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나의 대학시절의 초상화(1)
1977년 말 재수를 하고서도 서울대 입시에 낙방하고 나서 나는 2차 대학인 한국외국어대에 원서를 접수하기 위해 전철을 타고 동대문구 이문동 휘경역에서 내렸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약 300여미터 떨어져 있는 외대 캠퍼스를 바라다 보았다. 처음 본 외대 캠퍼스는 생각보다 무척 웅장하게 보였다.
나는 외대 캠퍼스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나의 발걸음에는 맥이 풀려 있었다.
평상 시 같으면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그 곳에 도착하는 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 마지못해 원서를 접수하고 나서 잠깐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근데 그 캠퍼스가 보기와는 달리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위축될 대로 되어 있던 나의 마음은 더욱 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눈이 막 내릴 듯한 흐릿한 겨울날씨를 배경으로 멀리서 웅장하게 보이던 그 건축물들이 사실은 인근 경희대 캠퍼스에 자리잡고 있는 왕관 모양의 음악당과 부속 건물들이었던 것이다.
두 대학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장 위에는 녹슬은 철조망이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외대 학생들은 경희대를 '별장'이라 불렀고, 경희대 학생들은 외대를 '화장실'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외관 상의 차이를 더 이상 설명해서 무엇하리!
외대 캠퍼스에는 마치 어린애들의 조막손 같은 레고 장난감 같기도 하고, 모양새 없는 성냥갑 같기도 한 단조로운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광활한 관악캠퍼스에서 청운의 꿈을 펼쳐보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나로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정보다도 별로 나을 게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자업자득인 것을!
합격자 발표장에 가보니 영어과 정원 95명의 합격자 명단이 개미처럼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게시되어 있었고, 그 속에 나의 이름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나를 축하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뿌린 대로 거두리라',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는 옛 속담과 잠언들이 어찌 그리도 딱 들어맞던지...
고교 재학 시절 자신의 능력만 믿고서 자만하다가 자신의 실력을 닦는 데 소홀한 대가는 정말 가혹했다.
(훗날 이는 나에게 평생의 교훈이 되었고, 나의 두 딸에게도 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조언하고 있다.)
합격은 했지만 이제 등록금이 문제였다.
그 당시 돈으로 20만원이 채 안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서울대 등 국립대의 등록금이 불과 4-5만원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는 약 5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형님(충옥·교육학박사·경기대 교수·전 한국청소년개발원장)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동생이 워낙 원망스러워던지 "아이고, 바보같은 놈! 너는 내 동생도 아니야! 거기가 대학이야! 등록금이 어디 있어? 아예 군대갈 생각이나 해!"라고 하는 등 엄청나게 화를 냈었다.
정말 대학에 입학이나 할 수 있을지 조차 불투명했다. 나도 완전히 '케쎄라 쎄라'의 심정일 뿐이었다.
자상하신 홀어머님과 억척같은 큰 누님(충경·주부·진해 거주)의 덕분으로 1978년 3월초 나는 찜찡한 기분으로 대학생이 됐고, 그 이후 4년간 '맨발의 청춘'으로 파란만장한 '고학의 대장정'에 올랐다.
- 재수 기간 내내 하도 벼룩에 물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남가좌동의 지하 단칸방,
- 주인 여자가 유난히도 유세를 떨던 서대문 불란서대사관 담벽옆의 두칸짜리 하꼬방집,
- 연탄불을 아무리 열심히 갈아도 네루식 연탄불이 하도 자주 꺼져 이불 3장을 덮고도 덜덜 떨어야 했고, 아침에는 얼음장 같은 찬물에 머리를 감아야 했던 대방동 전철역 인근의 '넓디 넓은' 냉방집,
- 감방살이를 하던 누나가 10.26사건 직후 풀려나 오랜 만에 3남매가 해후를 했을 때, 쪼그리지 않고서는 제대로 잠자기조차 어려웠던 이문동 외대앞의 단칸방,
- 항상 연탄 난로를 피워놓아도 춥고 어둑침침했던 종로 3가 비원앞의 2층집,
- 형님이 경기대 전임강사로 첫 발령을 받은 덕택에 지금까지 살아본 집들 가운데서 최고급인 수원 팔달문 인근 정자동에 마련한 2층 양옥집. 이곳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를 20분간 타고 수원역으로 가서, 전철을 2시간 가까이 타고 가야 하는 장거리 여행코스였지만 행복에 겨운 집이었다.
- 형님이 결혼한 후 누나와 함께 몇 개월간 기식했던 대방동 전철역앞의 서민아파트,
- 형님이 미국 유학 길에 오르자 누나와 함께 이사했다가 부실공사로 수도가 동파돼 집안이 온통 얼음판이 돼버려 집주인과 대판했던 부천 인근 소사동의 연립주택,
- 누나가 시집가게 되면서 나홀로 허름한 한옥인 외대앞 하숙집으로 옮긴 일 등등.
6개월 단위로 전세값을 올려달라는 통에 1년에 평균 2차례 이상, 무려 9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던 '피란살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동가숙 서가숙' 하면서,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나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아래 온갖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러나 2차 대학에 진학했다는 자괴감에 더해서, 금지옥엽으로 간직했던 나의 첫사랑 K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신입생이란 환희에 젖기 보다는 날개가 꺽여 한없이 위축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이화여대 사회학과 4학년이던 둘째 누나(정순·웅진그룹 전무, 인재개발원장)가 교내 채플시간에 유신반대 데모를 주동하다 잡혀가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재수할 무렵부터 시작해 누나는 현장체험을 한다면서 방학기간 중 봉제공장에서 '씨다' 생활을 하기도 했고, 학기 중에는 야학교사로 나가면서도 무식하고 봉건적인 촌놈인 나를 의식화 시키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누나는 잡혀가기 직전까지 틈틈히 우리 자취집에서 서울대생과 이대생이 주축이 된 7-8명이 모여서 당시 금서였던 '페다고지'를 원서로 읽으면서 세미나를 가졌었다.
그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담배를 얼마나 태워대면서 토론에 열중했는지 세미나가 끝나면 재떨이에는 거의 필터까지 다 태운 담배꽁초가 산을 이를만큼 수북하게 쌓여있곤 했다.
그들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K씨는 중앙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청와대수석으로 입성했다가 구속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나는 당시 운동권으로 발이 넓었던 누나의 소개로 동대문의 한 교회에 소속돼 있던 이념서클에 가입했다.
당시 서울 시내 각 대학에 다니던 20명 안팎의 선배 및 동료 학생들과 읽고 토론한 책들은 '역사란 무엇인가', '8억인과의 대화', '전환시대의 논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어느 돌멩이의 외침', '전태일 분신사건', '노동의 역사', '창작과 비평' 등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하는 입문서였다.
나는 영어를 전공했지만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반면 형님과 누님 덕분에 사회과학 관련 서적들을 훨씬 더 탐독하게 되었다.
툭 하면 해야 하는 이사 때마다 소장한 책들이 하도 무거워서 낑낑거리기도 했지만, 그 책들은 우리 3남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 때의 영향으로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놓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독서를 생활화 할 수 있었다.
누나와 형이 잇따라 결혼을 하게 되면서 쌀포대 20여개 분량의 이 책들을 진해도서관에 기증하려고 보냈었다.
근데 도서관측에서 오래된 책이라면서 기증받기를 거절해 아깝게도 종이값으로 고물상에 넘겼다는 얘기를 뒤늦게 어머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소위 '와이루'에 멍이 들었다. 비록 사회과학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커가면서 뭔가 우리 사회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었다.
반장으로 선출되고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 자리를 빼앗겨야 했고,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는 우등생 대표를 맡으면서도 외부상 하나 못 탄 것이 억울해 끝내 울음을 터뜨려야 했던 일들이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하다.
이런 사건으로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반드시 정의감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우리 집사람은 나와 결혼하자마자 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해직당했다가 약 5년만 복직했다. 형수의 소개로 명동 대연각호텔 지하에서 당시 동북고 영어교사였던 집사람과 만나 딱 3번 데이트를 한 후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사귄 지 6개월만에 결혼했다. 여기에는 어린시절의 와이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서로 공유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인지 당대의 필독 이념서적들을 읽을 때마다 독재정권의 부당성과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해 분노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환상을 깨게 됐다.
한글을 깨우치면서부터 '대통령=박정희'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왔던 나는 이제 유신정권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반정부 학생으로 극에서 극으로 변신했다.
(훗날 기자생활을 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빛과 그림자,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됐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진해 출신 여성학자인 이효재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누나에 의해 극히 보수적이고 봉건적이기 까지 했던 나의 여성관이 여지없이 깨졌다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은 물론 여성운동에도 매진하던 누나로부터 내가 돼 먹지 않게 가부장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누나는 "니가 배고프면 니 손으로 해 먹어라. 여자라고 해서 내가 반드시 식사를 준비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아예 식사마저 챙겨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이때부터 밥짓기, 빨래하기, 시장보기 등을 직접 떠맡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고 여성관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
누나가 잡혀가자마자 나는 마음의 상처를 달랠 겨를도 없이 엄청나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시장 보랴, 빨래하랴, 밥 해먹으랴, 학교 강의 들으랴, 누나 감방 면회 가랴, 재판 참석하랴, 아르바이트 가랴, 학생운동 하랴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몸부림쳤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잡초같이 강인한 자세로 하루 하루를 견뎌나갔다.
하지만 내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폭음하는 횟수도 잦아졌고, 뚜렷한 삶의 나침반도 없었다.
춥고 배고프던 당시에 부산 출신으로 경북고를 나오고, 같은 과의 절친한 친구였던 Y의 하숙집에서 '빈대' 생활을 하면서 신세를 크게 졌었다.
(근데 그렇게 착하디 착한 Y가 지척에 있는 여의도 국회앞 빌딩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 약 10년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가슴이 너무도 아프다.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
이런 고달픈 생활 속에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서 새내기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1학년 2학기말 어느날 나는 불교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돈오(頓悟)'에 가까운 체험을 하게 되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너무나 안이하고, 나약하고, 사소한 문제로 쓸데없이 방황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문득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내가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뭔가 될 사람이라면 서울대가 아닌 외대를 나왔다고 안 될리도 없고, 안 될 사람이라면 외대가 아닌 서울대를 나와도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또 "외대에서도 일류가 못 되면서 서울대 타령이나 하고 있다면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서울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더 많겠지만 여기 외대에도 우수한 인재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그래! 우선 여기서 일류가 되고 나서 보자!"라는 생각이 들자 삶에 대한 왕성한 의욕이 다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나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