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력願力이 머문 자리
원효대사는 무슨 심오한 뜻을 가졌기에 금호읍 냉천리의 물줄기를 팔공산 중턱까지 끌어올렸을까.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탈레스의 '일원설'을 신봉했음일까? 냉천수冷泉水는 사시사철 쉼 없이 솟아올라 원효암을 속칭 '냉치절'로 불러왔다. 냉천수를 들이켜며 대사의 사상에 빠져보리라.
경내에 들어섰다. 원효암 주지, 활안活眼 스님이 낯선 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암자 입구, 사자루에 앉았다. 조신한 보살이 청량한 냉천수를 소반 위에 들여놓았다. 스님이 직접 달인 차 향이 그윽하다. 스님과 독대의 행운을 얻었으니 선문답이 이를 두고 이름일까.
"스님, 갓바위 명성에 가려 천년 고찰인 원효암의 빛이 바랬습니다. 일천 삼백여 성상 동안 가살궂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의연히 버텨온 원효암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습니다. 암자의 역사와 얽힌 설화를 듣기를 원합니다." 주지 스님은 법문과 곁들여 원효 사상, 원효암의 유래를 실타래처럼 풀어낸다.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특정 종파에 치우치지 아니한다. 원효는 모든 종파의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다양한 이론을 종합하여 합일에 힘을 썼다. 대사의 무애無碍행보는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평민에게 깊숙이 파고들어 민중을 교화했다. 토론은 치열하되 자기의 주장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합리를 추구했다. 원효의 화쟁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만고의 진리로 매김하고 있으니 대사의 탁월한 식견을 거론해서 무엇하리?"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오늘의 사회상을 돌아본다. 한 마디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주장만 있고, 타협이 없는 세상이다. 주지의 법문은 사시예불巳時禮佛시간이 도래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 책을 정독하면 승려와 강론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원효 사상』 논문집을 건네준다. 기독교에 적을 둔 사람으로 마음 한구석이 찔려왔다. 그러나 '성철스님 탐독서는 성경이다'는 말로 포장함은 견강부회牽强附會와 다를 바 무엇이랴.
원력으로 세운 원효암의 내력이다. 암자는 조계종인 은해사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668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조·조선조·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알 수 없다. 내가 밝혀낸 원효암의 근대사다. 나라를 찾았지만, 이념의 대립으로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절이었다. 남로당을 축으로 한 무장공비들이 원효암 뒤, 양시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1949년, 하룻저녁에 박사리 청·장년 38명을 죽이고 28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소위 '박사 사건'이다. 가까이 자리 잡은 암자는 오죽했으랴! 공비들의 잦은 출몰에 스님들은 목숨을 보전코자 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소탕되고, 6·25를 전후하여 신만춘이 이 절에 머물렀다. 뒤이어 전북 임실이 고향인 속명, 김실곤이 암자를 관리했지만, 승적이 없어 조계종 교구본사가 암자를 접수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유형문화재 제386호인 마애불磨崖佛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생의 끝자락을 부여잡듯, 매미 울음이 처절하다. 오르는 길목 바위틈에서 샘물을 토해낸다. 돌돌~ 속삭임이 정겹다. 참배객들은 맑디맑은 샘물을 정화수로 삼으리라. 집채만 한 바위 한가운데 좌정한 마애불이 근엄하다. 세월에 부대껴 이목구비는 흐렸어도 형상만은 또렷하다. 이마에 굵게 팬 흉터가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의 장난일까. 석굴암 부처도 이 같은 수난을 겪었다. 섬나라 사람들이 부처가 뿜어내는 광채에 눈이 부셔, 조업에 지장을 핑계 삼아 보석을 도려냈다 하지 않았는가. 마애부처는 현세보다 내세를 관장한다. 중생은 현세이면 어떠하고 내세면 어떠하리. 보살 한 분이 절을 한다. 108배인지 3,000배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녀의 적삼은 땀으로 푹 젖었다. 무아지경에서 참배하는 모습에 빨려들어 어느새 두 손이 포개진다.
어머니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당신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보다 마애불상 앞에 서기를 좋아했다. 내부가 화려한 극락전은 시골 아낙으로서 버거웠을 것이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마애부처가 다가서기 편했을 모양이다. 당신의 여정이 인고의 삶이었기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 터다. 어머니의 기도 장소는 비단 마애불만 아니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어머니는 경전의 깊이를 알 턱이 없다. 마음을 위로받고 의지가 된다면 모두가 부처였고, 기도의 장소였다. 만 번을 기도하면 소원을 이룬다는『법화경』의 가르침에 따라 지문이 다 닳도록 두 손을 비볐을 것이다.
주지 스님과 함께 유서 깊은 냉천冷泉 앞에 섰다. 냉천의 설화이다. 원효가 사찰을 창건할 때, 암자 뒤 능선에 올라 동녘을 살폈다. 대사의 눈에는 금호읍 냉천리를 끼고 굽이치는 물결이 아슴하게 다가왔다. 서늘한 물줄기는 원효 주위를 감돌았다. 영감을 얻어 샘을 팠으니 이것이 냉천이다. 원효암을 냉천사冷泉寺사라 칭함은 그것이 유래이다. 우물은 시멘트 뚜껑으로 굳게 닫혀 있다. 천연기념물로 보존할 모양인지…. 천 년 샘을 버려둔 채, 지하수를 개발했다. 대사가 판 우물을 하루빨리 복원하겠다는 스님의 말씀이 반갑다.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물이 그득하다.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휘감는다. 우물 내벽을 PE 관으로 보강했다. 쌓아 올린 석축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을 터이다. 줄자를 내려 봤다. 샘의 깊이는 정확히 2m 50cm이고, 지름이 1m다. 팔공산 중턱까지 수맥을 끌어올린 대사의 원력이 경외롭다. 원효는 이 물을 들이켜며 수도에 정진했으리라.
원효암의 냉천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줄기를 놓지 않았다. 대사가 창건한 사찰마다 물이 넉넉하다고 전해온다. 가까운 불굴사도 그렇다. 사세가 번창할 때, 물레방아 여덟 대를 돌렸으니 수량이 짐작된다. 불광산 척판암의 풍부한 물흐름도 이를 반증한다. 원효는 풍수지리도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을 모양이다. 대사는 원효암을 지으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 풍수지리와 서출동수西出東水,‘서쪽에서 나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약수로서 무병장수한다’는 것을 굳게 믿었을 터다. 『정감록』의 저자도 원효에게 한 수 배우지 않았을까.
원효의 화쟁 사상이 합리를 추구하듯, 물도 자연을 거역하지 않고 순리를 따른다. 대사가 험준한 능선까지 물줄기를 뽑아 올린 것은 화쟁 사상과 물과 합일에 방점을 찍지 않았을까. 대사의 원력을 이곳에 송두리째 들어부었을 터다. 대사가 민중을 존중하듯, 물 또한 삼라만상에 골고루 스며드는 것을. 평범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 듯하다.
경내를 벗어나 하산길이다. 잠시나마 진지했던 마음밭에 사바의 상념들이 독버섯처럼 돋아난다. 깨닫고 작심하기까지의 시간은 길었지만, 마음 뜰에서 떠나는 시간은 찰나이다. 우매한 중생의 정수리에 스님의 목탁소리가 비수 되어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