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45) - 극작가 이윤택]
< 삶의 본질에 가닿는 시적 상상을 맘껏 부리리라 >
▣ 시
시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는데, 거기 몇 해 전에 극작가 겸 연출가로서 출연한 적이 있었다. 요즈음 어떤 연극을 막 올리고 있는가 등 근황을 묻던 시인이 문득 내게 기습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요즈음 왜 시는 쓰지 않나요?" 전직 시인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을 생방송 진행 중에 해버렸으니 더 이상 피할 도리가 없다. "시는 외로울 때 쓰여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외롭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보니, 엉겁결에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한 정답을 말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여덟 살 적부터 시를 써야 했다. 어릴 적부터 천재적 상상력이 있어서 시를 썼던 게 아니라 한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끝없는 가출과 유랑을 거듭하셨고, 어머니 홀로 나를 키우셨다. 글을 모르는 문맹자이신 어머니 덕분에 한글을 미리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글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한글 기초는 거의 뗀 상태였다. 2학년이 되어도 문맹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도 교실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7ㆍ5조 동시를 짓게 했다.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데는 짧은 글인 시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셨던 게 분명하지만, 지금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그 여선생님이야말로 내게 문학을 접하게 해준 최초의 선생이신 게 분명하다. 밖에 나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썰렁한 교실에 남아 일곱 자 다섯 자, 혹은 여덟 자 다섯 자… 이런 식으로 시를 적어나가는 소년의 심정은 참담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 열등감과 외로움 속의 글쓰기야말로 내 인생의 귀중한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국어를 딱딱한 말의 규칙과 습관적인 외우기로 배우지 않았다. 나는 모국어를 시로 배우는 감성훈련부터 받은 셈이고,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세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글쓰기를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글을 쓸 때 느끼는 참담함과 외로움이 싫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상처를 받거나 세상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면 두더지처럼 내 방에 틀어박혀 시를 썼다. 참 가소로운 자기변명과 원망으로 가득찬 글을 끼적거리면서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를 떼어놓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시는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를 인식하는 짓거리'란 나름의 시학을 터득하게 된다.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를 느끼면서 세상은 좀 더 분명한 모습으로 보이고, 세상의 속도 보이고, 세상 저 너머의 세계도 꿈꾸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삶은 보이는 현상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고 가로지르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개똥철학에 당도한다.
그러면서 현실로부터 받은 상처와 소외감이 하찮은 부스럼딱지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시는 나를 지키는 내 의식 속의 수호신이었다.
▣ 시와 극
연극을 하게 되면서 시와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내 의식구조상 당연한 길이었다. 연극을 하면서 나는 외롭지 않게 되었다. 나와 한솥밥을 먹고 잠자면서 더불어 함께 연극을 만들어 나가는 식구들이 생기면서 나는 '우리'란 삶의 울타리를 느끼게 되었다. 외로운 ‘나’를 ‘우리’란 공동체 속에 던지는 것이 연극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나를 소외시키지 못했다. 연극은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의 노동이고 설계였다. 세상의 온갖 모순과 부당함도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못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건설한다. 외로운 시인들이여, 세상의 추악함에 치를 떠는 불우한 몽상가들이여, 희곡을 쓰고 연극을 시작하라.
그리스의 시인들, 중세 유럽의 외로운 음유시인들이 다 연극쟁이가 되었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브레히트도 테라야마 슈지도 원래 시인이었지 않는가. 극을 짓고 연극을 꿈꾸어라! 그 점에서 내가 쓰고 연출하는 연극은 그대로 한편의 시라고 생각했다. 시적 리듬과 이미지가 연극의 기본이고, 독백은 그대로 한편의 시였다. 지구 역사상 최고의 시는 역시 셰익스피어의 ‘햄릿’ 장면 중 무덤에서의 독백으로 평가받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문득 우리의 연극 또한 미지의 바다, 험난한 협곡, 환상의 아수라장을 가로질러 가는 오딧세이의 항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경험한 세계를 글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쓰는 희곡이 단순한 공연 대본이 아니라 한 편의 극문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쓴 공연 대본 '오구-죽음의 형식' 한 장면이 대학국어 교재로 실렸을 때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나란히 실려 있는 '오구' 대본 한 부분은 이미 공연을 위한 대본 성격에서 독립해 있었다. 그건 연극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읽히는 문학적 상상력이었고, 활자로 남은 문헌적 가치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좀 어처구니없는 수상소감을 피력하게 된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희곡을 독립된 문학적 글쓰기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연출가이며 극단을 꾸려나가는 대표 입장에서 희곡은 공연을 위한 대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종의 글 품팔이인 셈이었지요.
오히려 한 편의 시를 쓴다는 생각으로 대본을 구성하고 연극을 만들어 왔습니다. 연극은 배우, 연출가, 무대 예술가들이 더불어 함께 만드는 시이며 노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수상을 계기로, 시적 상상력의 종합이며 우리가 더불어 함께 만드는 연극적 상상력이 극문학이란 장르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시와 영화
한 편의 영화를 찍고 나서, 다시 시를 생각한다. 나는 촬영기간 내내 촬영감독에게 새삼스럽게 시학을 설파하는 전도사가 되어야 했다. "저건 시야. 보이는 풍경에 집착하지 말란 말이야. 보이는 장면의 미장센보다 훨씬 넓고 깊은 심연(深淵), 그걸 관객들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찍어야 한단 말일세."
한 편의 시처럼 영화를 찍고 싶다는 나의 말에 처음부터 동의해 주는 촬영 스태프는 별로 없었다. 영화는 문학과 다르다는 것이고, 연극과도 다른 독자적인 영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영화는 문학과 연극 무용 음악 미술을 제외하고 나면 냉정한 현실을 투사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일 뿐이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 혹은 인간, 그리고 현실은 객관적인 실제성을 지닌다. 이 실제성(reality)을 영화의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나는 애초부터 영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이는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었다. 아니면, 현실의 뒤편이거나 속내에 드리워지는 인간의 의식과 느낌 같은 것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촬영을 끝내면서, 촬영감독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감독이 찍고 싶었던 것은 결국 판타지(fantasy)였어요"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전했다. "그건 포에지(poesy)일세. 포에지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문득 솟구쳐 오르는,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섬광 같은, 생각과 느낌의 총화, 우리가 시적(詩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인간의 정서적 환기력 같은 것 말일세. 나는 영화에 이런 인간의 생각과 느낌을 담고 싶었네."
문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엉뚱하게 연극과 영화작업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걸러진 생각들을 정리한 셈이다. 시 작업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내가 어떤 시를 썼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연극을 하건 한 편의 영화를 보건 "저건 시야!" 라는 말을 자주 뇌까린다. 그러면서 멀리서 시를 다시 바라보곤 한다. 그건 다시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비록 시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세상 속에서 시적 영감을 받고 느끼면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시적 영감이야말로 삶의 생기이며, 시적 상상력의 공간이야말로 단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설정하는 자기만의 해방구역이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영화 장면, 응축된 연극대사 몇 마디, 노래처럼 흥얼거릴 수 있는 시 한 구절은 시간을 버티면서 영원히 기억된다. 그 속에 삶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부패한다" 러시아의 위대한 영화작가 타르코프스키는 작업일지에서 그렇게 기록한다. 아버지는 시인이었고, 시인의 피를 이어받은 영화감독 역시 또다른 면에서 시인이었던 것이다.
< 이윤택 연보 >
♣ 1952년 부산 출생 ♣ 서울연극학교 연극과 중퇴 ♣ 1979년 '현대시학'에 시 '도깨비불' 등 3편 발표 등단 ♣ 1986년~현재 극단 연희단거리패 대표ㆍ1999년~현재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 시집 '시민' '춤꾼 이야기' '막연한 몽상과 기대에 대한 반역' '밥의 사랑' 평론집 '해체, 실천, 그 이후' '우리에게는 또다른 정부가 있다' 희곡집 '웃다 북치다 죽다' '도솔가' '어머니' 등 ♣ 동아연극상(1991) 서울연극제 연출상(1994) 대산문학상(1995) 백상예술대상(1995)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2) 등 수상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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