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귀화 장수 '김충선(金忠善)'
사야가(沙也加 또는 沙也可)는 1571년(선조 4) 1월 3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선조 25)에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이때,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으며,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런데 그는 불과 며칠 만에 조국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의 장수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에 귀화한 조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왜군 중에는 조선에 투항해 왜군과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칭했다. 항왜는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조총을 비롯한 일본의 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사야가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야가가 남긴 자전적 가사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에 의하면, 그는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좌임향ㆍ격셜풍]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정벌하러 가게 되면서, 그는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야가는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결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의 선봉장이 되어 출정함에 귀화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그가 조선의 예의(禮義)와 문물을 사모하여 당호를 ‘모하(慕夏)’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조선의 장수 ‘김충선(金忠善)’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야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휘하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귀순한 후,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 등을 따라서 경주ㆍ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는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姓名)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사야가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거듭 태어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충선(忠善)’으로 지어졌다. 이처럼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일본 출신 귀화인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성씨와 이름을 부여해 조선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 권했다. 이때, 이름은 충선 이외에 향의(向義: 의를 향함), 귀순(歸順: 순하게 돌아옴) 등으로 정해졌다.
김충선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무기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의 무기를 돌아보니 정밀함이 적어, 이 병기를 가지고서 적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하여 전투에 활용코자 했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李德馨)ㆍ정철(鄭澈)ㆍ권율(權慄)ㆍ김성일(金誠一)ㆍ곽재우(郭再祐)ㆍ이순신(李舜臣)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총 등의 보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를 예로 살펴보자.
이순신이 조총과 화포 및 화약 제조법을 물은 데 대해서 김충선이 쓴 답서이다. 이후에도 김충선은 화포와 조총을 만들어 시험한 후, 각처에 보급하여 전력을 강화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으로의 귀화를 받아주고 특별히 벼슬과 이름을 하사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전쟁 후에 그는 우록동(友鹿洞)에 터를 잡고 생활했지만, 조정에 변고가 생기면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와 싸웠던 것이다.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에서 활약했던 김충선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의 충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시기에 김충선은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당시에 왜적 만여 명은 산음(山陰)에서 곧바로 의령으로 내려가 정진(鼎津)을 반쯤 건너고 있었다. 이때, 김충선은 명나라 병사 수십 명과 전사(戰士) 등과 합세해 왜적에게 맞섰다. 조선의 군병은 기세를 떨치며 싸웠으나, 곧 왜적의 습격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군이 마병(馬兵)으로 추격하여 포위를 하자, 조선 군병과 명나라 병사가 함께 포위된 위기 속에서 포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데에는 항왜들의 힘이 컸다. 당시의 전투에서 김충선도 적의 수급(首級)을 베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 시기에 김충선은 김응서(金應瑞)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면모를 보였다.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왜적의 꾀에 넘어가 명나라 병사를 위험에 처하게 한 김응서를 엄격하게 군율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자 김충선은 자신이 전공을 세우면 김응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군령장(軍令狀)을 보냈다. 그리고 실제로 3개월 후인 1598년(선조 31) 1월 울산 증성(甑城, 島山城)에서 왜적을 대파하여 일을 무마시켰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의 주동자 이괄(李适, 1587~1624)은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동원하였다. 당시 이괄의 부장(副將)은 항왜 서아지(徐牙之)였는데, 54세의 김충선은 서아지를 김해에서 참수(斬首)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사용케 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토병 한응변(韓應卞)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임하였고, 이로 인해 상당직(相當職)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투장에 나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병사를 무찔렀다. 22세에 조선에 귀화해 온 이후부터 66세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쟁터에 나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김충선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자손들에게도 강조하였다. 그는 1600년(선조 33) 인동(仁同) 장씨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여러 자식들을 두었는데, 자손에 훈계하기를 영달(榮達)을 탐하지 말고 효제(孝悌)ㆍ충신(忠信)ㆍ예의ㆍ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계속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충선은 1642년(인조 20) 9월 30일,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友鹿) 마을에서 세상을 떠나 삼정산(三頂山)에 장사 지내졌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었다. 그의 6대손 김한조(金漢祚)는 김충선의 생애를 정리하고 유작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그것이다.
이미 우리 역사가 된 귀화인들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해 있다.
김충선처럼 우리나라에 귀화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다. 과거제도를 고려에 처음 도입하게 한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이지란, 조선 인조대 표류한 후 ‘박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의 화포 개발에 도움을 준 네덜란드 출신의 귀화인 벨테브레 등이다.
귀화인의 역사는 과거 속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사안이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탁구 종목에서는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2007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출신 귀화 선수 당예서(중국명: 唐娜). 중국 탁구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아서 조국을 등지고 결국은 태극 마크를 달았다. 비단 당예서 뿐만이 아니었다. 탁구 국가 대표로 출전한 선수 중에는 싱가포르, 미국 등에도 원래 중국 국적의 선수가 많았다. 수십년 전 프로 축구 대표팀 골키퍼로 명성을 날린 샤리체프도 러시아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 ‘신의손’이 되었다. ‘신의손’은 축구 훈련장이 있던 구리를 본관으로 하여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에도 프로 농구, 프로 축구 등 스포츠 분야에서는 귀화 선수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법무부 추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귀화인은 11만 명을 넘는다. 귀화인이 급증하다 보니 귀화 성씨도 400개 이상이다. 몽골 김씨, 태국 태씨, 독일 이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청도 후씨 등이 등록되어 있다. 귀화인들이 한국식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출신 지역을 본(本)으로 남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외국 출신이지만 한국 국적으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인물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출처: 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 일본 귀화 장수 '김충선(金忠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