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활천문학상 수상 작품
아버지의 아홉수
김 예 희(金叡熙)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의 연수는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이어서 그 날수는 비밀의 안개에 가려 있다. 뭇사람들이 생업에 매진하여 열정을 바치고 보람을 일궈내는 것은 바로 미래의 화복(禍福)이 감춰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귀하게 들리는 것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신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아버지는 한순간에 삶의 애착이 꺾이고 앞날의 소망까지 뿌리째 흔들리는 시련을 만났다. 촌장(村長)께서 아버지의 아홉수를 불쑥 짚어준 뒤로 근심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그 어른은 사서삼경, 주역 등을 섭렵하신 분인데 마을의 대소사나 이웃들의 운세 봐 주기를 즐겨했다. 아버지는 이분에게 딱 걸렸다.
아버지의 연치가 쉰셋 들던 그 해 정초, 세문안(歲問安)을 올리는 자리에서 그분이 아버지에게 ‘쉰아홉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흉한 괘(卦)를 전했다. 아홉수는 남자 나이에 ‘아홉 구(九)’가 들어가면 결혼이나 이사를 꺼리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분은 뜬금없이 사망의 기운을 운운하며 올가미를 씌운 것이다. 할머니께선 팔순을 앞둔 시점이었으니 아버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성싶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집안을 세우려는 내게 촌장의 불길한 말씀은 환난의 돌과 같았다. 오남매의 맏이인 나는 신혼생활의 단꿈에 마냥 젖어 있을 순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되었다. 일여드레 해만 집중해서 아버지를 모시면 집안의 행복을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
먼저 미신에 붙잡힌 굴레를 벗겨 드리고자 마음먹었다. 우리 식구들 중에 아버지만 외딴섬처럼 점복(占卜)에 매어 있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도록 아버지께 권유하여 교회에 출석할 것을 꾸준하게 말씀드렸다. 두 해 동안 뜸을 드리시더니 마침내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 할아버지 기제사를 추도 예배 형식으로 바꾸자, 숙부 삼형제가 합세하여 큰집을 찍어 흠담을 했다. 심기가 몹시 불편했으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우리 집의 논농사라고는 문중 땅 열 마지기가 전부였는데, 종중(宗中) 시제 때 상차림을 주선하는 단서 조항에 묶여 있었다. 이제 생계가 달린 결단을 해야 한다. 온 가족이 기독교 신앙으로 하나 되어 생활 풍속이 달라졌는데, 묘사(墓祀)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수행하려니 몹시 께름칙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문중 땅을 반납하는 것이 옳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식량으로 들어가는 돈이 그리 많지는 않다. 아버지께 사정을 아뢰고 간청하여 논농사를 짓지 않기로 승낙을 얻었다. 종중논을 내놓자마자 숙부들의 박해는 봇물 터진 듯 했다.
“이제 큰집 식구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구먼. 두고 봐라!”
독한 소문에도 아랑곳없이 맏이의 요청을 순순히 따라주신 아버지의 큰마음은 지금 되돌아봐도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 사이 우리 부부에게도 맏딸이 태어나고 새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고 활기가 넘쳤다. 우리 내외는 교직에 종사하며 그 당시엔 가야산 자락 시골의 면소재지에서 살림을 했다. 그곳에서 아이를 봐 줄 사람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부득이 할머니께서 낯선 곳에 오셔서 증손녀를 키워 주셨다. 아내의 근무지인 학교 뒷담 곁에 셋집을 다시 얻었다. 부엌 딸린 방 두 칸짜리 집은 우리에게 손색없는 보금자리였다. 할머니는 아이가 보채어 달랠 길이 없으면 한창 수업 중인 교실까지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애 젖 안 먹이고 뭐하느냐?”
라며 손부를 난처하게 하신 추억은 여태 아련하다. 이윽고 두 살 터울로 아들이 태어나자, 할머니께서 증손 둘을 돌보기엔 기력이 부쳐서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손을 놓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할머니께서 고향집으로 가신 뒤에 부모님이 손주 둘을 키워 주시려 객지살이를 기꺼이 감내하셨다.
고향을 벗어나 신문물을 만나고 적응하다 보면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구치고 아홉수의 잡념은 잊히길 바랐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고자 종답(宗畓)을 반납했지만, 하나님께서 손주 농사를 짓게 해 주셨다. 후대를 키우는 그 기쁨과 보람에 겨워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손주를 업고 집밖을 나서면 때로는 동네 사람들이,
“선생님, 오늘은 학교를 안 가셨네요?”
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아버지는 정정(亭亭)하셨고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벌어진 일화이다.
세월은 빠른 물살처럼 흘러갔고 막내가 태어나자 손자 하나를 더 얻은 기쁨에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큰애가 다섯 살 때 손주 셋을 데리고 부모님이 고향집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기로 했다. 작은댁이 있기는 해도 할머니께서 홀로 지내시도록 너무 오래 둘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주말이면 우리 내외는 아이들 용품을 챙겨서 시골집을 들락거렸다. 남들은 농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골몰하는데 자전거에 손주를 앞뒤로 태우고 시골 장 구경 다니는 아버지를 두고 이웃들이 부러워하더라는 이야기를 아직도 자랑삼아 하신다.
그런가 하면 호사다마란 말처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대구에 볼일이 있어 출타했다가 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탔는데 목적지에 거의 도착될 무렵, 그 택시가 시내버스와 충돌하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 신경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아홉수의 망령이 떠올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경상이어서 일주일 만에 퇴원하셨다.
또 한 번은 장마철에 태풍이 지나간 뒤 고향집 뒤안길의 감나무 아래로 전선이 쳐져 내렸는데, 아버지께서 무심히 낫을 잡고 전선을 걷어 올리려는 순간, 합선으로 굉음을 내며 불꽃이 일어 아버지는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 낫자루가 비전도체인 나무로 만들어졌기에 무사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호사(好事)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다마(多魔)’ 때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피할 길을 내시니 그분의 은총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장마철의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찬란하게 빛나듯 아버지의 아홉수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이로 쉰아홉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인생의 커다란 분깃점이다. 환갑을 맞이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지, 말지를 가늠하는 터닝포인터가 아닌가. 다행히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손주들 키우는 보람에 푹 잠겨 아홉수의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셨다.
마침내 환갑잔치를 열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1984년, 처서(處暑) 무렵이다. 고향집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깔았다. 오전 열시쯤부터 아버지 친구 분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교회 손님과 내 직장 동료들이 많이 찾아주셨다. 손님치레를 하고 흥이 한창 무르익자, 우리 학교의 친목회장이 느닷없이 나더러 축가를 부르라고 했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성봉 목사님이 가사를 붙인 ‘희망가(서로 사랑하자)’를 부르자 하객들이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이어서 아버지를 업고 마당을 한 바퀴 돌라고 시켜 엉겁결에 아버지를 생전 처음으로 업어 드렸다. 이 날 행사의 백미(白眉)였다. 남들은 알 턱이 없는 아홉수의 터널을 빠져나온 기막힌 사연이 있기에 그 날의 잔치는 더욱 빛났다.
환갑을 달리 망칠(望七)이라고 부르며 칠십 밑자리 깔았다고 한다. 예순 한 살에 닿으면 일흔까지 사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堂上)이라 믿으면 된다. 시각(視角)을 조금만 달리 하면 아홉수의 악연을 비켜 갈 수 있다. 칠순 이듬해를 망팔(望八)이라 한다. 역시 같은 셈법으로 팔십 밑자리를 깔았으니 여든 살까지 사는 것은 일없다고 반기면 그만이다. 이렇듯이 십 년 단위로 세월을 분절하여 희망을 걸고 단기적인 목표를 번번이 성공하다보면 삶의 기쁨은 배가되고 거듭된 기쁨의 순간들이 쌓여 장수(長壽)의 복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아버지는 지난해 아흔일곱 번째 생신 축하 상(床)을 받으셨고 할머니의 향년(享年)을 넘어섰다. 마을에서나 교회에서나 이제는 당신이 원로이시다. 당신 슬하에서 키워낸 손주 셋이서 가정을 이루었고 집집마다 증손 둘씩, 여섯 명이 모두 초등학생이다. 후손들을 보살피는 즐거움과 고매한 신앙심으로 세월의 물살을 건너오신 아버지의 삶의 궤적이 존경스럽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환난을 견디어낸 나의 아버지, 우러러볼수록 그 영혼이 자유로워 보이고 그 백발은 면류관 같다.
[약력]
*구미새빛교회 시무장로
*월간 <문학세계> 등단
*문학세계문인회 정회원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정회원
*활천문학회 정회원
*활천사 운영위원
*활천문학상 수상(2021)
*수필집 <생각의 삽질>(2016)
<가족의 힘으로 걷는 삶의 올레길>(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