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 신화의 이해 그리고 감상(좀 더)
1942년 '이방인'의 발표 직후에 출간된 '시지프의 신화'는 카뮈의 근본사상인 '부조리의 철학'이 체계 있게 정리된 철학적 명저이다. '현대 작가의 반항'의 저자인 알베레스는 그 책에서 카뮈의 작품을 '알제리기(期)' '철학기' '윤리기'로 나누고 있는데, '시지프의 신화'는 이른바 '철학기'를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상은 '알제리기'에 속하는 '결혼'이나 '이방인'의 근저에 깔린 사상을 논리적으로 집약, 전개한 것이면서도 '윤리기'에 속하는 '페스트'와 그 밖의 작품을 꿰뚫고 있는 사상으로서 그의 대저 '반항적 인간'까지도 '시지프의 신화'의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
카뮈가 알제리에서 태어나, 그 청년기의 사상을 북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키워갔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눈부신 태양과 바다와 돌, 사막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꽃더미를 감지시키는 산문시적인 에세이 '결혼'은 북아프리카의 풍토에서 카뮈가 무엇을 배웠는가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거니와,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적나라한 자연에의 사랑과 인간의 허위에 대한 반항이라 하겠다. 관능적인 범신론과 무신론적인 스토이즘이라 해도 좋다. 열대의 태양은 인간으로부터 일체의 문명과 도덕을 박탈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벌거숭이 자연, '인간 부재의 자연'에 직면케 한다. 거기에는 대지와 '결혼'한 인간의 관능적인 도취가 있고, 육체의 축제가 있고 감각의 환희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은 낭만주의의 자연도 아니고, 자연주의자의 자연도 아닌, 밝은 열대의 태양에 비쳐지는 명석한 의식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그 의식은 일체의 인간적 희망을 거부하고, 기성 도덕이나 관념이나 논리에 반항한다. '결혼'에서는 삶의 환희가 타오르고, '오해'에서는 희망의 부정이 극점에까지 치닫는다. 이처럼 사랑과 반항, 생명과 의식, 에피큐리즘과 스토이즘, 타오르는 '긍정'과 거센 '부정'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긴밀하게 일치된다. 이것이 카뮈의 근본 정신이다.
부조리란, 인생에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만, 외견상 이 말은 니힐리즘의 배후에는 생명의 강한 긍정과 지성에의 깊은 신뢰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가 부조리는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생을 부조리라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인생에 있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부조리란 이 같은 이해를 거절하는 것,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저 명석한 이해에의 열망과의 대결인 것이다.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의 쌍방에 의존한다. '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속에서 행복과 이성을 찾고 싶어한다. 이 인간의 욕구와 세계의 배리적인 침묵과의 대결에서 부조리가 비롯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과 세계, 의식과 현실, 이 두 가지의 긴장된 대립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카뮈의 부조리의 입장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나올 수 있는가. 예컨대 '페스트'에서 보는 의자류의 헌신적인 행위나 레지스탕스에서 보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부조리란 인간의 형이상학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출발점이며, 실천적인 과제이고, 그 과제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부조리란 부조리에 대한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보는 희망의 거부는 관념적인 도피에 대한 거부, '철학적 자살'에 대한 거부로서 절망에의 동의가 아니다. 부조리의 사상은 니힐리즘이 아니라, 바로 니힐리즘의 거부에 다름이 아니다. 부조리를 결론으로 하여 절망을 긍정하는 니힐리즘은 자살과 살인의 긍정으로 유도할 것이다. 하지만, 부조리는 '출발점'으로 하고, '방법'으로 삼는 카뮈의 입장은 생명옹호를 위한 탱으로 이끌어간다. 부조리한 인간의 불모성, 내일에 대한 거부, 가치와 합리성에 대한 거부, 양(量)의 윤리학, 이런 것들을 행실적으로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관념적인 도피에 대한 안티테제일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며, '양'의 윤리는 그 자체 가장 깊은 '질(質)'의 윤리에 불과하며, 희망의 부정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시지프스 신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교활한 코린트의 왕으로 그는 하데스에서 언덕 정상에 이르자마자 굴러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거듭 밀어올리는 벌을 받았다. 〈일리아스 Iliad〉에서는 에피레(훗날의 코린트)에 사는 인물로, 아이올로스(아이올리아족의 원조)의 아들이자 글라우코스의 아버지로 나온다. 호메로스 이후 시대에는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이스트미아 경기의 창시자로도 유명했다. 그뒤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을 묶어버렸다고 한다. 이때문에 아레스가 죽음의 신을 도우러 올 때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죽음의 신이 풀려나자 그는 할 수 없이 지하세계로 가야 했는데, 죽기 전에 아내 메로페에게 일상적인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자기의 시체도 묻지 말라고 말했다. 지하세계에 도착한 후 그는 아내의 소홀을 징벌하기 위해 되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2번째로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살았다. 그는 아우톨리코스와 프로메테우스처럼 위대한 사기꾼 또는 대도(大盜)로서 죽음의 신을 속인 죄로 영원한 벌을 받게 된 민간전승의 인물이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부조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조리·도리에 맞지 않는 것. 즉 필연적 근거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우연에 바탕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현대적 용법은 A. 카뮈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방인(1942)'에서 현대의 부조리 상황, 현대적 부조리의 인간을 소설형식으로 제시했으며, '시지프스의 신화(1942)'에서는 철학적·논리적으로 해명하였다. 그것에 대한 J.P. 사르트르의 호의적 비평으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신이 없어진 뒤(F.W.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인간존재는 우연이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도 우연이다. 인간의 생(生)에는 조금도 확실한 의미나 근거나 목적이 없다. 부조리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인생의 의미와 필연성을 소박하게 전제한 사람들)과 철저히 단절된 가운데 인생을 목적 없이 살아간다고 한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