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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주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
시편 139편 13-18절, 마가복음서 9장 38-41절, 고린도전서 3장 1-9절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
2018년 12월에 설교하고 3년 여 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그때와는 교회 공간도 많이 달라졌고, 예배드리는 풍경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3년 만에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변화가 우리 생활에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바뀐 생활의 편리함은 물론 잘 누리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은 더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찾은 생명사랑교회는 변함없이 따뜻하네요. 쉼 없는 변화에 지쳤던 온 마음이 위로받는 것 같습니다.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불러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너무나 다양한 여성]
여신도주일 설교를 맡게 되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여신도라고 하면 전통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보듬어주시는 권사님들부터, 교회의 손발 역할을 하는 40-50대 집사님도 계시고, 가정을 막 꾸린 소은자매, 민지자매 같은 삼십대 청년도 있고, 거기에 수경이 같은 MZ세대 여교우까지, 한 번에 묶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분들이 여신도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결혼해서 맞벌이 하고 있는 딸들이 친정엄마와 다툰다는 공통 주제 중 하나가 ‘사위 밥’ 때문 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김 서방 살이 너무 빠졌네. 얘, 너 김서방 밥은 잘 챙겨주니”라고 묻는 친정엄마와 ‘밥은 각자 챙겨먹는 거’라고 다퉜다는 딸 이야기. 같은 여성이지만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겠지요.
또 같은 여성이지만 성차별을 인식하는 정도나 극복하려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수도권에서는 여학생회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추세고, 경희대에서는 얼마 전에 여학생들만의 투표만으로 여학생회를 폐지했다고 합니다. 당사자가 느끼기에 여학생회가 따로 없어도 될 만큼 차별이 줄었다고 한다면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겠지만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들은 또 이런 흐름이 이르다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 한 카테고리로 묶기에는 너무나 다른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달가워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 입니다. 사실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구조 자체가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구조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개인의 감정문제로 모든 문제를 뭉개버리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에 많은 여성들이 분노합니다. 그런데 방금 말했던 세대 간의 차이와 일화들을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엄마가 또는 언니가, 여동생이 동지 같지 않을 때도 있긴 합니다.
[대립에서 연대로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이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관점을 뒤집어서 관심을 받았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2년 전 쯤 인기 많았던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인데요, 혹시 보신 분들 계실까요? 배우 공효진 씨가 주인공 동백이로 나와서 자기를 노리는 연쇄살인범 까불이와 맞서는 내용이었습니다.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동백이는 타지 사람이 자리 잡기 쉽지 않은 옹산이라는 작은 도시에 자리를 잡습니다. 동백이는 게장으로 유명한 옹산 시장 골목에 창문도 없는 가게를 하나 얻어서 “까멜리아”라는 밥집 겸 술집을 차립니다. 게장 골목은 여성들이 남성들을 휘어잡고 단속하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창문도 없는 동백이의 가게는 그런 게장 골목의 질서를 벗어난 곳이었고 동백이는 동네 여성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어서 어마어마한 텃새를 경험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게장 골목 언니들은 동백이가 부모도, 남편도 없이 애를 키운다며 쑥덕거리고, 술집 여성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동백이를 괴롭게 하는 ‘여자의 적은 여자’를 보여주는 언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 될수록 이 게장 골목 언니들은 ‘까불이’라는 연쇄 살인범에게서 동백이를 지키는 옹산의 어벤져스, 옹벤져스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떻게 서로 대립하던 사람들,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돌보고 구하는 연대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게장 골목 언니들은 연쇄살인범 까불이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동백이를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엽니다. 그리고 회의의 결론은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니여”였습니다. 게장 골목 언니들은 자신들의 질서에 어긋나는 동백이가 달갑지 않았지만 오로지 ‘사람은 살리고 봐야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붙들고 일단 동백이 곁을 지키기로 합니다. 그렇게 옹벤저스는 순번까지 정해서 동백이네 곁을 지키기 시작했고, 언니들과 동백이는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며 편견을 거두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게장 골목 언니들과 동백이는 대립을 연대로 승화시켜서 연쇄살인범을 검거하며 서로의 삶을 지켜 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질서를 인정해주며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에 집중하면서 옹산 식구들은 대립과 반목을 연대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뭣이 중헌디]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요한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해서 엉뚱한 일을 저지릅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자랑하듯이 말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막9:38) 요한의 마음에는 자기 무리들 말고는 다른 누구도 그럴 권리가 없다는 일종의 특권 의식이 있었습니다.
요한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 무리인지 아닌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기적을 행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누군가의 병이 낫고, 누군가가 귀신에게서 자유로워졌다면 예수님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조각난 생명이 회복되고 온전해지는 것이 그것을 누가 행했는지 보다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가복음 속 요한처럼,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종교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데도 날을 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속이 다르다고 해서 등을 돌리는 짓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신음하는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소속이 다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받은 소명을 감당하는데 함께 할 수 있다면 연대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매해 10월에는 우리 교단에 속한 송암교회가 대한불교조계종 화계사, 천주교 수유1동 성당과 함께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바자회를 함께 엽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바자회를 열 수 없었던 작년에도 세 종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을 모아서 16명의 난치병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 세 종교는 궁극적으로 종교인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에 집중했고, 생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면서 서로간의 차이를 거뜬히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살리고 봐야한다”며 동백이 곁을 지키던 게장 골목 언니 같은 마음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 가깝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는 손길 하나, 하나가 귀합니다. 함께 해도 모자란 판에 작은 차이가 불편해서 막상 세상을 밝히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소홀히 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 안의 편협함과 옹졸함을 넘어서야 합니다.
서로 다름 자체가, 차이 자체가 너무 견디기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차이로 인해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나와 꼭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참 곤란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역동성의 바탕이 됩니다.성경은 반복해서 이 다름과 차이가 곧 축복이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이라 해도, 이런 저런 다름이 때로 낯설다고 해도,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인정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와 그들의 차이에서 눈을 돌려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이를 가진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한다면 그는 나를 움직이고, 나는 그룰 움직일 것입니다. 이 귀중한 연대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작은 생명의 물줄기를 하나씩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삭막한 이 땅에 생명의 강물이 흘러 넘치게 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자라게 하는 분을 기억한다]
그러나 서로간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다른 종교까지 가기도 전에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해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고린도교회의 갈등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볼로와 바울은 같이 동역했던 사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다면 아볼로는 실질적인 목회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아볼로와 바울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내세워 분열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스스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위해 열심을 다 할수록 시기와 다툼이 생겨나고 파벌만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장성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평소 영성 생활에 충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자기 지향적 삶을 위한 것이라면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에 집중하는 영성 생활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나를 넘어서 타인과의 경계를 허물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이 어떤 모습인지 고린도전서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할 만큼 했다고 여겨도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역할이 다른 이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바울사도가 지적한 어린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린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새로운 지식과 문화가 넘쳐났던 도시입니다. 그들은 늘 앞선 지식을 탐구하고 여러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도 논리와 설득의 측면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고 논리가 정확한 자신들을 성숙하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신앙에 있어서도 지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앙인들도 이 세상의 흐름을 알려주는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지식과 지혜로 이 창조 세계를 이해하고 함께 살 방법을 궁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지식이 많다, 지혜가 있다 하는 자들이 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우리를 다 성숙하게 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도 많은 지혜와 지식을 자랑했지만 성숙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지식은 충만했을지 모르지만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숙함은 갖지 못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라게 하시는 분’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물을 주는 사람도 중요하고 심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서로가 더 중요하다며 다투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 할 때]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심는 일을 오래 하였다고, 물주는 일을 좀 잘 하였다고 자라게 하시는 주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런 내가 서있는 바탕 조차 주님의 손길 안임을 확인 할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우리의 노력보다 그 노력을 가능하게 하신, 바탕이 되어주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을 내세우기보다 감사와 감격으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이 한 팀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신앙은 서로의 우선됨을 주장하며 파벌을 나누지만, 성숙한 신앙은 나와 다른 사람을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나와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가 없으면 내 수고도 헛되고 나와 다른 역할을 하는 그가 있어야만 내 노력도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
바울은 주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이들을 두고 일꾼이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선포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주님은 심는 일을 하는 사람도, 물주는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십니다. 다투고 편 가르는 부족한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밭을 일구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세워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을 마주하고서 사실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동역자’라는 이름 앞에서 주님이 우리를 이미 잘 알고 계신다는 시편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부족함은 약점이 됩니다. 우리는 이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그럴 듯한 것들을 붙들고 집착합니다. 때론 이런 연약함을 드러날까 두려워서 편을 가르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자기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약함을 멸시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각자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옹졸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주님은 대립하던 우리를 서로를 채워줄 동역자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종이나 일꾼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일하는 주님의 동역자로 세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여러분, 그리고 서로 너무 다른 여신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로 다름과 수많은 차이를 함께 넘어 섭시다. 나를 다 아신다는 주님의 위로를 붙들고 연약함도 부족함도 딛고 일어섭시다.
주님은 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를 들여다보며 함께 걸어갈 가능성을 보게 하십니다. 다른 많은 차이에게서 눈을 돌려 함께 살아갈 단서들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가능성과 단서들을 붙잡을 때, 우리는 어린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바로 서서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이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부족한 우리를 주님의 동역자로 세워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나와 다른 이를 겁내고 편을 가르지만, 주님은 당신을 기억할 때 모든 차이와 연약함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서로를 통해 온전해지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이 알려주신 더욱 큰 사랑으로 서로를 품으며 주님이 맡기신 일들을 다 감당하게 하소서.
특별히 오늘은 여신도 주일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여러 자리에서 헌신하는 여신도들을 기억하시고 이들에게 힘과 능력을 부어주소서.
이들이 주님에 일에 헌신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바라보기보다 가장 중요한 주님의 이름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