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명산 묘향산에서 만난 북한 안내원들,
어제 경북 문경에서 두번 째 경상북도문화관광해설사 보수교육을 진행했다. 경북 22개 지자체 문화유산 현장에서 문화관광해설을 하고 있는 해설사들에게 내가 사십여 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사례를 들며 강연을 했는데, 북한 묘향산에서 겪은 애기도 그 중 한 가지였다.
2003년 묘향산에 갔을 때 나 역시 향산천을 건너며 박제가 선생이 물수제비를 떴던 것처럼 얄팍한 자갈을 골라 낮은 자세로 던진다. 하나 둘 셋 돌은 잔잔한 물 위에 원을 그리며 날아가고 다시 던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내가 물수제비를 뜨자 방용승씨와 여러 사람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돌을 던진다. 오랫동안 나는 꿈꾸었었지 그 푸른 청천강이나 이곳 향산천에서 세월을 낚듯이 물수제비를 뜨리라던 꿈을.....
잠시 휴식하는 사이에 나 혼자 향산천을 거슬러 오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오백여 미터 쯤 떨어졌을까. 한 무리의 군인들이 소풍 차 나왔는지 왁자지껄하고 다시 내려와 향산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이 소풍차 다녀오던 선생님 두 분이 이쁘게 물든 단풍나무를 꺾어들고 내려온다.
“안녕하세요”하고 내가 인사를 건네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으며 내게 단풍나무를 건네준다. 나는 그 이름조차 향기가 나는 이곳 묘향산에서 눈부신 봄꽃보다 아름다운 가을 꽃의 대명사인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북조선 여인에게 가지 채 받았구나. 조선 국제여행사의 버스에 올라 보현사로 가는 길은 지척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목소리가 촉촉한 안내원이 안내를 시작한다.
“반갑습네다. 우리들은 꿈결에도 선생님들을 그리워했는데, 선생님들도 우리들을 꿈결에서조차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토록 서정적이며 정이 듬뿍 담긴 인사말을 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저렇게 말을 잘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안내원을 따라나선 보현사는 남측에 있는 어느 절보다 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사백여 년이 되었다는 보현사의 뽕나무도 그렇고 오대산 월정사나 원각사지의 탑과 너무도 흡사한 보현사 팔각 13층 석탑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더더구나 남측의 스님과 북측의 스님이 탑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마음 속으로 상원암에도 올라보시고
안내원의 말은 이어진다. “이 절은 고려 정종 때 세운 사찰로써 6. 25때 불타버렸습니다만 유물이 1만여 점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이 절은 용수봉 아래에 있고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좌청룡 우백호가 펼쳐진 이 절 앞에 향산천 건너에 있는 산이 마이산입니다. 산내 암자는 상원암, 능인암, 부용암이 있고 반폭동 지구에 단군사와 20여 미터쯤 되는 단군이 계시던 단군굴이 너비와 높이가 네 미터쯤 됩니다. 단군대 천주석 그리고 단군이 여기서 구월산을 향해 달리다 천주석이 있으므로 날아가고 다시 날아와서 단군의 발부리에 돌아왔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법왕봉, 향로봉, 천태봉, 원안봉, 비로봉(1909m), 하 비로봉, 보현대를 오늘은 갈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 상원암에도 올라보시고, 천태봉에도 올라보시고,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을 펴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곳 묘향산은 나쁜 사람들이 오셨다 할지라도 갈 때는 선한 마음을 얻어간다고 합니다.”
나는 보현사 안내원의 감칠 맛 나는 이야기를 듣고 만세루를 지나서 보현사 13층 석탑(국보 유적 57호)을 바라보며 대웅전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듣는다. 관음전을 지나 보현사 다라니 석당을 지나 향산천을 보기 위해 나가려하자 길을 막는다. “갈 수 없다”고 나는 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잠시 보고 오겠다고 하자 젊은 여성 안내원이 그러면 안내하겠단다. 서둘러 사진 몇 컷을 찍고 오자 나이든 안내원 선생이 “왜 내 말을 안 듣고 나갔느냐”고 언짢아한다.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이 묘향산 입구에서 묘향산 사진집을 팔고 있는 안내원의 곁으로 가서 사진집이 얼마쯤 되냐고 물었다.
“십구 유로홥네다.” 내가 장난스레 물었다. “왜 하필 십구유로화입니까?”
그러자 스무살 남짓한 보현사의 젊은 여성 안내원인 박미선씨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씹팔 유로화 보다는 낮지 않습니까?”하고 내 말을 받았고, 금세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박장대소로 웃음꽃이 피었다.
한 남측 사람이 20달러 밖에 없는 두 권을 사고 싶은데 어쩌지 하고 농담을 건네자 “그러면 안됩네다.”하고 웃음 짓는 그 모습이 순수하기가 이를 데 없다.
버스에 올라 “안녕히 계십시요”하고 인사를 건네자 묘향산 보현사의 안내원들이 “통일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손을 흔들었고, 다시 버스는 평양을 향해 떠난다. 가슴마다 김일성 휘장 뱃지를 달고 손을 흔들고 있는 북측사람들과 묘향산을 두고 나는 이제 떠난다.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떠나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고 또 흔드는 그 사이에 초정 박제가의 《묘향산소기》의 마지막 부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릇 유람이란 취미로써 주를 삼나니, 시일時日에도 얽매임이 없이 아름다운 데를 보거든 마음껏 놀며 지기지우知己之友를 이끌고 마음에 맞는 곳(會心處)를 찾아야 한다. 복잡하고 떠들썩거리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대개 속된 사람들은 선방(禪房.절간)에서 기생을 끼고, ‘시내’가에서 음악을 베푸나니 이야말로 꽃 아래서 향 피우며 차(茶) 속에 과실을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이 “산중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떻던가?”하고 묻기에 나는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 들었노라.”고 대답하였다.“
나의 묘향산 답사는 진정한 유람이었는가? 아니면 수박 겉핡기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가?
나는 강연 중에 항동규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낭송하였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사람들은 거대한 담론보다 사소한 것에 감동도 받고 실망도 한다. ”사소한 것을 잘 챙겨주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것이 좋다“고,
2026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