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상주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원래 목소리가 아나운서 이상으로 좋은데 목이 좀 쉬었습니다(웃음) 오늘 제가 상주시민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오늘 여러분 만난 큰 보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시고 좋은 기회를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과연 희망이 있을까.. 기업하시는 분들도 대한민국에서 기업하는 것이 희망이 있을까.. 하던 것을 집어 치우고 여생을 편안하게,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곳으로 가면 좋겠다.. 또 농업 하시는 분들.. 특히 상주에는 농업인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농업하시는 분들도 대한민국에서 농사를 지어서 희망 있겠는가. 자식 키워서 공부시키고 일자리 얻게할 수 있을까.. FTA 협상되면 농업은 어떻게 될까 미래를 걱정합니다. 젊은 사람들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부모가 공부시켜준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습니다. 졸업하고 그냥 있기 미안해서 대학원을 갑니다. 부모는 일자리 없어 가는 것 알지만, 자식이 사기가 떨어질까봐 공부 잘 하라고 하고, 아이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 준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 갖습니다. 50대만 되면 일자리 떠나야 하는 불안한 사회, 민간기업에서는 40대 후반이면 걱정을 합니다. 50대 60대가 가장 가정적으로는 돈이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식 대학 보내랴, 시집 장가 보내랴 이럴 때에 가장이 일자리를 잃으면 그 가정은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오늘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희망만 있다면 고된 것 참을 수 있어요. 희망 없으면 고된 것 견딜 수 없어요. 만약 1-2년만 고생해서 일하고 싶은데 가서 일할 수 있다고 하면 참을 수 있어요. 기업하는 사람도 2,3년 지나면 반드시 좋아진다는 희망 있으면 어떻게라도 할 겁니다. 농사 짓는 분도 마찬가지에요. 시설하고 초기 투자해서 농사 짓고.. 요새는 초기에 투자 많이 해야 해요. 투자해서 제대로 값을 받을런지.. 중국이나 인도에 가 보면 요즘 젊은 아이들이 사는 것 형편 없지만, 물어보면 세계 대국이 되고 언젠가 미국보다 더 큰 나라 될 수 있고 희망을 갖고 있어요. 아직 우리나라 70년대 수준인데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 1천원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인도가 좋아질 거라고, 중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1만불 넘어 만 오천불이 되어가는 데도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우리 가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잘 키우면 커서 잘 되면 우리 집안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자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기 어려운 나날을 눈물을 참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쳐서 어렵게 공부시켰어요. 만일 내 자식 커서 무슨 희망이 있을까.. 생각했으면 그런 정성 쏟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 대한민국은 희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당장 형편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미래 희망. 희망 가질 수 있는 나라에요. 세계 어느 나라 기업인 보다도 더 경쟁력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도 비록 적은 땅덩이에서 짓지만, 외국은 굉장히 큰 땅덩어리에서 짓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시설 투자하고 고급 농작물 농사짓는 수준은 세계 어느 농민보다도 우수합니다. 이것을 볼 때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수한 기업인, 우수한 근로자, 우수한 농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우수한 사람들을 제대로 이끌고 갈 지도력이 부족합니다. 절대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 고되지만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분열되고 분열되어 있습니다. 동서간, 젊은 세대와 나이든 사람. 이념간, 좌파다 우파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분열과 갈등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없어요. 지도자는 분열된 것을 하나로 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몇몇 공직자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봉투를 들고 왔습니다. 청계천복원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술적으로 사회적으로 검토해서 여당 후보에게 갖다준 사람의 명단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을 내쫓던지 한직으로 보내야 시장직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기업인으로 출발해 국회의원하다가 공직자 생활은 처음인데, 첫날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틀.. 사흘.. 계속 찾아오더니 나중엔 뜯어서 한 번 보기라도 하라는 거에요. 저는 봉투 받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니까 보기만 하고 돌려달라는 거에요. 보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돌아가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가만 생각하니까 그 봉투를 뜯어서 명단 을 보면, 이 다음 결재 받으러 오는 과장, 국장을 보면 나를 반대한 사람… 이렇게 생각이 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끝까지 보지 않았어요. 청계천 복원을 위해 그동안 준비했던 자료를 모두 내놓고 이런 이런 이유로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지만 이렇게 하면 가능하다 설득했습니다. 서울시 공직자들이 한 팀이 되고, 외부 전문가 한 팀, 또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한팀이 되어 일을 함께 하는데 역시 중심은 서울시 공직자들이었습니다. 일을 함께 해 보니까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토요일 일요일까지 밤 새워 일하라고 한 적 없어요. 그들에게 맡겼어요. 그런데도 밤낮없이 휴일 없이 일했어요. 그 때 생각했어요. 200명 중 대부분이 봉투 명단에 들어간 사람 같아요. (웃음) 이 분들이 시장이 끝까지 명단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 공직자들 덕분에 일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때 봉투를 열어봤다면 아마 청계천 복원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시장이 되고 나면 모든 사람이 우리 사람,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에요. 저는 통합하고 화합하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22만 상인들이 1만명씩 돌아가면서 매일 데모를 했었습니다. 과거에는 이 분들이 서울시에 항의하러 와도 팀장도 못 만나고, 말단 직원들만 만났는데, 이 분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공직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상인 한사람 한 사람을 국장, 부시장이 다 만났어요. 저는 이야기했어요. 공무원 직위 왜 필요한가? 앞장 서지 않고 뒤에 서면 높은 직위, 필요가 없는 거에요. 서기관 이상만 되어도 테이블에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만 만나지, 찾아가는 사람 없었어요. 부시장, 과장, 국장 다 찾아갔어요. 상인들이 한밤 중에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밤 1시에 아무개 국장 이리 좀 나오시오. 하면, 옛날 같으면 전화도 하지 않았겠지만, 국장은 "계신 데가 어디입니까?가겠습니다" 하고 택시 타고 갔어요. 그 중에는 미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죽은 다음에 하라고.. 해도 공직자들이 웃으면서 손을 잡고 설득시켰어요. 아랫사람보다 윗사람들이 더 정성껏 만났어요. 상인들을 만나 설득시킨 횟수가 4,270번입니다.(박수)
야당시장이 공권력, 세무서 동원할 능력 없어요. 설득시키는 일밖에 없습니다. "청계천 복원이 2년만에 끝난 뒤에 여러분의 상황이 더 나빠진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아해도 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주변의 서민들이 더 좋아진다는 전제하에 할 테니까 나를 믿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노점상들이 심지어 가스통 들고 "니 죽고 나 죽은 다음에 하자"라고 1년 내내 항의했습니다. 공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설득시킨 결과 2천번, 3천번이 넘어가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소문이 퍼졌느냐면, " 이명박 시장도 예전에는 노점상을 했다더라…" 어떤 분은 "정말 노점상 해 봤습니까?"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분들이 나중에 복원된 이후에 감사패를 들고 와서 "시장님 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모르고 너무 심하게 반대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애정을 갖고 상대의 입장에서 설득하고, 또 공직자들이 힘을 모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박수)
많은 분들이 저를 보고 그래요. 대단하고 교통개편하고 청계천 복원하고.. 대단하다고.. 그러나 저는 서울시장을 퇴임하면서 그런 큰 사업도 기억에 남지만 특별히 감회를 갖는 3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겨울, 11월에 달동네에 위문품을 가지고 방문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준비된 장소가 있었지만 계획을 바꾸어 옛날 제가 시골에서 야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일당 노동자 생활을 할 때 달동네에 찾아갔어요. 거기는 재개발 재건축이 안된, 옛날과 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구청장도 나오고 동장도 나오고 전부 뛰어나왔어요. 변한 것이 없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다 나오셨는데, 제가 보니까 화장실만 저쪽에 있던 것이 이쪽으로 옮겨졌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화장실 이쪽으로 옮겼나요?" 그랬더니 "시장이 어떻게 아느냐"고. 그래서 "아는 수가 있죠." 하면서 단칸방을 둘러보는데 그 때 오후 2시였습니다. 단칸방에 문이 잠겼는데 사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문을 따 보라고 했습니다. 치매 노인 한 분이 밥 그릇 하나를 옆에 놓고 뒹굴고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가 일을 나가면서 문을 열어놓으면 어머니가 나가실 까봐 문을 잠궈놓고 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만큼 우리 사회가 살만한데, 저렇게 치매노인을 혼자 두고 문을 잠그고 일터에 나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부부가 집에 돌아와서 "아이고 어머니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하겠어요? "아이고.. 오늘도 죽지않고 살아계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그 때 저는 내가 서울시장이 된 이유가 여기 있구나. 이렇게 돌아가시는게 차라리 낫겠다 라고 생각하는 가정이 얼마나 되는지 통계를 찾아봤더니, 통계 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동장에게 부탁해서 조사를 했더니 서울에 1320세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서울시장을 마치기 전에 이 분들을 시설에 다 모셔서 서울시 비용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자 했습니다. 치매노인 병원이라고 하면 땅을 사기 힘들어서 노인 전문병원 형식으로 지어서 서울시장 떠나기 6개월 전에 1,320 를 모두 모시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수)
서울에는 약 36만명의 고등학교 학생이 있습니다, 그 중 경제가 어려워서 가정이 전부 깨어져서 집도 차압되고 해서 갈데 올데 없이 길거리에 나온 고등학교 학생이 1년에 약 7천명 가까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2학년 자제가 길거리에 나간다면 여학생이 길에 나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남학생인들 길에 나오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저는 깜작 놀랐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갈 수 없었을 때 우리 중학교 선생님이 그래도 너는 고등학교는 가야한다, 세상을 살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억지로 끌어다가 야간상업고등학교를 다니도록 했습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저는 중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쳐야할 운명이었지만, 야간상업 고등학교에 들어가 졸업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일당노동자 생활을 할 때 고등학교 졸업장은 아무 쓸모 없었습니다. 노동자 생활에는 이력서가 필요 없습니다,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가서 100명, 200명 서 있으면 50명, 60명 데려갔습니다. 저는 그럴 때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거기에서 제대로 돈 못 벌면 달동네 합숙소에서 살지 못하고, 방값이 더 싼 윗동네로 올라가야만 하던 그 시절,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월급이 적더라도 한달 일하고 월급받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게 제 소망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최고의 소망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런 제가 무려 7천명의 학생들이 고등학교 다니다가 중도에 포기하는데, 그것을 보고 그대로 두는 것은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서 서울에는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못 다니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게 하자… 누구든지 서울시에 통보만 하면 졸업할 때까지 교장선생님과, 담임, 그리고 본인만 아는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박수)
첫 장학금이 8,200명에게 나갔어요. 그런데 공직자들이 시장이 정치를 하니까 큰 실내체육관 불러다가 가수가 노래 한 곡 하고 시장님 한 말씀하면서 장학증서를 주면 시장이 정치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행사 준비했습니다. 행사 3일 전에 계획서가 올라왔는데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장학금도 아니고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진 아이들 8천명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서로 얼굴 보면서 "니도 망했나? 나도 망했다. " 한창 예민한 여학생들은 차라리 학교를 못 다니는 것이 낫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급히 행사를 취소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 장학금은 여러분에게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 빌려주는 것이다. 먼 훗날 20년 이고 30년 후에 네가 받은 만큼 너의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 내 바램이라고. 공무원들은 도움 받는 학생의 입장이 아니라 도움 주는 시장의 입장에서 행사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저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여학교 입구에서 뻥튀기 장사를 했어요.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어머니는 저를 보고 "너 왜 사내가 그렇게 부끄러워하느냐? 네가 네 힘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니가 남을 속이느냐, 동정을 받으려고 비굴하게 사느냐? 무엇이 창피하냐 너는 당당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 말을 누가 들을까 창피했지만, 저에게 오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삶의 지혜와 가난이라는 이 두 가지가 인생을 살아가는 큰 스승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길바닥에서 장사할 때 어떤 어른은 저를 불러다가 "부모는 뭐하지, 이름은 뭐지? " 하고 물어요. 왜 물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릴텐데… "열심히 해 용기 가져 그러면 성공할거야" 그러고 가세요. 그 분은 용기를 준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어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수모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느꼈어요. 차라리 모른 척하지..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와서 그래요. "야, 그거 얼마야 다 넣어.." 해서 돈 받고 잔 돈을 드리려고 하면 "잔돈 그만둬.. " 하고 가요. 굳이 부모 뭐하지 물어보지 않고 잔돈도 안 받고. 저는 그런 사람을 보면 천사 같아요 (웃음, 박수) 우리가 남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도움을 받는 사람의 심정에서 도움을 줘야 그분들이 고마움을 느낍니다
서울에는 한 3800명의 노숙자가 역에서 지하도에서 사방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분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책을 세우는데, 눈만 뜨면 밥도 주고 점심도 주고 서울시가 3600명 머물 수 있을 만큼 숙소를 다 지어줘도 고마운 마음을 안 가져요. 나중에는 메뉴가 나쁘다고 잔소리까지 해요. 또 자기들끼리 연락을 해서 어디가 좋은지 의논도 해요, 제가 서울시장 떠나기 6개월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 끝에 일자리를 줘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300명 단위로 교육을 시켰어요, 제가 직접 나가서 교육을 시켰어요, "여러분, 3천원짜리 공짜로 먹지 말고 1천원짜리라도 벌어서 먹으라"고. 이 분들을 전부 신체검사하고 교육을 시켜서 300명 단위로 일자리 부탁해서 1400명에게 일자리를 주었어요. 그리고 하루에 5만원을 주는데 서울시가 2만 5천원, 기업이 2만 5천원씩 부담하니까 기업도 좋아했어요. 서울시는 노숙자들이 자립할 수 있어 좋고, 기업은 적은 비용으로 일군을 쓸 수 있으니까 좋죠. 그리고 이 분들에게 천만원만 예금하면 한달에 5만원만 주면 되는 임대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사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시장을 그만두기 한달 전에 전부 둘러봤습니다. 이 분들이 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시장님 고맙습니다. 이제 5백만원 예금했는데 천만원 예금할 수 있도록 토요일에도 일을 하게해주세요" 그래요. "천만원 저금해서 임대아파트 얻으면 흩어진 가족이 모여 살도록 빨리 예금하겠습니다" 의욕을 갖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자리가 이렇게 중요해요. 일자리는 희망이에요. 우리가 오늘날 어렵다고 하지만,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주고, 나이든 사람에게 일자리 준다면 얼마든지 우리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박수)
저는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 대한민국이 지금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 뭔가 불안하고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용기를 갖고 뭔가 되겠다 하는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습니다.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고 호남에서 연결하고 필요하면 서울에서 평양, 신의주까지 가면 내륙의 강과 강을 연결해서 한번 우리나라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 보자.. 1972년 국민소득 250불일 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승용차가 없었어요. 버스나 다니던 그 시절에 1인당 국민소득 250불일 때 세계 어느 나라도 너희는 자동차가 없으니까 고속도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우리 돈으로 고속도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현대건설이 주도가 되어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만든 것이 우리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도로가 생기니까 자동차 공장이 생기고 자동차 다니기 시작했고, 우리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만오천불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앞으로 3만불 4만불 소득을 만들어야 합니다, 3만불, 4만불을 만들려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만 발전해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2만불 까지는 만들 수 있을 거에요. 3만불 4만불을 만들어야 통일이 되고 일자리 얻을 수 있고 대한민국에 사는 게 행복하게 만들려면 지방이 균형되게 발전해야 합니다. (박수)
말로만 지역균형발전 하겠다 뭘 하겠다 이것으로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중앙의 기관 하나를 지방에 보낸다고 하더라도 가족은 서울은 놔 두고 주말만 되면 서울에 가 버리고, 돈을 여기서 받아 서울 가서 쓰면 사실상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한 도시가, 지역이 발전하려면 생산이 있어야 하고 일자리가 생겨야 합니다. 지역에서 공부하고 자란 아이들이 그 지역에서 일자리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문화와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10년 전 1996년 7월 15대 국회에서 이 내륙운하에 관한 발표를 했습니다. 어떤 정권이든지 이것을 해야 한다. 구라파는 모든 나라가 강을 서로 연결해서 독일에서 저 그리스까지 운하로 갈 수 있습니다. 물동량의 1/4을 운하를 거쳐서 각국, 유럽 모든 나라로 보내고, 물류비는 철도나 도로보다 1/3 밖에 들지 않습니다. 낙후된 지역도 운하를 통해서 서로 한나라와 같이 교류해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만이 유일하게 강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강이 더러워지면 맑게 하려고 돈을 쓰고, 나쁜 물을 겨우 정수해서 상수원으로 쓰는 것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강이 있는 나라가 이를 방치했습니다. 낙동강은 비가 오면 홍수가 걱정되고 갈수기에는 물이 말라 걱정하고, 부산이나 마산은 물이 모자라서 안동댐, 합천댐에서 물을 가져가려니까 반대를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공단을 만들려고 하니까 부산사람들이 물을 못 먹는다고 공단을 못 만들게 해서 10년째 싸우고 있습니다. 내일 하룻밤 자는 그 지역에 에 25km 만 터널로 연결하면 한강과 낙동강이 연결되어 서울사람들이 배 타고 상주로 올 수 있고, 상주 사람들이 배타고 부산에 갈 수 있습니다. 바지가 다니면 고속도로에서 컨테이너 부두에서 250대 트럭분을 실을 수 있습니다. 250대가 고속도로 다니는 그 복잡한 길을 한 대로 할 수 있습니다. 250대가 내 뿜는 매연이나 도로파괴를 생각하면, 상주는 이제 항구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박수)
아마 반대도 나올 겁니다. 환경문제, 기술적으로 가능하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정치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 일생을 저는 일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박수) 1992년 세계 모든 정상이 남미 리우에서 만나 가지고 친환경적으로 경제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인류가 발전하고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경제개발은 해야 한다고, 환경회의에서 결의했습니다. 청계천 복원을 할 때 많은 시민단체가 반대했습니다. 처음엔 다들 반대 했지만 하고 나니까 친환경적 개발이라고 세계가 다 인정을 하고 상도 받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저는 종업원 98명의 작은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종업원 98명으 작은 회사가 제가 그만 둘때는 16만 8천명의 대그룹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인천제철, 종합상사 모두 생겼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고의 대기업과 경쟁하면서, 그 회사의 장점을 배우고 강점이 뭐고 좋은 점을 배워서 그 분야에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면서 큰 겁니다. 그런데 정치는 서로 끌어내리기 작전이에요. 서로 끌어내리려면 어떻게 되겠어요. 계속해서 정치는 3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세상이 바뀌고 국민의식이 세계화 되어 발전하는데 정치만 계속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정부 예산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해요, 하상정리를 잘해서 배가 다니면 거기서 나오는 모래자갈만 해도 공사비 60% 나와요, 한강 하상정리 잘 되어 있는데 그 때 모래자갈로 서울시가 충당했어요. 운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외 모자란 것은 민자로 하게 되면, 시중의 유동자금을 이 곳으로 투자하도록 하면 정부예산을 쓰지 않고 가능합니다, 이게 기업적 경영방식이에요. 정부도 기업가적으로 경영마인드 갖고 하면 예산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서울시장이 되어서 공무원들에게 기업경영마인드를 도입해, 예산을 11% 씩 매년 절감해서 5조원에 달하던 빚이 제가 그만 둘 때 3조원 갚았습니다. (박수) 그런 식으로 된다면 대한민국 예산도 1년에 15조 정도 절약하는 것 가능합니다. 그렇게 절감하면 교육에도 투자하고 복지에도 쓰고 상주발전에도 돈 보태고 다 할 수 있습니다. 세금 올리고 부채를 늘리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국가부채가 김대중 대통령 그만두실 때 133조가 되었고 2년 반 만에 260조가 되었습니다. 이 정부가 끝날 때는 아마 400조가 달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 빚을 누가 갚겠습니가. 세상이 변화하는데 그 속도에 맞춰 국가행정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금을 올리지 않더라도 나라 빚을 늘리지 않더라도 경제를 성장시켜 나오는 세금을 가지고도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행정이고 국가경영이에요, 이젠 국가도 살림살이에요. 우리 시장님도 상주경영이에요 상주 살림살이를 하는 거에요, 서울? 경영이에요. 저도 살림을 살았어요, 국가경영, 상주경영, 지방정부도 경영입니다. 대학도 대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대학을 잘 경영하는 사람을 총장으로 뽑습니다. 21세기는 모든 것이 살림을 사는 것과 같은 국가영영, 기업경영, 대학경영, 지방정부 경영..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내륙의 운하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구라파는 이미 다 했고 미국도 오대호에서 만드는 제품을 대서양으로 운하를 통해서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륙에 운하가 생겨서 내륙의 물건을 실어보내고 사람들이 오고가고 수자원을 보존해서 부산이고 어느 지역이고 홍수걱정할 필요 없고, 갈수기에도 물 걱정할 필요 없는 똑 같은 수량을 갖고 가면 꼭 필요한 수자원도 확보할 수 있고 깨끗한 수질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지방이 균형되게 모두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인천이 발전하듯이 내륙에 있는 충청도나 상주가 발전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나라 경제를 세웠듯이 내륙운하를 통해 한반도가 한번 더 크게 융성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박수)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많은 반대자가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으로 압니다.인류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과거 역사를 보면 늘 불가능하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에서 이루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오늘날 인류문명이 발전했던 것입니다(박수) 우리는 할 수 있다, 많은 생각과 고민한 끝에 결정한 것은 행동으로 옮겨서 이것은 가능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온 국민이, 갈라진 국민이 하나 되어서 내륙에서, 호남으로 지나가고, 경부로 지나가고, 북한으로 지나가는.. 국민들이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단합하면 우리는 잘 사는 대한민국, 잘 사는 상주, 만들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힘을 모으면 이 일은 가능합니다. (박수)
존경하는 상주시민여러분, 제가 정말 뜻밖에 내륙에 그 옛날 유명하던 상주, 저는 경상북도가 왜 그런 이름이 생겼나 몰랐는데, 경주와 상주가 붙어서 경상도라고 해요, 그런데 인구가 줄어서 11만명도 안 된다니까 얼마나 기가 막혀요, 상주가 어떤 도시입니까? 상주의 자존심을 찾아야 합니다. 상주에 산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저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상주발전, 지역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여러분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도록 합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