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양의 정의
찬양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일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속에 들어있는 “칭찬”을 기억하면 쉽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넘어서 찬양은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이다.”찬양의 사전적 정의는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 또는 인정함을 표현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크게 보이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등이다. 찬양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 자체에 대한 반응”이다. 찬양은 “어떤 모습이건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오직 하나님의 기사를 묵상만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찬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묵상은 찬양이 아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월드컵 경기,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후 모습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찬양은 기쁨과 칭찬, 박수와 탄성이 들어있는 Activity한 행동이다. 때로 찬양은 기분이나 감정과 반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찬양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고, 마음이 상해 있을 때에도 찬양을 해야 한다. 찬양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자기 영혼에게 어떻게 말했는가를 보면 쉽다. 시편103편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찬양의 원형
성경안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거룩한 찬양의 원형은 두 곳에 잘 나타나있다.
1) 이사야서의 찬양 이사야 6:1-4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여기에 묘사 되어있는 스랍은 천사들의 서열에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천사이다. 이사야가 성전을 방문했을 때, 이런 스랍들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서로 창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화란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쪽에서 이어 답하는 주고 받는 형식의 노래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엄청난 찬양은 “문지방의 터”를 흔들리게 하였다. 또한 우리는 그 집이 연기(주, 예배의 향기)로 가득찼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시편에서 찬양을 큰 소리로 외치는 것과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는 것이나, 신약에서 주의 재림이 “호령”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조금도 이상한 말씀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지른 함성에서부터(여호수아 6:20)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지른 큰 소리까지(에스라 3:11-13) 시편과 예언서는 예배의 한 부분인 “소리침”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물론 “그 앞에 잠잠할찌니라” (하박국 2:20)고 하시는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 성경은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시47:1)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시5:11) 하나님은 소음을 좋아하시거나 권장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의 정의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소리쳐 나타낼 필요가 있다.
2) 요한계시록의 찬양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배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타난다. 네 생물들이 소리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 (계4:8) 그들은 또한 “영광과 존귀와 감사”(계4:9)를 주님께 드리고 있다. 24장로들은 보좌 앞에 엎드려서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앞에 던지며 말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라”(계4:11) 13절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들과 사람들, 지음받은 모든 것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는 시편 148편과 잘 어울린다.
7장 9-10에서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천사들과 장로들과 네 생물이 큰 소리로 함께 찬양하는 것이 나온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7:12)
또 19장에서 우리는 많은 무리가 소리치고 선포하고 엎드려 절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의 찬양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난처했던 것 같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19:6)
다시한 번 정리하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찬양의 본성과 최초의 원형들은 소리내어 말로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대부분 큰 소리로 드리는 것이었다. 때로는 교창으로 때로는 합창과 독창으로 드려졌다. 찬양은 자주 노래로 나타났지만 그보다는 소리쳐 외치는 외침으로 더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서는 일어서거나 손을 들거나, 절하거나, 엎드려 절하거나, 월계관을 벗어던지는 등의 행동들을 수반하는 것이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3) 찬양의 주소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113:3) 이 구절에서 말하는 해돋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는 단순히 아침과 저녁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해뜨는 땅에서 해지는 땅까지 즉 온 열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장소만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곳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임에서 일어나는 찬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때 기뻐하신다. 많은 시편의 구절들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시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26:12)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35:18)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임중에서 찬양하기를 원하시도 하시지만 특별히 원하시는 장소가 있다. (시96:3) “그 영광을 열방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중에 선포할찌어다” (시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린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 지하리로다” (시57:9) “주여 내가 만민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오직 성도들을 위한 것만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만민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의 영화로운 찬송이 불려지며 하나님의 찬송이 불신자들과 온 세상에 선포되기를 항상 원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찬양들과 만날 시편 40편 3절에서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여호와를 의지 할 것이라고 말한다.
찬양의 주소는 광장이란 말을 많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성도들뿐 아니라 저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결박하고 있는 세상의 한 가운데서 찬송되어지고 높임을 받으신 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찬양의 주소가 광장이라는 사실에는 숨겨진 비밀같은 엄청난 능력이 있다.
3. 찬양의 모델
1) 유다, 찬양의 모델 성경에 “찬양”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그 이름이 “찬양”을 뜻하는 유다의 탄생과 관련된 창세기 29:35이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야곱의 눈을 속이고 결혼한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인 유다를 낳고서야 비로서 야곱과 완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완전한 연합 속에서 자라 그의 이름인 “찬양”으로 불리는 유다는 한 가족, 한 부족, 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위대한 다윗왕이 나오고, 그 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유다라는 이름이 발견되는 성경의 어디서나 그 이름이 “찬양”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유다”가 발견되는 몇 개의 성경을 더 찾아보도록 하자
2) 오경에서의 유다 성경의 맨 처음에 나오는 다섯 책인 오경에슨 유다라는 이름이 40번도 더 나온다. 창세기 49장에서는 야곱이 유다에 대한 예언을 하며 그에게서 메시야, 그리스도가 나올 것을 말한다. 민수기 2:2-3에 따르면 유다의 장막은 떠오르는 태양과 성막에 들어가는 하나뿐인 문을 모두 다 바라볼 수 있는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맨 먼저 보는 것은 언제나 찬양하는 사람들이었다. 신명기33:7절에는 유다에 대한 축복이 있다. 모세는 유다지파에게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척을 치게 하소서”
3) 역사서에서의 유다 역사서 안에서 우리는 실천하는 유다를 볼 수 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가나안땅을 정찰하러 보낸 정탐꾼 중에는 유다지파의 한 사람인 갈렙이 있었다. 사사기 1:1-2에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싸움을 그의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타난다. 찬양은 싸움의 선봉이 되어 나갈 것이다. 역대하 20:21절에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 보내어 주님께 찬양하게 하였다. 그리고 승리하였다. 주님을 위해 전투를 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찬양을 배워야 한다.
4) 시가서에서의 유다 다른 시가서들은 모두 찬양을 매우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시편은 유다를 찬양의 모델로써 말하고 있다.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찌어다”(시48:11)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기뻐하였나이다”(시97:8). 찬양의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하나님 자신과 더 많이 교제하며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유다 성음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라”(시69:35) “유다는 그의 성소가 되고”(시114:2)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22:3) 찬양의 사람들은 거할 곳을 얻게 되고, 또한 그로 인하여 그곳을 하나님의 성소로 드리게 된다.
5) 예언서에서의 유다 유다에 대하여 예언서는 290이 넘게 언급하고 있다. 호세아 10;11절은 “유다가 밭을 갈고”라고 말한다. 찬양이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먼저 땅을 갈아 엎어준다고 예언자들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엘 3:18은 “그날에...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고 약속하신다. 매마른 곳에 물을 대주는 성령의 새로운 샘물은 찬양의 사람들 속에서 흘러나온다. 찬양은 단순한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성령의 흘러아노는 원천이며 근원이다.
구약을 마감짓는 말라기는 확언한다.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의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말3:4). 찬양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찬양의 모델이요 본보기인 유다! 그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반역하고, 가끔은 성급하고, 가끔은 게으르지만 주님께 찬양을 드림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려 하였다.
6) 예배의식과 찬양 구약의 예배의식은 과거를 기념하며 현재를 바라보며 미래를 기대하는 축제들이었다. 따라서 찬양하는 사람들의 찬양에도 세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우리는 그 분이 과거에 하신 일들을 기념하며 찬양한다. 그리고 그분이 현재 하고 계신 일들로 인하여 찬양한다.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예언적이 비전과 희망 때문에 찬양한다. 뒤를 보든지 주위를 보든지 앞을 보든지 항상 우리에게는 주님을 찬양할 동기가 주어진다.
세 가지 예배의식을 기억하자. 먼저 “전제“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29:40에 나타난 것처럼 포도주 4분의 1힌을 부어 드리는 제사의 한가지다. 두 번째로 “거제”이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선물, 선사”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꺼이 드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요제”이다. 이것은 빵, 과자 혹은 어린 양의 어깨등을 주님 앞에서 흔드는 것을 말한다. 출애굽기 29:24-25절에서는 주님앞에 흔들어진 요제물은 그 후 제단 위에서 주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로 태워진다고 말한다. 전제는 우리의 영의 흘러나옴을 예시하고, 거제는 우리의 혼의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보여주고, 요제는 우리의 육체를 포함시킨다. 즉 찬양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찬양의 사람들
성경속에서 예배하고 찬양하는 자들은 수 없이 많이 있다. 지금은 그중에서 특정한 그룹이나 계층의 사람들로 나타난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1) 모세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면서 홍해를 건너고 계속되는 적의 군대들을 물리친 다음, 모세는 목소리를 높여 선포와 예언이 담긴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출애굽기 15:1-2절은 선포하고 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이 모세의 노래는 요한계시록 15:3절에서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얻어 천국에 이르면 유리 바다위에서 많은 무리와 연합하여 모세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의 찬양은 우리들의 구원의 노래가 될 만큼 충분히 위대한 것이다.
2) 멜기세덱 창세기 14:18-20절에는 살렘왕 멜기세덱의 찬양이 나온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찬양을 통해 성직의 수락을 계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드보라 사사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 중에서도 바락과 함께 가나안을 물리치고 감동적인 승리를 한 드보라의 찬양이 가장 뛰어났다. 그것은 사사기 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2절과 9절이 그 노래의 절정을 이룬다.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4) 다윗 찬양과 예배에 관한한 다윗이야말로 유대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의 시편은 오고 오는 세대들로 하여금 찬양케 해 주었다. 시편 34:1-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그는 자신이 찬양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함께 주님을 찬양하자고 권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찬양하도록 노래하는 자들을 가르쳤고,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훈련시켰으며, 그들에게 24시간 온종일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찬양의 사람이었다.
5) 이사야 이사야서는 찬양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처음으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았고, 거룩한 찬양을 목격하였다. 이사야 12장은 전체가 찬양의 장이다. 이어 25장 1절에서, 35장 10절에서, 42장 10절에서, 그리고 잘아는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6) 하박국 하박국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비판과 “어느 때까지” “어찌하여”라는 질문들로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들으려고 기도탑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2:20)는 말로 2장을 끝맺는다. 그리고 그는 3장에서 소리내어 찬송하고 있다.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3:3)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8-19)라는 고백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나님을 고소하기를 더 좋아하던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거한 후로는 하나님께 찬양을 외치는 자가 되었다.
7) 바울 바울은 바울서신중에서 디도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들에서 찬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찬양을 노래하라, 찬양을 즐거워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라고 요청한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실라와 함게 좋은 찬양의 예를 보여주었다. 그는 찬양에 대해 가르치고 몸소 실천했다.
8) 요한 앞서 말한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 많은 무리들로 가득차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경배와 찬양이 들어있는 요한계시록은 찬양을 말함에 있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5. 찬양의 역사
1) 성경시대의 찬양 구약의 예배의식은 모세시대에 확립되었다. 그러나 제사제도에서의 예식적인 음악은 발견되지 않았다. 성전 예배에 음악을 도입한 것은 다윗이었다. (역대상 6:31-32) 성전 건립 후 찬양과 제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 부분은 앞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2) 사도시대의 찬양 초대교회에서 찬양은 매우 중요시 되었다. 앞서 말한 바울과 실라의 예가 대표적이다. 초대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였다. 그러나 그 모진 핍박과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사도시대는 짧은 시기였지만 많은 곡들이 작사되고 작곡되었다. 시편이외에 다른 가사로 부르는 찬송인 칸티클(Canticle)이 많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칸티클은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찬송등이다.
3) 중세시대의 찬양 (410-1517)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한 후 기독교가 지하 카타콤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이단적인 교리와 찬송이 교회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361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는 예배시 악기 사용금지, 새로운 창작 찬송 금지와 지정된 사람이외에는 회중들이 예배에서 찬송하는 것도 금지하며 회중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 이 규칙은 천년 동안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중세시대는 회중 찬송을 빼앗긴 시기였다. 그대신 교회음악은 전문가들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중세의 대표적인 찬송을 ‘찬트’(Chant) 라고 한다. 특히 그레고리안 찬트는 지금까지 사용되는 카톨릭 찬송이다.
4) 종교개혁시대의 찬양 (1517-1700)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시 회중 찬송을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며 모든 신자들이 자국의 언어로 말씀을 읽고 찬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적으로 자질이 있었던 그는 ‘코랄’(Chorale)이라는 독특한 회중 찬송의 장르를 탄생시키시도 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384)”는 아직도 애창되는 루터의 코랄이다.
루터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칼빈은 가톨릭의 예배전통을 모두 무시했다. 칼빈의 초기 예배에는 회중 찬송이 없다. 많은 고민 끝에 칼빈은 시편과 칸티클만을 부르게 했고, 화음으로 된 음악과 악기의 사용은 금했다. 그러나 개혁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다시 개혁교회는 예전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예배의 뜨거운 열기가 사라졌고 점차 의식이 예배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다시금 전문 찬송, 공연 찬송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하나 헨델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음악가이자 신앙인이었지만, 그들의 음악이 대중 찬송에 기여한 바는 조금도 없다.
5) 영미 각성시대의 찬양 (18-19세기) 근대 찬송은 영국의 아이작 왓츠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기본 찬송철학은 이랬다. “교회는 시편을 노래하든지 창작 찬송으르 노래하든지 신약성경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해석된 복음적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교회의 찬양은 노래 부르는 사람의 감정과 사상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현 시대 상황에 맞게 표현되어 불러야 합니다.”
한편, 그 당시 부르던 느린 시편 찬송가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의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였다. 그들이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찬송을 뜨거움과 열정이 있었다. 이것이 아마 현대 복음 찬송의 기초가 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왓츠와 감리교의 찬송은 미국에 전파되어 대각성 운동에서 불려졌다. 대각성 운동은 미국 개신교희 특징으로, 뜨거운 찬양과 열정적인 회중들의 반응이 있는 그런 운동이었다.
6) 20,21세기의 찬양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신교의 예배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 변화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루어진 자연 발생적인 변화이다. 현대를 이해하고 그 상황속에서 서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 현대예배는 이제까지 소홀히 여겨졌던 인간의 감성과 체험을 중요시하는 예배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예배는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자체해왔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감정을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예배는 잔칫날같은 축제가 아니라 하나의 예식, 또는 학교에서의 공부와 같은 성격을 갖었던 것이다. 현대예배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성경적 찬양이 살아난 예배이다. 인간의 감정을 해방시키는 예배이다. 법궤 앞에서 땀을 흘리며 찬양하던 다윗의 찬양이 되살아난 예배이다.
6. 찬양의 방법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찬양하기 원하시는 지 성경에 기록해 주셨다.
1) 손들기 손을 드는 것은 찬양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손을 드는 것은 네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 그룹날개와 같은 우리의 벌린 손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어린아이가 아버지께 달려가 손을 들고 않아달라는 듯이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고, 셋째, 하나님께 순종하고 항복한다는 의미가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손뼉치기 손뼉을 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시편 47:1절 등에 나와있는데, 손뼉을 치는 것은 단순히 박자를 맞추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만드는 또 하나의 형태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 손뼉이 예배를 방해하는 소음으로 변해서는 않될 것이다. (박자무시, 스스로 박자에 남들도 맞추기...)
3) 악기 연주하기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시편 150편등 성경에는 하나님께 찬양할 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여러군데 나와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 연주는 단순히 노래하는 것을 돕는다는 의미뿐아니라 악기 연주 그 자체로도 충분한 찬양이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손뼉과 마찬가지로 절제하지 못하거나 준비되지 못한 악기 연주는 예배를 방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럼, 일렉기타는 민감한 악기다. 누가 어떻게 어떤 태도로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 간단한 악기라도(리코더, 템버린 같은) 연습을 하면 예배에 큰 도움을 준다. 연주자들은 연습을 많이하라. 예배에 맞는 악기 연주자가 있다.(실력과 상관없이... 대중가요나 음악과는 다르다. 그러나 오륜교회 전태관 집사....)
4) 일어서기 일어서는 것이다. 성경어디에도 찬양할 때 앉아서 등을 기대고 찬양하라는 말을 없다. 성경은 여러부분을 통해서 일어서는 자세가 찬양과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자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일어서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존경의 표시이다. 만약 지금 이곳에 대통령이 들어온다는 우리는 존경의 의미로 다 일어설 것이다. 대통령이 와도 그럴진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예배와 찬양가운데 계시는데 우리는 앉아있을 수 만을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앉아 있을 때보다 서있을 때 우리는 집중하고 깨어있기가 더 쉬워진다.
5) 몸의 동작들로 찬양하기 몸의 여러 가지 동작들이다. 즉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거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거나 하는 몸의 동작들을 통해 찬양하는 것이다. 때로는 찬양의 가사에 나타난 대로 행동으로 옮겨보는 것도 큰 기쁨과 즐거운 찬양이 될 수 있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라는 찬양을 부를 때에 정말로 엎드려서 부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무릎꿇고 주께 경배합니다...를 고백하며 무릎을 꿇고...
6) 노래하기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동작이다. 많은 경우 찬양이라 할 때 이 노래하는 것이 전부인양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안타까운 부분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그냥 말로하지 왜 꼭 노래로 찬양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것이나 상관없지만 최대한 아름답고 귀한 소리로 찬양을 해야 할 때, 노래가 가장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찬양은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 좋다.
7) 춤추기 춤을 춘 사람의 대표는 다윗 왕이다. 그는 법궤를 가져올 때 춤을 추었다. 얼마나 열심히 추었든지 바지가 흘러내릴 정도였다는 것은 다 아는 내용이다. 춤추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찬양시간에 춤을 출 수는 없다. 단지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춤을 추어야 할 상황과 흥분이 있다면 춤을 추는 것도 하나의 찬양임을 기억하며 자유함으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춤이 찬양가운데 가져다 주는 기쁨과 유익도 무시할 수는 없다. (예, 주께 찬송해 춤을 추면서....이 찬양을 부르는 많은 교회와 예배를 보았지만 마음껏 춤추는 곳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우리 한민족의 정서로 볼 때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한 형태임에는 분명함으로 앞으로 나름대로 우리 정서에 맞에 계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8) 외치기 마지막으로 외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찬양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여드리는 것이다. 반드시 음율과 화성, 리듬이 없어도 찬양할 수 있다, 그 방법중의 하나가 바로 외치는 것이다. (광림교회 4부예배 20분동안의 외침찬양....)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때 소리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이 소리지를 때 적들은 떨었다. 이 외침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7. 찬양의 능력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찬양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찬양을 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찬양을 통한 능력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찬양은 영적인 무기이다. 시편 149편 7-9절에는 그것이 무기로 사용되었을 때 우리에게 그 위대함과 능력을 보여주는 다섯가지의 특별한 기능이 나타나있다. 첫째로, 우리는 열방에 보수(복수)할 수 있고(7절), 민족들을 벌할 수 있고(7절), 저희 왕들을 사슬로 결박하고(8절), 저희 귀인을 철고랑으로 결박하고(8절), 마지막으로 기록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 수 있다.(9절) 찬양은 악한 영에게 대적하는 영적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2) 찬양은 묶인 것을 푼다.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실라를 기억하자, 찬양은 영과 혼과 육의 묶인 것을 푸는 능력이 있다. 해방과 자유함을 찬양가운데 얻게 된다.
3) 찬양은 악신을 떠나게 한다. 사무엘상 16장에 나온 다윗의 찬양으로 사울에게서 악신이 떠난 것을 기억하자.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회에서 나타난 현상들... 지금도 나타나는 악신이 떠나는 현상들...
8.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
1) 사탄의 훼방 사탄의 훼방은 반드시 그것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모든 부정적인 것은 사탄의 훼방으로 돌리기 때문에, 찬양의 방해가 된다. 사탄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왔기 때문에 찬양의 위력을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찬양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할 수 없도록 하는 사탄의 유일한 기회는 찬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우리로 하여금 찬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 승리하는 찬양을 드릴 수 있냐는 질문에 어떤 사람이 “사탄이 초인종을 누르면, 나는 예수님께서 응답하시도록 요청합니다.”라고 대답했다.
2) 죄 다윗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여도 아무느낌과 감격이 없다면 마귀를 꾸짖지 말고 죄를 회개하자.
3) 죄의식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 또는 예배를 인도하는 예배자의 입장에 설 때, 마귀는 ‘너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없어,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아니냐? 너 자신을 봐라. 너의 행위를 봐라. 너의 성품을 봐라’하면서 사람들에게 정죄감을 심어주거나 사람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이름을 ‘참소하는 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예배의 방해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러한 마귀의 참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전에, 마귀는 긴 죄의 목록을 가지고 와서 ‘봐라, 이것이 네가 한 주간 동안 지었던 죄다’하고 참소합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에게는 더합니다. ‘네가 영혼들을 이끌어 간다고 하면서 너는 이렇지 않느냐?’ 할 때 자칫 기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를 상실해 버립니다. 정죄감에 사로잡히고 좌절에 빠져 예배드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의 피로 나를 의롭게 하셨기에 나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그 공로를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라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란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가 내 앞에 나아올 때는 이러이러하게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의지하면서, 나의 상태에 관계없이 어린 양이신 예수의 흘리신 피를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4) 두려움 두려움은 우리 자신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내적인 감정들을 자유롭게 하는데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조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순수한 그 자체로서의 두려움이다. 두려움보다 더 빨리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경험은 없다. 두려움은 건전한 사고를 멈추게 하고, 감각들을 마비시키고, 의지를 억누른다.
5) 자기 이미지 자기를 너무 높이는 사람뿐 아니라, 자기를 너무 낮추는 사람들 모두 찬양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자기를 형편없게 생각하는 것이나 모두 자기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이다.자기 비하는 달란트를 없신 여기고 하나님의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높이지도 너무 낮추지도 말아야 한다.
6)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우리의 하나님께서 가혹하고, 포악하고, 엄격하고, 냉혹하고, 준엄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께 찬양의 행복한 감정들을 드러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고상하고 높아서 비인격적이며, 다가갈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게 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 찬양으로 예배하는 일을 어렵게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7) 근심 이사야 61장 3절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근심하는 자에게 찬송의 옷”을 주신다. 우리가 찬송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근심의 옷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자기연민과 자기의 슬픔을 즐기는 것, 그리고 슬퍼하는 것과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부정적인 삶에는 찬양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둘은 대치되는 것이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승리가 눈물을 대신하고, 기쁨의 외침이 흐느낌을 대신하고, 찬양이 근심을 대신한다.
## 우리의 삶에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고 해서 찬양을 회피하지 말라, 찬양으로 그것을 정복하라. 우리가 그것들을 이기게 될 것이며, 찬양이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도들의 품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