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유수진 검은색에서 나는 소리와 흰색에서 나는 소리에는 순서가 있다. 흰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벽에 부딪힌다. 그것은 벽의 말투, 일기를 쓰는 습관, 귓속에는 참 잘했어요 스탬프가 들었고 보이지 않는 곳이 옆집이고 들리는 곳이 옆집입니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불화 세상일은 늘 이런 식이지. 벽을 등지고 나서야 소리를 터트리지. 낮과 밤이 서로의 깃발을 펼치면 펄럭이는 마음으로 양말의 목을 밤까지 당겨 올린다. 아마도 옆집은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심정으로 벽과 벽의 경계에 불행을 버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느 방에도 던지지 못할 것들 넘치는 불행을 벽에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벽을 등지지 않아도 벽에 기대지 않아도 눈을 감고도 흰색과 검은색 소리를 구분할 줄 알아서 벽 너머에 있는 피아노를 동의도 구하지 않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곤 한다. —계간 《청색종이》 2024년 겨울호 ------------------------- 유수진 / 대전 출생.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졸업.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제10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저서로 『4•3표류기』 『선택받는 글쓰기』 『태양의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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