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6/200201]고스톱은 릴랙스한 생활의 여기餘技
최근 장례식장의 문상問喪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먼저 좌식坐食식탁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식당들이 대부분 입식立食식탁으로 앞다퉈 탈바꿈을 하는 까닭은 나이 든 손님들이 좌식을 불편해 하며 싫어하기 때문일 터. 또한 신발을 벗어야 하고, 앉아서 일어날 때마다 ‘아이구야’ 비명을 지르는 노령老齡인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기도 할 터. 지난해 어머니 상을 치른 대학병원도 좌식과 입식 식탁이 반반이어서 생경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느 장례식장을 가도 이제는 화투(고스톱)를 치는 문상객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거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을 밤새 위로해준다는 미명美名으로 내려왔던, 어쩌면 누구나 공인하던 미풍양속의 하나일 수도 있던 풍습이었건만. 어쨌든, 개인적인 호오好惡를 떠나서 변화라면 큰 변화일 것이다. 요즘에는 문상을 가면 한번쯤 고스톱 치는 풍경을 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어릴 적 내가 자란 고향의 명절풍경은 동네마다 농악대農樂隊가 풍악風樂을 울리기도 했건만, 그것은 언감생심. 어찌된 일인지(그 이유를 왜 모르랴?) 어느 때부터인지(기억도 가물가물) 동네앞 마당에서 시끌벅적하게 윷놀이하는 풍습도 사라졌다. 덕석(멍석) 위에 숯으로 어설픈 윷판을 그려놓고, 깍쟁이(종지)에 작은 윷 네 개를 담아 과장된 제스처로 던지던 그 동네청년, 어르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초저녁부터는 사랑방에서 ‘동양화’를 놓고 그림 맞추기가 한창이었다. 객지에서 내려온 귀성객들도 ‘그 한판’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으련만, 아아, 오직 서글픈진저!
어제 오후, 꾀복쟁이 친구(북조선에서는 짜개바지 친구라 한다)를 은근히 꼬셨다. “야, 설도 쇠었는데, 동네형님 두 분과 고스톱이나 한판 치자” “좋지” 하여, 마을회관에 모인 다섯 명. 시골은 7시만 돼도 깊은 밤이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 “니 덕분에 진짜 오랜 만에 화투짝을 손에 잡는다야. 허는 법도 잊은 것같은디.” “자, 룰을 정하자. 그리야 싸움이 없지. 가리(외상)는 절대 없기” 오고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우정이 아니던가. 점당 100원, 그러니까 기본 3점이 300원. 3표 흔들고 피박, 광박은 무조건 따블. 첫 뻑은 500원, 둘째 뻑은 1000원, 셋째 뻑은 2000원(단, 연속이어야 한다). 동시패션은 피 한 장씩. 조커는 게임의 흐름상 3장으로만 하자(한 목에 6장이 들어있다). 따딱(자기가 내놓고 자기가 먹는 것)은 피 한 장씩 안주기. 피 한 장씩 줄 때,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쌍피뿐이면 쌍피를 줘야 한다. 네뚱이(같은 게 넉 장)는 참가자 모두 1000원(그걸로 쳐서 점수가 나면 모두 네 배인 따따따블을 줘야 한다). 5광은 15점이니 참가자 모두 1500원(그것으로 쳐서 점수가 나면 5배). 상한가는 1만원. 광 팔기(광·조커와 쌍피)는 1개에 200원(넉 장이면 800원). 또 하나는 연사連死금지의 법칙, 자기가 칠 차례에 연속으로 두 번 죽기 없기. “자, 이 정도 정했으니 시작하자. 12시까지만 치자. 기본 참가비 2만원씩 보여 봐라잉” 동네 형님은 자신만만, 판돈 8만원만 걷어 가겠단다. “딱 천원만 딸란다”는 친구, “내 판돈 제발 좀 따가라”는 친구들의 흰소리가 난무하면서 판이 달구어진다.
고스톱은 일단 재밌다. 절대로 노름이 아니고 친목놀이임을 명심하자. 왕년엔 명절에 가족끼리(3대가 함께 치기도 했다) 유일한 오락娛樂이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함께 화투(그때는 민화투가 대부분, 노름꾼들은 ‘섰다’를 치면서 표를 죄었다)를 치면서 실제로 했다는 말도 기억하리라. “아버님, 똥싸셨네요?” “다음판에는 똥 먹으세요” “인자 죽으세요” 게임 중에 희비喜悲가 엇갈리면서 오고가는 말들 때문에 또 울고웃곤 했다. 말하자면 ‘말의 성찬盛饌’인 셈. 기발한 말들이 마구 쏟아진다. 물론 돈 잃고 기분좋은 사람은 없을 터이지만(머리 나쁘다고 흉을 보면 절대 안된다. 이것은 IQ문제가 아니고 순전히 운칠기삼運七氣三이고, 뒷장이 맞아줘야 하는 것이다), 큰돈을 잃는 것도 아니고, 저녁내내 해봤자 기껏 3만∼4만원 정도일 터이니, “재밌게 잘 놀았다”며 손 털고 일어나면 그만인 것을. 말 그대로 오락이지 않는가. 자기가 칠 차례가 아니거나 앞에 사람이 죽어 밀려서 치기도 한다. 광光과 조커 , 쌍피(국진과 오동 열끗, 비 껍질)를 파는 재미도 쏠쏠하다. 표가 나쁘다고 반드시 지라는 법은 없다. 3학년 3반(같은 표가 석 장씩 들어옴)도 장원이 될 수 있는 게 고스톱이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치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더 따기도 한다(넉 장을 팔면 1600원을 번다. 죽어라고 머리를 써 기본 3점이 나봤자 바가지를 못씌우면 600원 벌지 않는가). 조커가 들어오면 내려놓고 한 장을 빼올 수 있으니 엄청난 특혜다. 온갖 경우의 수가 다 나온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고수高手’들인지라, 쓰리고와 오광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표 넉 장을 손에 쥐고서도 '쇼당show dowm'을 시키는 것을 보았고, 피박에 광박에 폭탄으로 흔들어 8배를 물어주거나 '독박'을 쓰는 '깨쪽'도 당했으며, ‘나가리’(누구도 3점이 못나 다시 치는 것) 한번 없는 진기록도 세우는 것도 경험했다. 나는 결국 12,000원을 잃었지만, 넷뚱이도 나오고, 상대방에 피박도 몇 번 씌우기도 했으니 그저 자기위안을 삼을 수밖에. 나는 개인적으로 고스톱이 걸판진 윷놀이나 밍밍한 민화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카드(서양화)'나 '섰다' '지꼬땡'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놀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기른 복분자로 담은 술 한두 잔씩 오가는 풍경을 그려보시라. 얼마나 재미가 오부지겠는가. 사람 살아가는데 ‘최소한’ 이런 맛이 있어야 하거늘. 오늘 내가 고향에 내려와 왕년의 풍경을 복원한 까닭이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시간은 금세 흘러간다. 12시가 넘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찢어졌지만,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인자, 추석날 저녁에나 손 한번 맞추려나? 이제 곧 입춘이 지나면 봄은 또 영락없이 올 것이고, 눈코 뜰새없는 농사철이 기다릴 것이다. 농촌은 그렇게 또 늙어갈 것이다. 어느새 2월. 달력 한 장을 이 신새벽에 찢는다. 세월은 잘도 간다. 아이- 아이-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