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15,16-23
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곡곡,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가 행복할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단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데,
사무엘 어법대로 바꿔 얘기하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저는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달리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거나 기껏해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자기애 곧 자기 사랑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아니고, 아직 하느님 사랑에 미치지 못한 사랑이기에 아직 완전하지도 완성되지도 못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을 하면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완성하게 하기에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자기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자기 사랑이 자기밖에 사랑치 못하는 것과 달리 자중자애 곧 자신을 진정 소중히 여기고 제대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를 보면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구차한 짓을 한 사울을 사무엘이 이렇게 나무랍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즉시 어제 2독서였던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성령의 성전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자기 사랑이고, 나를 진정 자중자애하는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웃 사랑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자기를 진정 사랑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십상이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나 어쩌나 눈치나 보는 사랑이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은 당당합니다.
나도 성령의 성전이요 너도 성령의 성전으로 사랑하고, 이웃이 좋아할 일이 아니라 이웃이 행복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일은 기실 하느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할 일을 하느님 안에서 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관습,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을 쇄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 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17-1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새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 이야기만 나오면 돌아가신 한 선교사 신부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체구가 크셔서 그런지 드시는 것을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굉장히 낙천적이고 유머 감각도 탁월하셨습니다.
자주 사용하시던 농담도 기억납니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은? 강론입니다.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은 맛있는 소시지입니다.
둘이 뒤바뀌면 최악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음식을 절제해야 하는 사순 시기만 되면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한번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피정 강의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순 시기에도 우리 살레시안들은 잘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제 머릿속은 큰 혼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잘 먹고, 그 힘으로 더 아이들을 사랑하고, 더 운동장으로 자주 나아야 합니다.”
교회의 규정에 따라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식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단식의 배경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르 2,18)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르 2,19-20)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분별의 잣대는 사랑의 예수님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
(시편 31,25)
밤마다 잠깨면 주님을 확인하듯 맨먼저 눈들어 확인하는 밤하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북두칠성과 북극성입니다.
어제 면담성사중 한 자매와 나눴던 시가 생각납니다.
법정(法頂)스님이 극찬했던 시요, 어느 사제는 수 페이지에 걸쳐 쓸 내용을 시에 담았다고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저 역시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저에겐 늘 저와 함께 계셔서 밤마다 매일강론을 쓰게 하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움과 갈망의 대상인,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단식논쟁을 말끔히 정리해 주시는 예수님은 삶에서 무엇이 우선적인지 새롭게 상기시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의 분별의 잣대는 사람이나 사랑이 아닌, 단식 자체에 있음을 봅니다.
절대적 가치는 사랑뿐이요, 분별의 잣대는 사랑인데, 이들은 단식을 그 잣대로 들이댑니다.
예수님은 명쾌한 답변으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해주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단식할 것이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가 있다는 것이요, 지금은 주님과 함께 기뻐해야할 축제의 때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지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구태의연한 사고를 참으로 유연하게 할 것을 바라십니다.
한마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기 위해 늘 새 부대의 마음이, 사고가 전제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일일우일신(日新又日新), 끊임없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요, 사랑이 분별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 일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절대적 법은 사랑뿐이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분별의 잣대로 삼아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생각하면 답은 곧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예수님 공부가, 사랑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평생공부가 예수님 공부요 하느님 공부요 사랑공부입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로 고백할 수 있는 주 예수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침 그 자매와 나눈 <사랑>이란 오래전 제 자작시도 나눕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
-1997.3
27년 시이지만 여전히 애송하는 사랑이란 시입니다.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사랑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이 아니라 늘 제자리를, 거리를 견뎌내는, 지켜내는, 버텨내는 고독한, 그러나 감미로운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 바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백하는 주님이십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해선 안됩니다.
말 그대로 죽어야 인생 졸업이요 죽어야 인생 제대입니다.
공부는,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깨어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전사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느님 중심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았어야 하는데, 오늘 제1독에서 사울은 이 점에 실패했습니다.
성소가 선물이자 평생 과제임을 잊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한 사울에 대한 하느님의 질책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였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늘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순종의 자세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늘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늘 예수님을 삶의 잣대로, 분별의 잣대로 삼고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며칠전 금요강론 시 나눈 대목이 생각납니다.
“규칙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할 법이다.
성서에 의하면 법은 하느님의 선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더불어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우리를 수고스런 우회로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표지판이다.
그것은 힘든 여정 중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철로와 같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법인 예수님을 늘 삶의 잣대, 분별의 잣대로 삼아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를 깨어 당신께 귀기울이게 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백하는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부대의 마음에 새 포도주의 영적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고해인생 중에도 빛나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으로 축제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50,23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봉성체를 가면서 근무력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몸은 불편하였지만, 마음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그 젊은이가 보내 주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제목은 <밤하늘이 있기에 별들은 더욱 아름답습니다>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연을 전하는 밤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이 밤하늘에서 가슴은 떨리게 하고, 얼굴엔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생 중에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단기기억 상실증’이 생겼습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불편할 거라고 했습니다.
신학생에게 ‘그런 몸으로 사제가 되면 많이 불편할 것’이라고 했더니 학생은 ‘제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서 2박 3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 신학생의 의지가 단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학생은 방에 많은 메모를 적어 놓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사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고, 주교님께서는 사제서품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주교가 되어서 신부님의 본당을 방문했더니 사목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교우들도 신부님이 더 있을 수 있도록 청탁(?)하였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제도 필요하지만 교우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제도 필요합니다.
저도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있었습니다.
저는 외적인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장님께 건의해서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했습니다.
사제성소를 위해서 ‘사제’라는 다큐를 제작해서 유튜브에 공개했습니다.
100만 명이 넘게 검색한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을 위해서 여름 캠프도 준비했습니다.
4번의 주교서품식을 준비하였고,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도 일하였습니다.
바쁘게 일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식별을 위해서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거나, 여행을 간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큰 행사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머물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비록 유혹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새 포도주는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명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숫양의 굳기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 포도주는 외적인 업적과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담긴 사랑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24년이라는 새 부대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관념과 습관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들의 선행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이해와 용서를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책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지만 읽지 않았던 책이어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분의 표정에서 실망이 느껴집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서 이 책도 읽지 못했냐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솔직히 약간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돈키호테 읽어보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히 읽었죠. 초등학교 때 이미 읽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 읽은 분을 보기 힘듭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돈키호테’는 전문이 아닌 극히 적은 내용만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 돈키호테는 전체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분량은 권당 700페이지가 넘습니다.
그래서 그 두께에 질려서(또 상당히 지루하기도 합니다) 곧바로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분은 돈키호테를 읽었다고 하셨지만, 사실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지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습니까?
유명한 책이라 해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판단은 주로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비교하면서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비교 자체가 잘못되는 경우도 많아서, 그 판단은 더 힘을 잃습니다.
특히 주님을 향한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많은가요?
주님의 이끄심이 잘못되었다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단식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다교 전통을 준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단식하는 사람은 열심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께 열심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은 형편없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며 못마땅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무조건 단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안에 담겨 있는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우리는 먼저 읽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이 자기 판단에 맞지 않다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고정관념이 헌 옷이며, 헌 가죽 부대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새 옷, 새 가죽 부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