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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삼위일체 주일, 성결교회 주일)
말라기 3:7
은총의 수단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 설교문은 「존 웨슬리 설교 전집1」(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2006)에 수록된 존 웨슬리의 설교 문 “은총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을 각색한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 설교문을 1746년에 자신의 설교집에 수록하였고, 모라비아 교도들의 정숙주의와 외적인 의식을 경솔히 여기는 일부 메소디스트들을 염두에 둔 설교입니다(위의 책, 317쪽).
1.
어떤 젊은 부부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서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기독교 입양 기관을 찾아가 서류를 작성하고, 입양에 필요한 면접을 거쳤습니다. 드디어 돌봐 줄 가정이 필요한 열 살짜리 남자아이가 있다는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부부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부부는 아이에게 줄 방을 꾸몄습니다. 축구공과 배구공 무늬의 벽지도 새로 바르고, 예쁜 침대로 새로 들여 놓았습니다. 물론 남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도 잔뜩 사 놓았습니다.
입양일이 오자, 부부는 기관을 찾아가 잘 생긴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집으로 데려와 멋진 방을 본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스포츠 장비며 온갖 장난감과 침대, 예쁜 벽지,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행복해 보이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걱정이 가득한 굴이었습니다. 이상해진 부부는 아이에게 뭐가 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이걸 다 주신다고요? 이곳이 내 방이라고요? 좋긴 한 대, 그걸 받는 대가로 제가 뭘 해야 하죠?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출처: 토니 캠폴로, 「토니 캠폴로의 회복」(두란노, 2010), 28~29.
여러분은 이 아이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도 이 아이처럼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걸 다 주신다고요? 좋긴 한 대, 그걸 받는 대라고 제가 뭘 해야 하죠?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한다면, 과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요?
어느 날 밤, 미국 CNN의 라이브 토크쇼인 <래리 킹 라이브> 프로그램에 세계 적인 록 스인 ‘보노’(Bono)가 출연했습니다.
보노는 자신이 신실한 크리스천이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토크쇼의 진행자인 래리 킹이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가 여타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는 다른 종교에 없는 무엇이 있나요?”
이 질문을 받은 보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설명하는 방식은 달라도 결국은 응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죠.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대가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이 땅에서 지은 죄의 대가를 피할 수 있습니다.”
-출처: 위의 책, 24.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분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저의 전도를 받으셨던 한 할아버지입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라는 말을 듣자, 퉁명스런 표정으로 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내가 지은 죄를 예수님이 대신 져 줍니까? 그것은 너무 엉터리 같네요. 내가 죄를 지었으며, 그 죗값을 내가 받아야 정당한 것 아닌가요?” 이 할아버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그런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한 동안 쳐다보아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은 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은총의 수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응보의 종교’가 아니라, ‘은총의 종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총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져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好意)’이라는 신학적인 정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은총의 수단’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은총의 수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수단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기도’, ‘성경 연구’, ‘주님의 성찬을 받는 일’입니다.
2.
우리가 ‘은총의 수단’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은총의 수단은 그것의 목적에서 분리될 때는 아무 것도 아니며, 결국 헛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총의 수단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기도의 언어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먀주 대하게 되는 수많은 글자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귀에 울려퍼지는 소리들,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서 받는 떡과 포도주 안에는 전혀 특별한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의 아들들로부터 내려 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약 1:17).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언어들, 우리가 읽은 성경의 글자들, 우리가 올려드리는 찬양의 소리들, 우리가 성찬에서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능력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도의 언어, 성경의 글자, 찬양의 소리,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주시는 축복의 수단들일 뿐입니다.
만약 그러한 수단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선지자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만약 선지자가 잠잠하다면,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서라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서라도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돌리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온갖 수단을 다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죄를 속량할 수 없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할 다른 피나 샘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기도를 드리거나, 성경을 묵상하거나 탐구하거나 심지어 설교를 듣는다거나, 우리가 성찬식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을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해의 자리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수단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은총의 목적에 부합되는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총의 수단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경건의 능력은 사라지고, 경건의 모양만 남은 일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영적인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영적인 현실은 마치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아람 왕과 전쟁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큰 승리를 거두고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람 왕을 “형제”라 부르고, 그를 병거에 올려 태운 일과 흡사합니다.
비록 아합 왕은 전쟁에서 이긴 대가로 빼앗겼던 성읍들을 돌려받고, 아람에 사마리아의 거리를 만든 뿌듯한 전과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왕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그럴싸한 전과만으로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된 것입니다(왕상 20:32~34).
이러한 일은 망령된 일입니다. 옛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부터 우리가 돌아설 것을 권면하였습니다(딤후 3:35).
우리는 은총의 수단을 남용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총의 수단 속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어서, 그것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경계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은총의 수단에 참여하는 일이 결코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아 죄책과 실제적인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일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공로를 통해서 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총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총의 수단을 버리지 말고 사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기도로서 그분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여기서 “구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을 향해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수단은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은총의 수단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일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첫 번째 은총의 수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을 탐구함으로써 그분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행 17:11~12).
이러한 베뢰아 사람들의 모범은 하나님의 축복이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지를 밝히 드러내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0:17). 즉, 우리가 믿음을 얻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그것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경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총의 수단으로서 ‘유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질 수 있으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탐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두 번째 은총의 수단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성찬식을 재정하셨을 때의 말씀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우리가 성찬식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과 그분의 피로써 맺은 새언약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식에는 복음전파라는 선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1:28).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순종하는 자로 자신을 드리기 원하는지를 살피고, 의심을 없이한 후에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고 마시라.”는 지시가 단순한 허가가 아니라, 주님의 명백하고 뚜렷한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정해진 수단인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일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떡을 먹고 마시는 일’은 외적인 수단 즉, 가시적인 수단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행할 때,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됩니다. 곧 그 은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누리게 될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자는 누구나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식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세 번째 은총의 수단입니다.
4.
토니 캠폴로 교수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목회자입니다. 그분은 목사이셨던 자기 아버지가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이 있던 어느 주일, 우리 앞쪽에 앉아 있던 십대 여자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기에는 너무나 큰 죄를 지은 모양이었습니다.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 접시가 앞에 도착하자, 여자아이는 손을 흔들며 거절한 뒤 계속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목사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서투른 영어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어서 받아먹어라! 그것은 너를 위한 거야!”
여자아이는 마음을 추슬러 빵을 삼킨 뒤 나중에 포도주도 마셨습니다. 이제 여자아이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날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분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의 핵심입니다.
-출처: 위의 책, 22~23.
여러분은 아마 새 부모에게 입양된 열 살 짜리 남자아이가 이렇게 질문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걸 다 주신다고요? 이곳이 내 방이라고요? 좋긴 한 대, 그걸 받는 대가로 제가 뭘 해야 하죠?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만일 여러분이 새로 입양한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부부는 소년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우리를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너도 우리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뿐이야. 더 이상 네가 할 일은 없어. 이 방과 이 안의 모든 것은 그냥 우리가 너를 사랑해서 주는 거란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더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커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출처: 위의 책, 28~29.
5.
끝으로, 저는 여러분이 은총의 수단을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수단을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하시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은 아무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우리에게 그 은혜를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더욱 겸손히 그분의 나타나심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 수단에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수단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죽은,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그것은 마른 잎사귀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아무 공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일지라도 여러분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지 못합니다.
셋째로, 여러분이 모든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십시오.
모든 외적인 행동에서부터 오직 하나님의 영의 능력과 그 아들의 공로에 눈길을 돌리십시오. 그 행위 자체에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행위에 집착한다면, 모든 것이 헛된 수고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은총의 수단은 단지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총의 수단을 사용한 후에 어떤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스스로 기뻐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기뻐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독으로 바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찬미를 드리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기 원합니다. 아멘(벧전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