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김경숙/ 글무늬문학사랑회
발단은 볼펜이었다. 교민 매체인 코리아타운에 ‘기억의 저편’ 이라는 짤막한 시가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원고지 위에 검은 볼펜 한 자루가 비스듬히 놓여져 있는 배경 그림이었다. 순간 “몽블랑!” 탄성이 튀어나오며 몽블랑 매장의 하얀색 외벽에 쓰여져 있던, 검정색 디자인 체의 글자가 연상작용으로 소환된다.
졸업 전에 입사 전형에 통과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았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서무계 책상 위에 있는 공용 전화기로 공 사간의 소통을 이어갈 때였다. “ 00국장님의 전화 인데요.” 내 이름을 부르며 서무 직원이 전화기를 건넨다. 직속 상관은 아니었지만, 핵심 부서였기에 내심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큰오빠의 친구라고 소개를 하며 “잠깐 다녀가요”라고 호출한다. 곧바로 건너간 그곳 사무실에서 오빠 친구분은 특별한 만남이라며 반갑다고 악수를 청한다. 엉거주춤 앉아 사연을 들었다.
22년전, 열다섯 살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큰오빠에게는 항상 함께 몰려다니던, 자칭 ‘악당 클럽’ 멤버인 절친한 친구 세명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나절 그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안방에서 들려오는 수선스러움과 갓난아기 울음소리에 친구 엄마가 몸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신기해 하며 방금 세상으로 나온 핏덩이인 나의 첫 얼굴을 보았노라고. 그때가 엊그제처럼 또렷한 데 세월의 흐름에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날 태어났던 내 동생이 너의 부서에 발령을 받았다”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그런 연유로 반가웠고, 또한 지척에서 근무하게 된 것도 특별한 인연이라며 조그만 파우치를 내게 내민다. 내용물인 몽블랑 볼펜의 까만 몸체가 파르르 빛을 발했다. 승진해서, 결재할 때 쓰라는 덕담과 함께 주는 입사 기념 선물이었다. 오빠는 내가 어느덧 성년이 되어 행정고시 출신인 자기의 친구와 같은 곳에서 근무하게 된 우연한 인연에 친구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 펜은 나와 13년이란 인연을 이어 갔다. 나이 30대 중반부에 들어설 때였다. 늘 평안함 속에서 안주하며, 정해진 시스템에 따라야 하는 생활에 회의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던 역마살이란 주체가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완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직장에 사표를 내었고, 물 설고 언어가 설은 이국 땅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잡화점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스인 가족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인수했다. 친정은 물론 시댁에서도 장사라는 것을 해본 사람은 전무했기에 나에게는 두려움 반, 개척정신 반의 도전정신만이 최대의 무기였다.
중국인 무역상이 제품 샘플을 가지고 왔다. 90년대초 호주는 공산품을 비롯해 물가가 비쌌다. 그 와중에 중국과의 교류가 풀리자, 싼 가격의 중국제 물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테니스 볼, 일회용 카메라, 필름, 배터리 등등... 그 중에 몽블랑을 베낀 볼펜이 있었는데, 저렴한 가격대비 성능이 꽤 괜찮아 잘 팔렸다. 제품들이 불티나듯이 팔려 나갔다. 거기에 맞물려 가파른 호주 달러의 하락과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으로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진은 오로지 카메라에만 의존할 때였다. 올림픽 성화 봉송 행렬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휴대용카메라를 사러 몰려 들었다. 견물생심 이라고 했던가? 카운터에 있는 볼펜도 덩달아 사가는 바람에 재고가 소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저렴한 가격에 관광객들이 재미있어 했다.
선물 받았던 몽블랑 펜은 한국에서 사용하던 인감도장, 아이들 출생기록카드, 표창장과 수집용 화폐 등. 자잘한 소장품들을 상자에 담아 장롱 선반에 고이 모셔 놓았다. 그런데 옛말에 ‘아끼다가 똥된다’ 라는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집수리를 시작하면서 장롱 속 상자와 실크 한복 등 비싼 세탁비가 드는 옷들을 꺼냈다. 먼지에서 보호하고자 커다란 박스에 켜켜이 담고 위에는 계절이 지난 옷들로 덮어 옷걸이와 함께 임시로 현관문 앞에 내어 놓았다. 쇠 창살로 된 높은 대문의 잠금 장치를 손을 넣어 열고 계단을 올라와야 하는 구조의 현관은 정원의 나무들로 가려져 있어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 애초에 잘못이었다.
아들과 엄마로 추정되는 남녀 한 쌍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버리는 물건이면 옷걸이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혼자 있던 남편이 옷걸이는 안되고 옷이 담긴 박스는 버리는 옷들이라 지레짐작하고는 가져가라고 하였다고.
그들이 커다란 박스를 차에 싣고, 정작 버려야할 바퀴 하나가 고장 난 옷걸이는 남겨둔 채 졸지에 떠나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한국에서의 추억이 담긴 물품들과 손때 묻어 정들었던 몽블랑 펜과의 인연은 그렇게 황당하게 끝장이 나버렸다.
은퇴 후, 여행길에 파리에 들렸을 때였다. 에펠 탑 구경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는데 코너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양식의 하얀 외벽에 까만 글씨체가 눈을 사로잡았다. ‘MONT BLANC’ 매장이었다. 들어가 구경을 하였다.
남편이 잃어버린, 같은 모델의 펜을 사주겠다고 매장 직원을 불렀다. 나는 강력하게 거부했다. 내가 안타까워했던 건, 그 펜이 필요해서가 아니지 않은가. 단지 그것들이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과, 추억이 담긴 인생 여정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텅 빈 현관 앞에서 느꼈던 허탈감은 세월에 희석되고 사라졌는데…. 그때의 감정을 새삼 되살리고 있는 옆에 있는 남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고 매장을 나섰다. 그때 벽면에 전시해놓은 몽블랑 정상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을 그냥 지나칠 거야?”
현지 가이드가 이미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스위스 융푸라우행 기차표를 예매했건만. 남편은 단순한 사고의 소유자 답게 말했다. 항상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고, 결정했고 나는 할말을 잊는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대립각에서는 화성이 내뿜는 불길을 일단 피해야만 했다.
결국 가이드의 질책에 일정을 변경하지 못했다. 아쉬워하는 남편을 따라 올라간 융푸라우. 그 빙하가 뿜어내는 속이 뻥 뚫리던 청량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살았음 직한 산골에서 주근깨 소년과 사진을 찍었던 소소한 추억들과 야생화 군무들이 알프스 들판 카페에서 여독을 풀어주던 커피 향의 깊은 여운이 되어 다가온다.
우연히 접한 볼펜 그림은 나의 연상 기억을 끄집어 내어 추억이라는 회귀선(回歸船)을 타고 내게로 돌아오게 하는 예인선(曳引船)이 되었고. 백신 부작용으로 응급실을 넘나들며 침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백신접종 완료’라는 여행자 필수의 난제(難題)는 무시한 채……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역마살을 부추기며 속살댄다.
“이제 알프스도 빗장을 풀었으니 그때 못 갔던 몽블랑 빙하에 올라 코로나에 맞서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