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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 (21) 바벨탑과 스페셜티커피
상술이 쌓아올린 커피 시장의 바벨탑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창세 11,9, 공동번역본)
바벨탑의 이야기는 문학, 영화, 미술, 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은유되면서 우리의 본성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욕심대로 살 수 없으며, 과욕이 만든 그릇된 사회를 바로잡는 장치를 신께서 이미 내부에 계획해 두셨음을 일깨워 준다. 또 인간은 소통하지 않으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점과 인간을 하나로 뭉치도록 하는 가치가 불온할 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됨을 경고한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창세 11,6-7)
청소년기에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마음이 불편했다. 시쳇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하는 오해 때문이었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이 구절이 인간 탐욕에 대한 은유적인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시장에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라는 바벨탑’이 우뚝 서 있다. 마치 하늘에 닿은 데 이어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양 기고만장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당하고 품질이 좋지 않은 커피를 스페셜티 커피처럼 꾸미는 일이 잦아졌다. 그 무리가 커피 전문가의 탈을 쓰고 실제로는 장사를 하는 세력이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들은 일단 “스페셜티 커피란, SCA(스페셜티커피협회)라는 세계적인 단체가 품질을 평가해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부여한 좋은 커피”라고 정의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수법을 쓴다. SCA를 앞세워 놓고는 정작 그들이 사용하는 커피가 바로 그 커피인지는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이런 짓을 그러려니 하고 혀만 차던 사이, 그들의 바벨탑은 하늘로 우뚝 솟았다.
커피 광고를 보면 스페셜티 커피가 아닌 게 없는 듯하다. 커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적잖은 전문가들이 자신이 다루면 무엇이든 스페셜티 커피가 되는 양 떠든다. 좋지 않은 커피라도 자신이 로스팅하거나 추출하면 스페셜티 커피가 된다고 수작을 부린다.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 자신들만의 바벨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시는 바벨이 뜻하는 ‘혼돈’ 그 자체일 뿐 성경 말씀대로 흩어져 사라질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릇된 신념은 잘못된 가치를 증폭해 빠르게 오염시킨다. 그들의 바벨에서는 스페셜티 커피라고 떠드는 온갖 잡음들이 난무해 혼돈에 빠지게 된다. 지금 우리의 커피 시장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주변에 온통 스페셜티 커피이다. 출처를 물어보면, 믿고 마시라는 식이다. 성경 속 바벨에는 결국 거대한 탑만 남고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거대한 탑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리에 홀로 남아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의 개념은 1978년 국제커피회의에서 에르나 크누젠이 “산지의 지정학적인 미세한 기후 조건이 커피에 특별한 향미를 부여한다”고 일갈할 때 태동됐다. 순간 전 세계 커피 애호가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와인처럼 산지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품질을 관리해 품격 있는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다짐이었고, 그런 커피는 분명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스페셜티 커피는 상술만 요란할 뿐 그 딱지가 붙으면 되레 신뢰를 잃는 지경이 됐다. “사람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을 염려한 것인지 커피를 통해서도 헤아릴 수 있다.
[사유하는 커피] (22) 길 잃은 양과 썩은 커피
‘썩은 원두콩 몇 개쯤이야’ 하다 큰코다쳐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인류가 위협받고 있다. 세계기상기구가 최근 5년간 지구의 평균기온을 살펴봤더니 산업혁명 이전보다 1.1℃ 상승했다. 과학자들은 이 지표가 1.5℃를 넘어서면 지구환경은 기존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거듭 경고해왔다. 호모사피엔스가 적어도 3만여 년간 살아온 환경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종의 멸종을 경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과학과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에게는 이젠 0.4℃의 여지밖에 없다.
지구의 신음이 깊어진다. 기후변화의 가늠자인 남극 빙하의 질량손실이 매년 250기가톤에 달한다. 올림픽 규격 수영장 1억 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의 빙하가 해마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해수면은 연평균 5㎜씩 상승하는데, 이는 아마존 강이 3개월간 바다로 흘려보내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2015~2018년 발생한 기상이변 94건 가운데 76건이 인위적인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가장 극심했던 재해는 폭염과 가뭄이었다. 그린란드, 알래스카, 시베리아 등 북극지방에서까지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지난여름, 프랑스 남부는 역대 최고 기록인 46℃의 폭염으로 인해 그 주변에서 2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류의 30%가 1년 중 적어도 20일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기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마태오와 루카 복음으로 각각 전해지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지혜를 구해야 한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둔 채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에게서 사랑의 본질이 목격된다. 작은 하나에도 소중함이 깃들여 있음을 발견해주며,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심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더불어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뭉클하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다. 양은 인간에게 개 다음으로 길들여진 동물이다. 1만여 전 캅카스산맥 일대에 서식하던 산양을 호모사피엔스가 반항적인 종들은 대를 끊는 방식으로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양은 무리를 이뤄 개가 이끄는 대로 졸졸 줄지어 다녔기 때문에 야생의 거친 뿔이 사라지고 시력도 퇴화됐다. 멀쩡한 양들로서도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는 노력에 감사해야 한다. ‘한 마리쯤이야’ 하고 포기하는 구조로 공동체가 운영되면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1975년 월러스 브로커가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며 위험지표를 보여줬을 때, 지구공동체는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데 망설임이 없는 것은 양이 길을 잃게 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커피업계도 ‘길 잃은 양의 비유’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커피 생두에는 벌레 먹거나 곰팡이가 피어 악취를 풍기는 것들이 섞여 있다. 이를 모두 가려내야 향미뿐 아니라 건강에 좋다. 그러나 이런 결점두를 가려낼수록 무게가 줄어들고, 또 강하게 볶으면 악취를 숨길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방관하기 쉽다. 일각에서 이런 관행이 거듭되는 사이 “커피란 자고로 고독처럼 써야 한다”는 그릇된 인식이 퍼졌다. 커피 포대에서 썩은 콩들을 보았을 때, 양이 길을 잃는 이유를 헤아리듯 결점두가 생기는 이유를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향미로 커피의 품질을 가늠하는 이치를 깨우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썩은 콩 몇십 개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술은 곧 자신들에게 비수가 돼 되돌아온다는 점을 커피 공동체는 성경 구절만큼 무겁게 가슴에 새겨야 한다
[사유하는 커피] (23) 신을 만나러 가는 길 위의 커피
이슬람 수피교 수행과 의식에 커피는 필수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있다면 적어도 두 가지가 있을 성싶다. 하나는 아폴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길이겠다. 두 길은 각각 성경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며 진리를 더듬어간 교부들의 길과 직관이나 황홀경을 통해 접신을 시도했던 신비주의자들의 순례길이기도 했다.
커피가 13세기에 거대한 그룹을 형성한 수피교의 신자들에게 신과 합일로 나아가는 길에 요긴한 음료가 돼 준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수피교도들은 불교로 치면 참선으로 해탈을 이루려는 선승이고, 힌두교에서는 고행을 통해 시바신을 만나길 소망하는 요가파 성직자를 닮았다.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또 금욕주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는 700여 년을 앞서 산 성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의 모습이 비치기도 한다.
수피라고 불린 이유에 대해서는 ‘지혜’라는 뜻의 그리스어 소피아(Sophia)에서 비롯됐다는 설, ‘순수’를 의미하는 아랍아 ‘사파(Safa)’에서 유래했다는 설, 마호메트가 세운 메디나의 성원(Mosque)에서 맨 앞줄을 뜻하는 ‘수파(Suffa)’에서 왔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수피들은 주로 하얀색 양털 옷인 ‘수프(Suf)’를 입는데,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입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커피는 이들의 수행을 도왔다. 식욕을 떨어뜨리는 쓴맛과 텁텁함이 금욕주의 실천을 위해 음식을 멀리하려는 수피들에게는 제격이었다. 그들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이 ‘신의 친구’라는 반열에 오를 수 있던 것이 잠을 자지 않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점도 커피 전파에 기여했다. 밤새 기도하려는 수피들에게 각성효과로 졸음을 쫓아주는 커피는 실로 ‘신이 내린 음료’였다. 여기에 커피를 마시면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도 고단한 순례의 길에 커피를 곁에 둘 중요한 이유가 됐다.
결국, 수피들의 의식에 커피가 포함됐다. 이들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수피댄스를 추며 황홀경에 빠지고 이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수피들은 춤을 추기 전에 빙 둘러앉아 빨간색 잔에 커피를 따라 돌려 마신다. 빨간색 커피잔은 ‘신과의 합일에 다다르는 관문’을 의미한다.
수피교도들이 신을 만나기 위해 디오니소스적 행동을 보인 것은 사실 불의에 대한 몸부림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물질을 추구하는 한편 구약성경과 꾸란에 대해 극단적 이론화로 치닫는 이슬람에 대한 정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신의 뜻을 직접 구하고자 하는 체험 신행을 선택했다. 여기에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초자연적 존재인 신을 만나긴 힘들다는 인식이 깔렸다. 신이란, 인간이 찾아 나선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사랑을 실천하면 신의 선택 또는 초대를 받아야 한다.
수피교는 이슬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커피로 전염병을 고치며 수많은 사람을 구한 예멘의 오마르, 커피 씨앗을 몸속에 숨겨 인도로 건너간 바바부단, 아덴의 정신적 지주 게마레딘 등 이슬람을 오지의 마을까지 전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피교 수행자들이었다.인간이 죽어야만 영혼이 일어나 신을 만나러 떠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인정하기 싫었던 수피교도들은 뇌 속까지 들어가 정신에 작용하는 카페인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뱅뱅 돌기까지 하면서 뇌를 혼돈에 빠뜨려 몽환적 상태가 돼야 그들은 신을 만났다. 이를 위해 마약까지 먹는 그룹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 신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 신을 만났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더 어리석다.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무리한 의식과 소음을 만든다.
[사유하는 커피] (24) 언어가 기도인 이유
맛에 눈 뜬 인류, 언어 통해 사유의 세계로
인간에게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보인다. 언어가 없다면 주님의 기도는커녕 문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최초의 대화는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 시기에 언어란 발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영적 교감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영적 교감 능력을 잃는 바람에 인류는 발성을 통한 소리를 언어로 삼아야 했다.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만 본다면 언어는 곧 목소리이다. 인간에게 목소리가 언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지구였기에 가능했다. 지구 공기는 산소 21%, 질소 78%, 헬륨 0.1%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성은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동시에 음파를 형성하기 위한 밀도를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언어의 본질은 소통을 아우르는 더 큰 무엇이다. 그것은 곧 언어가 ‘생각의 도구’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 부분을 커피 애호가로서 맛에 견줘 설명할 수 있다. 맛 역시 ‘생각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식음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뇌가 작동해야 한다. 좋은 커피를 마시고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것은, 커피의 향미가 뇌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 덕분이다. 맛을 보고 먹어도 되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더 좋은 맛을 추구하고, 더욱이 그 과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인류는 언제부터 맛을 추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일까? 유력한 시기 중 하나가 17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즈음이다. 식재료를 불로 가공할 때 갈변 반응, 캐러멜 반응 등을 통해 다양한 맛이 생겨난다. 하지만 가열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도 매력적인 맛을 내는 먹을거리는 수두룩하다. 따라서 불이 인류에게 맛을 깨우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진화론자들은 불 사용이 인간의 뇌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림으로써 생각하는 능력을 높여준 것으로 믿는다. 지능이 좋아진 인류는 생존을 위해 먹는 행동을 스스로 개선해 나갔다. 가열한 음식이 소화에 유리해 같은 양을 섭취하더라도 더 많은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체득했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는 불의 맛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인류의 DNA에는 마침내 유익한 식음료를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장치가 새겨졌다.
불을 이용하고 맛에 눈을 뜬 호모 에렉투스는 한순간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열렸다. 호모 에렉투스가 멸종된 이유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해 다른 종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는 설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언어를 사용해 소통하며 신속하게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면모가 단시간 경쟁 종을 멸종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언어가 발휘하는 더 위대한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언어가 곧 ‘생각의 도구’인 것이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인류는 6~7만 년 전 돌연변이로 인해 두뇌 회로에 변화가 생기면서 언어능력을 갖추게 됐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소통을 위해서라면 수화만으로도 가능하다. 창조론에서 볼 때, 하느님은 언어를 통해 인간을 묵상으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유에 들어가고, 그 덕분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속에 형상화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결국 언어에서 비롯됐다. 신앙인에게 언어는 곧 기도이다.
[사유하는 커피] (25) 빛과 심상의 색, 그리고 커피
제의 색에 의미 있듯 커피에도 향과 색이
1665년 영국을 휩쓴 흑사병을 피해 고향 집에 가 있던 스물세 살 뉴턴은 빛에서 색을 발견했다. “색은 단지 특정 파장의 빛이 반사된 데 따른 물리적 현상”이라는 설명은 놀라움과 함께 적잖은 실망감을 주었다. 빛에 대해 인류가 품어온 신비로움과 상상력이 한순간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색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색의 변화무쌍함을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은 인류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키워낼 여지를 주었다. 데모크리토스는 빛의 자극뿐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물질이 자극과 버무려지면서 색이 감지된다고 봤다. 플라톤에게 색채는 참된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색은 물, 불, 공기, 토양 등 자연의 어우러짐이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금색은 태양, 녹색은 자연, 파란색은 하늘을 보고 벽화를 그렸다. 그들에게 색채는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이었다.
색에 대한 이러한 지적 호기심에 뉴턴은 한마디로 찬물을 끼얹었다. 가톨릭도 영향을 받았다. 13세기 초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전례력에 따라 특정 색의 제의를 입도록 했다. 250년가량 지나 성 비오 5세 교황 때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례색 규정이 확정됐다. 이때가 뉴턴이 빛에서 색을 가려내기 100년쯤 앞선 시점이다.사제의 제의 색상에 따라 미사의 의미를 더욱 깊게 가슴에 새겨온 신앙인은 ‘색은 단지 물질 현상’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신앙인들이 보기에 제의의 색상은 분명 심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부활, 성탄 미사에서 백색 제의는 예수님의 영광과 결백, 기쁨을 더욱 드높여준다. 순교자 축일의 홍색 제의는 피와 열정과 사랑을 더 또렷하게 떠오르게 하고, 대림과 사순 시기의 자색 제의는 참회로 이끈다.
색은 뉴턴의 말대로 기계적인 물질 현상의 결과일 뿐일까? 뉴턴이 세상을 떠나고 22년 뒤 신성로마제국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괴테는 뉴턴의 색에 관한 광학은 틀렸다고 일갈했다. 괴테가 마흔한 살이던 어느 날 뉴턴처럼 프리즘을 통해 색을 관찰하다가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에서 색깔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100여 년간 진리처럼 여겨진 뉴턴의 주장에 허점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괴테는 이후 20년간 색채 연구에 매달려 환갑이던 1810년 색채론을 발표했다. 괴테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모든 색이 만들어지며, 같은 색이라도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예술 여행과 평소 산행을 통한 자신의 체험담이 담긴 것이지만 과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하진 못했다. 하지만 같은 풍경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감성이 형성된다는 괴테의 직관은 인상주의라는 미술사조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사실, 인간이 색을 보고 아무런 감성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새우만도 못한 존재이다. 인간은 적색, 녹색, 청색 등 3개의 광수용체만 있어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는 반면 새우는 16개 광수용체를 지니고 있어 자외선과 편광까지 볼 수 있다. 새우가 보는 세상이 인간이 보는 세상보다 다채롭다.
색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커피를 통해 답을 할 수 있다. 커피 전문가들은 110칸으로 구성된 색상환을 가지고 향미를 공부한다. 커피를 마시면 과일, 견과류, 꽃, 캐러멜, 흙과 같은 향들과 함께 특정 색이 떠오른다. 후각과 미각뿐 아니라 시각까지 자극돼 더 풍성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공감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