두 번째 성령 세례의 요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순종이 있을 때 목숨을 살리는 사랑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은 순종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활로 살리신 것이다. 목숨을 건 순종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야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은 목숨을 건 ‘즐겨순종’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믿는 자의 표적’ PartⅠ. 06-4. 견고한 진이 형성된 결과 - 불순종을 참조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요건은 교제가 지속될 때 가능하다. 사랑이 지속되려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교제를 단절시키지 않으신다. 제자들은 기가 막힐 일을 당한다. 믿고 따르던 주인이 죽었다. 왕이 되리라고 믿었던 주인이 죽었다. 이 땅에서의 소망도 사라졌고 조롱과 비아냥만 있을 뿐, 위로자는 없었다. 이렇게 낙담하고 있을 때 부활의 소식을 접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계속된 것이다. 주님과의 교제가 계속 이어지면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그 교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는 것과 성령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 없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경우는 없다. 성령론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과 분리돼서 오시지 않는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개인적인 접촉을 하는 교제로 이루어진다. 신앙생활은 주님과의 동행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할 때에만 성령님이 오신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주님과의 동행을 통한 교제가 지속되어야 한다. 성령 세례는 온전한 인격적인 순종이 이루어질 때 있게 된다. 회심은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으로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일회적인 비상한 방법이 아니라 지속적인 인격적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단절하고 살 수는 없다. 대화가 지속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내가 또 하나님께로 가니 위로자, 즉 성령님을 보내어서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두 번째 성령 세례의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사랑은 주님과의 교제가 지속될 때 가능하다.
3. 자신에 대한 절망적인 경험
성령 세례의 세 번째 요건은 자신에 대한 절망을 경험하는 것이다. 절망적인 경험이란 내 속에 있는 이기심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다. 이기심이 있는 한 결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 가운데 ‘내가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는 독백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왜 이런 독백이 나올까? 이런 독백을 하는 과정이 없이는 성령 세례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는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 죄송합니다.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부인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베드로가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3일 동안 얼마나 낙담하였을까? 3일 동안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이것이 자신에 대한 절망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의 실체를 본 것이다. 이것은 죄의 부패함을 보는 것이 아니다. 죄의 부패함은 거듭날 때 보게 된다. 이 절망은 자신의 이기심을 보는 것으로서, 거듭난 이후에 경험하게 된다.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 보인 것이다. 집과 재산과 부모형제와 친구와 직장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정작 사탄이 두려움으로 일할 때에는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요 13:37) 맹세는 외부적 위협의 요소에 의해서 어디로 가고 없고,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따라 다녔다는 것을 본 것이다.
베드로의 절망은 이러한 자신의 이기심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어부 생활을 탈피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서서 멸시받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였다는 것이 보여진 것이다. 십자가의 사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주님 앞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모습들이 그것을 나타낸다.(눅 22:24)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았는데, 자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주님을 부인하였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천박함과 자기 수치를 본 것이다. 그리고 절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망을 경험한 이후의 베드로는 달라졌다. 부활 후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그때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오니’라고 대답한다.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절망을 경험하여야 하는가?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의 천박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기심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행 8:18~20) 진정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을 경험하여야 했다. 그 절망을 경험하며 ‘내가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고 탄식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런 독백이 없이는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이라는 의미 속에는 ‘내가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고백하는 상태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가르치신다. 겸손이라는 것은 ‘내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3년 동안의 훈련을 통하여 다 포기하였는데 약한 부분이 또 건드려진다. 또 다시 내가 살아나고 또 주님을 부인하고, ‘내가 왜 이것 밖에 안 될까?’하며 또 좌절하고 낙심을 한다. 이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겠는가? 절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성령 세례를 받아 자아를 죽이는 원리를 터득하라는 것이 주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보여주시는 때가 언제인가? 주님께서 마지막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죽음으로 순종하셨을 때이다. 죽음으로 순종하셨을 때 음부에 내려가신 주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일으키시고 그 능력을 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얻고 싶다면 사도들처럼 철저하게 자아의 절망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4.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믿음이 있다면 이미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이 조명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장차 올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기도하였다. 성령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성령이 오시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기대는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기다려서 성령을 받은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약속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성령 세례가 나를 위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믿음으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필수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서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다. 성령 세례를 통하여 영의 원리를 터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는 주님과 동행에 있어서도 선행요건으로서 필수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에 있어서도 선행요건으로서 필수이다.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에 있어서도 선행요건으로서 필수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자들과 같이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기의 이기심이 보여져서 절망을 경험하여야 할 것이고 성령을 주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믿음으로 믿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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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