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아고스티노 성당(Chiesa di Sant’Agostino)
나보나 광장에서 멀지 않은 산타 아고스티노 성당은 1483년에 콜로세움에서 뜯어온 석재를 이용하여 건축한 성당으로, 벽에 걸린 카라바조의 ‘순례자들의 성모’와 성당을 지주하는 기둥에 걸린 라파엘로의 ‘선지자 이사야’를 보기 위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오전 미사를 하고 있는 산타 아고스티노 성당에 신도가 몇 되지 않는 것은 프랑스나 여기나 비슷하다.
1420년에 착공하여 63년 만에 완성한 성 아고스티노 성당은 아고스티노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정면은 피렌체의 산타 노벨라 성당을 건축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설계로 1483년 피에트라산타가 건축하였고, 정원과 측면 수도원은 1746년과 1750년에 추가 되었다. 삼랑식(三廊式)인 성당 내부는 좌우의 측랑에 10개의 소성당과 4개의 소성당이 제대와 압시대를 중심으로 위치하며, 정문에는 성 요한과 성 아고스티노가 예수를 안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부조되어있다.
331년 아프리카 북쪽 타카스테에서 태어나 로마 오스티아에서 선종한 아고스티노 성인의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는 신앙심이 두터운 명문 출신이었으나 집안은 매우 빈한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공부한 모니카는 관리지만 세례를 받지 않고 난폭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던 파트리지오와 혼인을 했다, 결혼 후 파트리지오는 모니카의 삶의 모습에 감동 받아 죽기 1년 전 세례를 받았고, 방종한 아들인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개심하여 세상의 빛이 되었다.
이 성당의 중앙 제단 아래에 묻혀있는 모니카는 방종했던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설득하여 가톨릭 4대 교부의 한 사람인 성인으로 인도한 성녀로, 아프리카 사람이라 그녀의 초상은 검게 그려놓았으며, 성당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발소리 죽이고 살금살금 신부 뒤로 가서 성당 내부를 살펴보고 좌측으로 나오니 벽에 전성기 때의 카라바조가 그린 ‘순례의 성모자’가 약간의 어둠속에 걸려있다.
순례자들의 성모(Madonna del Pellegrini)는 맨발로 아기 예수를 든 성모가 순례중인 두 농부에게 발현한 것을 그리고 있다. 남루한 차림에 맨 발인 남녀 순례자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카 라바조는 성모의 얼굴을 자신과 친한 밤거리 여인을 모델로 그려 논란이 되었고 성화를 그리면서도 무릎을 꿇 은 순례자를 의도적으로 평범한 사람 으로 그려 비난도 받았으나 그는 성 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장삼이사(張三 李四)로 그렸다.
이사야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BC 742년경에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위협한 것이 믿음을 저버린 백성들에게 주는 경고라는 예언을 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자신이 그런 메시지를 대중에게 선포하면 심한 배척과 악의에 찬 불신과 조롱을 겪게 될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기꺼이 이 소명을 실천한 예언자였다.
프레스코화인 ‘선지자 이사야’는 라 파엘로의 작품으로, 히브리어 문서를 들고 유대인들이 겪어야할 시련의 시 기와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는 모습 이다. 2번이나 덧칠을 했다는 이 작 품은 1960년대에 원상 복구한 것으 로, 근육질의 남자로 표현된 이 프레 스코를 보면, 라파엘로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업과정을 훔쳐보면서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준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Chiesa di San Luigi dei francesi)
나보나 광장에서 멀지 않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은 프랑스국왕으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루이 9세(1214-1270)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1518년에 착공하여 70년 만에 준공되었으며 규모는 50m 길이에 35m 폭으로 크지도 않고 뒷골목에 자리 잡아 대규모 성당에 비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술 애호가는 로마 방문 시 필히 찾아가서 북적대는 관람객에 끼어서 2유로를 지불하고 카라바조의 3부작 그림을 봐야 한다.
한때 프랑스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프랑스 국립교회로 사용 중인 이 성당은 외관에 비해 화려한 천정화와 성화를 자랑하는 성당 내부에는 프랑스 추기경 콘타렐리의 주문으로 바로크의 거장인 카라바조가 1600년에 그린 ‘마테오의 소명’, ‘마테오와 천사과 ‘마테오의 순교’라는 3부작 유화가 제단 좌측의 콘타렐리의 무덤을 안치한 그의 경당에 걸려있다.
마테오의 소명
‘마테오의 소명’은 어둠속에 서있는 예수가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받치는 세리(稅吏) 마테오에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그림이다. 다섯 명의 세리 가운데 중앙의 한 젊은이들은 의아해하는 표정이고 또 한명은 놀란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좌측의 두 사람은 누가 누구를 부르든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오직 동전을 헤아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다. 베드로에 가려져 상반신이 겨우 뵈는 젊은 예수는 손을 뻗어 마테오를 지명하고 있다. 마테오는 예수의 부름에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예수를 쳐다보고 있으나, 창으로 들어와 마테오를 비추는 우측의 빛은 어둠의 세계에서 밝은 세계로 오라는 신의 소명인가?
‘마테오와 천사’는 양쪽의 두 작품을 완성한 뒤 1602년에 다시 성당의 주문에 응해 그린 그림이다. 천사의 영감을 받아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마테오와 천사’ 처음 그림은 소실되어 사진만 남아 있다. 소실된 처음 그림은 마테오를 무식하고 글도 모르는 사람으로 그려 교회에서 퇴자를 맞았고 다시 그린 그림이 지금의 그림이다. 천사는 십자가 형태의 모습인 마테오에게 종려나무를 내려 보내고 있으며 성당의 창에서 내려오는 빛이 마테오를 비추고 있다.
카라바초는 밀라노 근처의 카라바 출신으로 11세에 고아가 되어 거리의 화가로 출발하여 26세부터 37세까지 활동한 화가로 괴팍한 성격이었다 한다. 특히 자신의 화풍을 모방하는 아류 작가들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나빠, 로마 체류 10년 동안 정식 입건만도 10건에 달했고, 테니스를 하다가 우연히 살인을 저질러 4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도피 생활 중에 곳곳의 교회나 수도원에 숨어들어 그림을 남겨, 특별전을 해도 10여 점 그림을 모우기가 어렵다.
그는 50여 점의 그림을 남겼으며, 캔버스에 그림 그림이 반 정도이며, 나머지는 프레스코화다. 그가 처음 시작한 강열한 명암법은 인공조명(촛불)을 사용하여 마치 서치라이트를 비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보다 30여년 후배 화가로 그의 영향을 받은 렘브란트는 다작인데 비해 그는 과작의 희소성으로 대접을 받는다. 마테오의 순교는 이디오피아에서 사역 중 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마테오의 순교
십자군들이 어마어마한 요새를 축성하고 300 여년을 버틴 몰타에서는 ‘기사가 되면 한 번의 살인죄는 용서가 된다.’는 규정 때문에 그는 몰타에서 기사가 되어 몰타에 세례 요한의 참수 장면을 그린 대작이 있다. 이 그림은 유일하게 작가의 서명이 있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는 동료기사와의 다툼으로 투옥되었다가 탈출하여 시칠리아로 도망쳤고 기사 작위는 박탈당했다.
지친 그는 1610년 그림 세편을 사면조건으로 내건 보르게세 추기경을 찾아가다가 포르토 에르콜레 항구에서 말라리아로 사망. 수많은 기행 때문에 이단아의 삶을 살았지만 교황의 총애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그는 37세로 요절한 천재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채색에 들어갈 정도의 타고난 솜씨로 사후 100년 간 그를 능가하는 화가가 없었다.
모델은 주변의 사람을 써서 현실감과 생동감이 있으며, 조명을 한 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치 무대조명처럼 몇 개의 조명을 동시에 사용하여 엄청난 명암의 차이로 선명도를 살렸다. 이처럼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방식을 어둠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테네브레에서 따온 테네브레즘이라 불리며, 17세기 유럽에 널리 퍼졌다. 가톨릭은 성인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그림으로 복음전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매너리즘에 빠진 화풍과 회화에 신물이 나서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현실에서 소재를 취해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당대에는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자연주의자란 비난을 받았다.
미술평론가는 그가 빛을 이용하기 시작한 중요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 발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으며, 당시에 로마 최고의 화가가 되었는데 그의 사후 300여 년간 잊혀 졌다가 20세기에 재 조명되어 근래의 평가는 외람되게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버금가는 대 화가로까지 화제에 오른다. ‘의심하는 성 토마’에서 노동자였던 세 사람의 사도가 예수의 옆구리를 손으로 찔러보고 놀라는 표정은 지금까지 거룩한 모습으로 그려진 사도들의 모습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사기꾼들의 표정을 기막히게 잡아 화면에 옮긴 ‘사기도박사’와 노동자였던 세 사람의 사도가 예수의 옆구리를 손으로 찔러보고 놀라는 표정은 지금까지 거룩한 모습으로 그려진 사도들의 모습을 현실로 끌어내렸다는 ‘의심하는 도마’를 올린다.
의심하는 도마
사기 도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