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최복선
인적 없는 시골은 언제나 가슴이 설레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립문 밖에서 반가운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조바심마저 인다.
암자로 가는 길옆에는 오색 단풍잎을 실은 개울물이 아래로 아래로 정
처없이 흘러서 가고 그리움을 담은 내 마음도 시냇물 따라 어디론지 가고
싶다.
가슴 깊숙히 숨을 들이켜자 상큼한 공기가 머리속으로 스며든다.
자유를 감금당하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숨을 쉬고
있으면 되살아 나는 세포들이 촉각을 곤두세워 주기에 살아 있다는 것으
로도 감사하다.
산길로 접어들자 내 마음은 벌써 저만치 보이는 암자에 가 있다. 어귀
를 지나 암자 앞에 이르니 마당을 쓸고 계시던 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
다. 언제 보아도 나의 피붙이인양 늘 다정하신 스님, 들고 계시던 빗자루
를 건네 받아 나는 마저 비질을 하며 스님의 따스한 체온을 가슴에 담는
다. 이런 내 모습을 미소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은 부엌으로 나
를 데리고 가셨다.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가마솥 뚜껑을 헤집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며 바라본 부뚜막은 맨질맨질 윤기가
나 있다. 이렇게 정성이 깃든 부뚜막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 저곳을 행주
로 쓸고 닦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머니는 부뚜막 위에 작은 판지를 선반처럼 얹혀 아침마다 정한수를
새것으로 떠놓으시며 자식들이 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하셨다.
그 기원속에는 고달픈 당신의 인생보다는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 그
리고 희망이 담겨 있었으리라. 그래서일까 나는 이곳에만 오면 어머니가
계셨던 고향집에 온것 같아 늘 정겹기만 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어머니의 고운 자태를 닮고 싶었다. 화장을 하지
않으셔도, 멋을 내지 않으셔도 단아한 자태가 수수하게 핀 수선화처럼 정
결한 분이셨다.
항상 편안한 미소를 담고 부지런히 사셨던 어머니의 정성과 덕을 입어
지금 내가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어릴때는 철부지여서
몰랐으나 어미가 되어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그 희생에 마음으로만
감사할 뿐 보답할 길이 없다.
어머니는 내가 열 다섯 되던 해에 돌아 가셨다.
평생 쏟을 사랑을 15년 동안 진하게 쏟고 가셨더란 말인가. 감수성 예
민한 사춘기를 홀로 겪으면서 신체의 작은 변화도 감당할 수가 없어 두려
움이 일 때마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꿈에서라도 뵐 수 있을까하여 하루 온종일 어머니 생각에 빠져도 보았
지만 속절이 없었다. 어머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으나
들길에 떨어진 민들레 씨처럼 나는 세월속의 비, 바람을 겪으면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야생화가 되었다.
가끔씩 허전함이 견디기 힘들때마다 산과 들,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
으면서 살아 왔다. 지금도 어디엔가 계실것만 같은 어머니, 내 이마를 훑
고 지나가는 바람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느껴져 몸을 맡기고 툇마루에 앉
아서 쓸쓸함을 달래본다.
어미가 되어서 살고 있으면서도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그에 대한 목
마름으로 외로움만 쌓여 간다.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지겠지'하는 마음으
로 애를 삭이면서 살았건만 세월이 쌓일수록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보고
픔은 가슴 가득 서러움으로 채워지고 있다.
생각에 잠겨 먼 하늘을 바라보던 내게 스님은 가볼 곳이 있다며 옷에
묻은 재를 털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스님의 뒤를 따라 숲으로 갔다. 숲길
에는 가랑잎이 수북히 쌓여 발길을 떼어놓을 때마다 마른잎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앞서 가시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울컥 어머니를 소리내어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스님과 나는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스님의 발자욱, 숨소리, 스치는 옷깃에서 어머니
에 대한 지난 세월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바위에 오르니 사방이 산으로 휘장처럼 감겨 멀리 영동읍이 그림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지없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연을
안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처럼 부모님을 여의고 그리워하는
이도 있겠고 어렵고 힘든 삶이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스님은 내게 무엇을 보여 주시고자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세상 고통 다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심각한 내게 평화로워 보이는 저
곳에도 희,노,애,락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게 해 주고 싶
었던 것일까.
어머니와 사별한 후 더한 고통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강인하게 살아 왔
지만 결국 나약한 사람이 되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 아파하고
속 끓일 때마다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기다려진다.
하늘도, 산도 잡다한 세상사와 무관하다는 듯 모두가 평화롭기만 한데
갈바람에 억세 일렁이듯 마음만이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다. 실바람에도
휘청거리는 연약한 마음이 짐스럽게 여겨진다.
저 밑, 암자에서 공양하라 외치는 스님의 목소리에 산새가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댓돌 위에 가지런 놓인 털신이 따뜻해 보였다. 신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삐거덕거리는 마루를 딛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스님들의
소지품이 정리되어 있는 한지로 바른 벽장뿐이지만 방안의 빈곤과 정갈함
이 탐, 진, 치를 행하고 사는 스님의 모습 같았다.
스님도 여자인데 세속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인들 어찌 없으리요. 참
선과 수행으로 속세에 대한 단절을 수 없이 했겠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픔도 있으리라. 나보다 어쩌면 더한 고통 속에서도 초연히 살아가는
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스님을 뵈올때마다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가 없
었다.
너댓가지의 반찬과 구수한 담북장이 상에 올랐다. 상 앞에 앉아 많이
먹으라며 웃고 계시는 스님을 보면서 불현듯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에
자꾸만 가슴이 미어져 왔다.
부엌에서 옷을 털며 일어서시던 스님을 향해
“어머니…” 하고 소리내어 불러 보고 싶었다. 그 말이 자꾸만 튀어나오
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온 것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스님은 언제나
내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요, 모성을 일게 한다.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숲은 소리를 남기
지 않고,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가도 기러기가 가고 나면 연못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머니와 맺은 그 짧았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한 채 지금까지 살아 왔
다. 내게 주어진 피할 수 없었던 질곡의 지난 날, 어머니로 비롯한 이 외
로움의 실체에서 벗어나 내 아이들의 어미로서 살아야 할텐데.
군자는 일이 다가오면 비로소 마음이 움직이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
도 따라 비게 된다고 하였다.
대숲도 연못도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 있거늘 언제 나는 이미 지나버린
집착에서 마음을 비워낼 수 있으려나.
이제, 받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허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오늘도 이렇
게 산사를 찾아 와 불상 앞에 앉아 묵상을 한다.
새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 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환상이었
을까, 나는 밥그릇에 떠놓은 사자밥 위에서 새발자국을 보았었다. 새처럼
걸릴것 없는 산천을 품에 안고 계실 어머니를 이제는 놓아 드려야겠다.
해가 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새 한마리라도 날아들 것도
같은데 여전히 빈 하늘뿐.
오랜세월 가슴에 담고 살았던 어머니, 내 마음속에 늘 그리움으로 그늘
지웠던 허상의 어머니 새 한 마리를 창공으로 날려보내며 나는 고개를 떨
구었다.
달빛을 등에 지고 산사를 내려오는 등뒤로 스님의 따사로운 눈길이 오
래도록 머문다.
1999.
첫댓글 오랜세월 가슴에 담고 살았던 어머니, 내 마음속에 늘 그리움으로 그늘
지웠던 허상의 어머니 새 한 마리를 창공으로 날려보내며 나는 고개를 떨
구었다.
달빛을 등에 지고 산사를 내려오는 등뒤로 스님의 따사로운 눈길이 오
래도록 머문다.
오랜세월 가슴에 담고 살았던 어머니, 내 마음속에 늘 그리움으로 그늘
지웠던 허상의 어머니 새 한 마리를 창공으로 날려보내며 나는 고개를 떨
구었다.
달빛을 등에 지고 산사를 내려오는 등뒤로 스님의 따사로운 눈길이 오
래도록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