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밀교)와 토속신앙이 경쟁하다
밀교는 주문을 외우므로 기적이 일어나는 신비한 종교 사상을 가진다. 산신령에게 손을 비비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일월성신 신령님께 비나이다.’라고 함으로 소망이 이루어지는 토속신앙과 유사성을 지닌다. 서로 간에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은 서로 영역을 차지하려는 충돌도 일어나지만 화해하기도 쉽다. 화해는 곧 흡수되기도 쉽다는 뜻이다. 종교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취약점이 많은 산신령이 불교에 흡수되어 지는 것은 팔공산 산신령의 정해진 운명일 것이다. 심지대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흡수되어 가는 과정에는 저항도 있고, 충돌도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신라의 밀교는 605년에 천축의 스님이 가지고 왔다. 신라 스님으로는 명랑대사와 혜통스님이 유명하다. 명랑은 문무왕을 도와서 신통력을 발휘함으로 당나라 군사를 이 나라에서 몰아낸다. 조금 후대의 스님인 혜통은 질병을 퍼트리는 교룡을 몰아낸다. 신문왕의 등에 난 종기와, 효소왕의 공주가 앓고 있는 질병을 치유한다. 이적을 베푼 점을 같지만 두 스님 간에는 차이도 있다. 명랑은 국가의 소망을 성취하였다. 혜통은 국가적인 일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복락을 이루어 주었다. 이것은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에 신라인의 소망이 바뀌었음을 말한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개인의 불행을 떨치려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통일신라 때에 약사신앙이 유행한 배경이다. 약사경도 엄밀한 의미에서 주문이다. 약사경을 외무므로 소망을 이루려는 것은 주문을 외우므로 소원을 이루려는 토속신앙과 같은 맥락이다. 서민들이 접근하기 쉬웠다. 아마도 팔공산의 약사신앙도 통일신라 시대의 약사신앙이 뿌리일 것이다.
불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보면 토속신의 저항도 받았다. 진평왕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밀교승이 삼지산에서 삼천년 묵은 여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여우는 아마도 삼지산의 산신이었을 것이다. 불교시대에는 토속신을 폄하하기 위해서 여우니, 지네니, 이심이니 라고 하였다. 이야기대로라면 어쨌거나 불교는 토속신에게 패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불교에 대한 토속신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불교가 토속신앙을 제압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선덕여왕이 병이 든 지 오래 되었다. 흥륜사의 스님 법척이 치료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밀교승인 밀본대사를 불렀다. 밀본대사가 약사경을 외우자 스님의 육환장이 날아가서 침실에 숨어 있던 여우 한 마리를 찔러 죽였다. 여왕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 약사경 독송은 토속신앙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과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속신아의 주문보다 더 우수한 능력을 지녔다. 불교의 약사신앙이 민중 속으로 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팔공산에도 토속신앙이 불교에 자리를 양보한 흔적이 있다. 송림사의 창건 설화를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형제가 아버지의 장례를 지금의 송림사 자리에 치루기로 하였다. 큰 아들의 꿈에 현인이 나타나서 말 하였다. 장례가 끝날 때가지 누구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 장례일은 날씨가 몹시 추웠다. 헐벗은 아이가 벌벌 떨면서 나타나서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몰골이 너무 불쌍하여 인부들이 주인 몰래 음식을 주었다. 순간 하늘에서 우레소리가 울리면서 땅이 꺼지고, 새로운 산이 솟았다. 벌을 내린 것이다. 소나무 숲 속에 새로운 절이 생겼다. 송림사의 창건 설화이다. 재미있는 것은 금기를 어긴 묘주의 아들들은 모두 망했다, 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었는데 하늘에서 벌을 내렸다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종교는 도덕을 말하지 않는다. 금기를 지켰느냐, 아니냐 만을 따진다. 금기를 지키지 않으므로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으로 무장한 불교를 이길 수 없다. 토속신앙터는 자연스레 불교에게 뻬앗겨서 송림사의 절이 들어섰다. 이것은 금기를 지키려는 토속신이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에게 패배하는 서글픈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금기사상과 도덕사상의 싸움에서 도덕사상이 우위를 차지함으로 토속신앙은 불교로 바귀어 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팔공산에 자리잡는 미륵신앙은 밀교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심지대사가 미륵신앙을 가지고 팔공산으로 와서 산신에게도 미륵불교의 계를 주었다고 하였다. 팔공산의 산신령이 순순이 계를 받았을까? 처음에는 틀림없이 저항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전하는 것이 없다. 심지대사가 너무 걸출하여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 하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무속신앙이 강하게 남아 있다. 어쨌거나 팔공산의 토속신앙터는 불교의 성지로 바뀌면서 절집이 들어섰다. 바위신앙터에는 마애불을 새기므로 부처님의 거처지가 되었다.
팔공산을 불교가 점령하는 데는 밀교의 범신관 , 즉 만다라 사상이 관여하였다. 부처님은 전 국토에 즉 산이면 산, 강이면 강, 바위에도, 나무에도 이 세상의 어디에든지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팔공산 곳곳에도 부처님이 거처하시는 곳이 되었다. 우리의 대표적인 산악 신앙터인 팔공산을 불교의 깃발로 바꿔 달았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팔공산의 골골마다 불교의 기도 도장이 들어서 있다.
심지대사의 행적에서 밀교의 흔적을 찾아보자. 863년에 44대 민애왕이 너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것을 슬퍼하여 명복을 비는 원탑을 세웠다. 비로암에 있는 삼층 석탑이다. 이 탑에는 금동사방불함이 봉안되어 있었다. 무구정경의 4종류의 다리니도 안치되어 있었다. 탑 안에는 소탑도 여러 기 봉안되어 있었다. 다라니경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적은 경전이다. 다라니경은 밀교의 아주 중요한 경전이다. 금당원의 석탑에서도 소탑들이 나왔다. 이것은 동화사가 우리 토속신앙과 가장 가까운 밀교계 불교 사상으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불교는 토속신앙과 가까운 밀교를 무기로 들고 팔공산을 공략하였다. 팔공산 산신령은 전설조차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백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