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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1호선 (병점~지하청량리 구간) 역명 유래
1. 병점 --- 餠店, 이 근처에 떡 장수가 많았다고 해서 유래.
2. 수원 --- 水原, 물의 원천 이라는 뜻.
3. 세류 --- 細柳, "버드내"를 한문 식으로 함.
4. 화서 --- 華西, 수원에 위치한 화서문의 마을이라는 뜻.
5. 성균관대 --- 成均館大, 이 역 근처에 성균관 대학교의 자연 과학 캠퍼스가
있어서 역명 제정.
6. 부곡 --- 富谷, 조선 중엽 남양부사가 이 마을에 들렀는데 "빈골"이라는 그
당시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부의 마을"이라는 뜻의 부곡이라고 칭함.
7. 군포 --- 軍浦,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왜군에게 패해 이 지역으로 내려와서
굶주린 관군을 배불리 먹인 지역이라 유래.
8. 금정 --- 衿井, 옛날 이 지역은 벌판에 자리잡아 물이 풍부해 우물만 파면
물이 나와 아낙네들의 옷을 적셨다는 데에서 유래.
9. 명학 --- 鳴鶴, 주변에 두루미가 많이 서식, 유래.
10. 안양 --- 安養, "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
11. 관악 --- 冠岳, 주위에 관악산이 있어 유래.
12. 석수 --- 石水, 이 마을에 석공 들이 많아 유래.
13. 시흥 --- 始興, 고려 6대 성종때, 별호(임금이 마을이나 지역에 칭하는
명칭)를 시흥이라 칭한데서 유래.
14. 독산 --- 禿山, 마을에 숲이 없어 "벌거숭이 산" 이라고 불린 데서 유래.
15. 가리봉 --- 加里峰, "고을+산 봉우리" 의 합성어, 유래.
16. 구로 --- 九老, 이 마을에 현명한 9명의 노인이 살았다고 하여 유래.
17. 신도림 --- 新道林, 인근의 신도림동에서 명명.
18. 영등포 --- 永登浦, 이 지역의 포구에서 선박이 출하하여 유래.
19. 신길 --新吉,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라는 지역명 제정의 의미에서 유래.
20. 대방 --- 大方, 마을명에서 유래.(번대방리에서 바뀜)
21. 노량진 --- 鷺梁津, 수양버들과 노량나루터가 있어 유래.
22. 용산 --- 龍山, 백제시대에 두 용이 나왔다는 데에서 유래.
23. 남영 --- 南營, 조선시대에 남쪽 병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
24. 서울역(지하) --- 서울驛, 1900년, 남대문역으로 시작된
서울역이 위치한 데에서 유래.
25. 시청 --- 市廳, 인근에 서울시청이 있어 제정.
26. 종각 --- 鐘閣, 인근에 보신각이 있어 유래.
27. 종로3가 ---鍾路3街, "운종가"라 칭한 서울의 상업중심가에서 유래.
28. 종로5가 --- 鍾路5街, 27번과 뜻 동일.
29. 동대문 --- 東大門, 서울의 대표적인 대문, 흥인지문(동대문)이 있어 유래.
30. 신설동 --- 新設洞, 조선 초기에 새로 설치(계획)된 마을이라 하여 유래.
31. 제기동 --- 祭基洞, 조선 성종이 풍농을 위해 이 곳에 친경대를 만들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 데에서 유래.
32. 청량리(지하) --淸凉里, 청량 1동에 있는 청량사에서 유래 된 것으로 전함.
□5호선
역 명 |
유 래 |
방 화 (傍 花) |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 옆에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생겨난 동명에서 유래 |
개화산 (開花山) |
산의 모양이 꽃피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개화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의 영향으로 유래됨 |
김포공항 (金浦空港) |
김포공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송 정 (松 亭) |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부른데서 유래 |
마 곡 (麻 谷) |
옛날에 이 동네에 삼(麻)을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발 산 (鉢 山) |
내․외발산동이 경계를 이루는 해발 72.3m로 수명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발산이라 불림 |
우장산 (雨裝山) |
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 제5동에 걸쳐 있는 높이 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우장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화 곡 (禾 谷) |
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계곡에서 황금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하여 유래됨 |
까치산 (까치山) |
봉제산(매봉산) 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 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제산 일대의 까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
신 정 (新 亭) |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幾 : 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유래 |
역 명 |
유 래 |
목 동 (木 洞) |
목동의 동명은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천군 남산면의 작은 부락인 달기리, 엄지리, 남아리, 모새미, 마장안을 합쳐 외목동, 내목동, 월촌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牧洞(목동)이 라 하였고 점차 표기가 달라져木洞(목동)으로 불려졌다 |
오목교 (梧木橋) |
조선초 한강의 3대 나루터에 속했던 양화나루를 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안양천 위에 세워졌던 다리이며, 당시 오목내라 불리던 지금의 안양천 위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오목교(梧木橋)라 불리게 됨 |
양 평 (楊 坪) |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으로 楊花津의 楊자와 벌坪자를 따서 “양평”이라 명명됨 |
영등포 구 청 (永登浦區廳) |
영등포구청역은 인근에 영등포구청이 있어 명명되었고, 영등포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있는 성황당에서 영등포굿을 했던 관계로 영등포라는 이름이 불리어지게 되었다. |
영등포 시 장 (永登浦市場) |
1936년 일제칙령에 의거 영등포시장이 형성되었고, 1967년 당시 시장의 명에 의거 현대화 상설시장으로 변모한 이래 현재에 이름 |
신 길 (新 吉) |
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서울로 들어오는 영등포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신길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신기라고 불려진 마을이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
여의도 (汝矣島) |
예로부터 라의주로 불렸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 “너의 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이것이 한자말 여의도(汝矣島)로 호칭됨 |
여 의 나 루 |
옛날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나루터가 마포와 여의도 동쪽에 형성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나 한강다리 건설로 없어졌던 여의나루터에 1986년 유람선 선착장이 개장되었다. 여의나루 역명은 여의나루터 옛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
역 명 |
유 래 |
마 포 (麻 浦) |
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 마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삼(麻)개(浦)의 한자음에서 따옴 |
공 덕 (孔 德) |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
애오개 |
애오개는 “작은 고개” 또는 어린애와 관련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사이에 있는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아기고개, 아이고개, 애고개, 애우개로 호칭되었음 |
충정로 (忠正路) |
충정로는 순국선열의 대표인물인 충정공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였던 것으로 충정로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부르게 되었다. |
서대문 (西大門) |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으로 도성 서쪽의 정문이다. 서대문의 정식명칭은 돈의문이며 새로운 문이란 뜻으로 새 문, 신문이라고도 불림 |
광화문 (光化門) |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정문으로써 당초 1359년(태조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7년)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
종로3가 (鐘路3街) |
조선시대에 인정과 파루라고하여 아침, 저녁 사대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소리로 알렸는데 그 종루가 있는 거리의 뜻으로 종로라 불림 |
을지로 4가 (乙支路4街) |
을지로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 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로 을지로4가 명명되었다. |
역 명 |
유 래 |
동대문 운동장 (東大門運動場) |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려졌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정병들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 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항 후에는 이곳에서 별기군이란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
청 구 (靑 丘) |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을 제정 |
신금호 (新金湖) |
금호의 옛말은 무쇠막(무수막)으로 조선시대 한자음으로 수철리로 불리다 금호동이라 바뀌었다. |
행 당 (杏 堂) |
행당동 동명은 갑오개혁(1894)부터 행당리동으로 칭하여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
왕십리 (往十里) |
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 |
마 장 (馬 場) |
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동이라 불리게 됨 |
답십리 (踏十里) |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라 했다는 구전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에서 유래됨 |
장한평 (長漢坪) |
신라시대에 장한성(長漢城)이 축조되어 인근지역이 장한벌 또는 장한평으로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장안평으로 잘못 불려져 왔던 것을 삼국시대부터 불리워진 이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다시 찾은 것임 |
군 자 (君 子) |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
역 명 |
유 래 |
아차산 (峨嵯山) |
광진구 능동 일대에 있는 아차산을 고유지명으로 아차산과 아차성은 예로부터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과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
광나루 |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분나루라고 불려졌다. 옛부터 강원․충청 등지의 광물, 목재 등의 주요 운송로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였음.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됨 |
천 호 (千 戶) |
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옛날부터 이 곳이 인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
강 동 (江 東) |
강동역의 유래는 인근에 강동구청이 자리하는 관계로 구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강동구는 1979년 10월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신설되었다. |
길 동 (吉 洞) |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 하여 길동이라 불렸다는 설과 마을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기리울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
굽 은 다 리 |
당말이란 마을과 벽동이란 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 굽은다리라 불렀다. 두 마을을 합하여 굽은다리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라 하였다. |
명 일 (明 逸) |
고려 성종 11년(994년)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 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
고 덕 (高 德) |
고려말 형조참의 이양중이 태조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벼슬도 거절하는 등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 받아 고덕리 또는 고덕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 |
상일동 (上一洞) |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내(川)의 위쪽이므로 이름을 따서 상일동이라 칭함 |
둔촌동 (遁村洞) |
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은사인 이집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 이라 하였다. |
역 명 |
유 래 |
올림픽 공 원 (올림픽公園) |
88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된 올림픽공원과 올림픽기지촌 및 선수촌 아파트를 배경으로 역사가 위치함으로써 명명됨 |
방 이 (芳 荑) |
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이라 고쳐진 것이다. |
오 금 (梧 琴) |
일찍이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곳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오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이 있다. |
개 롱 (開 籠) |
조선조 이조때 임경업장군이 갑박산에서 고리궤짝을 주어와서 현재 가락2동 개롱 그린공원 위치에서 고리궤짝을 열어보니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하여 개롱이라 전해옴 |
거 여 (巨 余) |
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래면의 일부로서 거암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검이, 겜리라 불리다가 경기도 구역행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라 부름 |
마 천 (馬 川) |
이 지역에 있는 마산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 데서 유래된다는 설과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마산(천마산)을 가는 도중 백마를 얻어 거여동을 지나다가 백마에 물을 먹여 백마물이란 곳이 있고, 아무리 가뭄이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馬川이라 하였다는 설이있음 |
□6호선
역 명 |
유 래 |
응 암 (鷹 岩) |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골이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 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
역 촌 (驛 村) |
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 |
불 광 (佛 光) |
불광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
독바위 |
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줄임말로 독바위굴의 바위가 독(항아리)과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연신내 |
옛날 이곳은 산골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 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흔히 이곳을 연신내라고 하는 것은 연서천을 이처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구 산 (龜 山) |
경기도와 도경계를 이루는 뒷산의 산 모양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옛부터 그 아래 마을을 구산동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 |
새 절 |
새절은 신사의 한글 명칭으로 새절은 언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새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
증 산 (繒 山) |
증산동 뒤에 있는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이 생겼으므로 시루메라 하며, 시루는 물이 새어 좋지 않다하여 아름다운 비단의 뜻을 빌어서 증산(繒山)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수 색 (水 色) |
지역적으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
역 명 |
유 래 |
월드컵 경기장 (성 산) |
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 있어 우리말로 “성메” 또는 “성미”라 부르던 성산(城山)이 있는데서 연유되었다. |
마 포 구 청 (麻浦區廳) |
마포는 우리말 “삼개”로 불리워지는 포구이름 麻浦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 인근에 마포구청이 위치하고 있어 마포구청역이라 명명 |
망 원 (望 遠) |
망원동은 효령대군이 지은 정자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이었으며, 성종15년(1484년) 월산대군이 이름지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이 있었던 데서 유래됨 |
합 정 (合 井) |
합정동은 옛날 양화나루 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라고 호칭하였고, 조개우물로 불리어지는 우물이 있다하여 합정(蛤井)이라 하다가 후에 합정(合井)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음 |
상 수 (上 水) |
상수동의 옛 지명은 서강방 수일리계였는데 한일합방 후 서강면 상수일리가 되었다가 상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상수동이란 동명은 강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광흥창 (廣興倉) |
조선시대 경기와 3남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수미를 쌓아 두었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 1년에 쌀 19,000석, 대두 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가 있었다 하여 광흥창이라 하였다. |
대 흥 (大 興) |
대흥동은 “동막하리”라 하여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지역으로 “독마을”로 불려졌다. 일제시대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 옹리의 지명이 동막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1936년 경성부의 대흥정이 되었으며 그 후 몇 차례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거쳐 1946년10월 오늘의 대흥동이 되었다. |
공 덕 (孔 德) |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
역 명 |
유 래 |
효 창 공 원 앞 (孝昌公園앞) |
백범로와 효창공원 길의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역은 인근에 효창공원(문화재 사적 지정 330호)이 자리잡고 있으며 공원 내에는 김구 선생묘, 삼의사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및 임정요인 묘(이동녕, 차이석, 조성환)가 있어 사적지로 유서가 깃들인 곳이다. |
삼각지 (三角地) |
한강, 이태원, 서울역 방면으로 나있는 도로의 모양이 세모졌다는데서 유래되었다 |
녹사평 (綠莎坪) |
조선시대 고종까지만 하더라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하여 인가가 희소하던 곳이라 해서 녹사평(綠莎坪)이라 불리어진 것에서 유래 |
이태원 (梨泰院) |
조선시대 때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역원으로서의 이태원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명칭을 가진 동네가 용산구 동북쪽에 자리잡아 현재의 이태원동이 되었다. |
한강진 (漢江鎭) |
한강진터가 있던 곳에서 유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제천정(濟川亭)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싸운 곳. |
버 티 고 개 |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
약 수 (藥 水) |
버티고개에 있는 약수(藥水 : 위장병에 특효가 있음)의 이름을 딴 약수동의 지명에서 유래 |
청 구 (靑 丘) |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으로 제정 |
역 명 |
유 래 |
신 당 (新 堂) |
조선 영조27년(1751년)에 반포된 수성책자『도성 3군무 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신당리계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 남서 두모방(성외)왕십리계의 신당리동으로 되었는데 신당동은 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과 함께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광희문 밖에 위치한 이곳은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 무당촌을 이루어 新堂이라는 명칭이 유래됨 |
동묘앞 (東廟앞) |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호)으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가 꿈에 관우를 현몽한 후 왜병을 격퇴했다고 하여 명의 신종이 난(亂) 후에 비용과 친필로 쓴 현액을 보내와 선조때(1601년) 창건하였는데 그 후 영조15년(1736년)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창 신 (昌 信) |
창신동은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 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하였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음 |
보 문 (普 門) |
보문동3가 168번지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년 8월 대통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
안 암 (安 岩) |
큰 바위가 있어 편히 쉴만하고 그 바위 이름을 “앉일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으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됨 |
고려대 (高麗大) |
고려대학교위 부지위에 역이 위치하여 대학명을 역명으로 사용. 종암동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鼓)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鍾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
월 곡 (月 谷) |
하월곡동에 있는 산의 형세가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그 산에 연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 월곡(月谷)이라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
역 명 |
유 래 |
상월곡 (上月谷) |
상월곡동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유래, 이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월곡상리로 명명.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름. |
돌곶이 |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하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석관동(石串洞)이라 함. |
석 계 (石 溪) |
석계역은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 글자인 석(石)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계(溪)자를 조합하여 제정 |
태 릉 입 구 (泰陵入口) |
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 |
화랑대 (花郞臺) |
인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화랑대를 역명으로 제정 (국철 경춘선 화랑대역이 있음) |
봉화산 (烽火山) |
봉화산은 일명 봉우재라고 불리는데 1963.1.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됨. 봉화산이라는 이름에서 봉화와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목멱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난 1994.11월 봉수대를 복원하였음. |
□7호선
역 명 |
유 래 |
장 암 (長 岩) |
장암동은 원래 둔야면 장자리(長者理), 오암리(烏岩理), 동막리(東幕理)를 1965년에 시둔면 장암리로 부르다가 1964년에 장암동으로 개칭되면서 오늘날까지 동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도봉산 (道峰山) |
도봉산역은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가 1914년 4월 우리나라의 부, 군, 면을 폐합할 당시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서말원, 무수원 등 마을을 합하면서부터 도봉 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
수락산 (水落山) |
상계동의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에 있는 수락산은 도봉산과 마주하며 서울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산은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발 638m로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웅장할 뿐아니라 계곡이 깊고 수려하며 산 전체가 석벽과 암반으로 도처에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
마 들 |
예전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어서 순우리말인 마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
노 원 (蘆 原) |
조선시대 육상교통의 수단인 역점으로서 노원역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몹시 곤란을 당하여 나라에서 원을 세워 노원이라 하였다 |
중 계 (中 溪) |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가운데 中자와 시내 溪자를 붙여 중계라 했음. |
하 계 (下 溪) |
하계동은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아래쪽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공 릉 (孔 陵) |
1963.1.1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공덕리의 孔자와 태릉의 陵자를 따서 공릉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
태 릉 입 구 (泰陵入口) |
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 |
역 명 |
유 래 |
먹 골 |
먹골은 조선시대 먹을 제조하여 붙여진 묵동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며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이름으로 붙여야 학문이 발달할 것이라는 필기설에 따라 정해졌다는 설이 있다. |
중 화 (中 和) |
중화동은 예로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의 하나인 가운데 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주민의 건의로 “下”자 대신 화목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和”자를 넣자는 뜻에 따라 중화동으로 명명되었다. |
상 봉 (上 鳳) |
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上里와 鳳凰洞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上里의 上자와 鳳凰洞의 鳳자를 따서 上鳳里라고 붙인데서 유래한다. |
면 목 (面 牧) |
면목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목장이 위치한다하여 지명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부터 중계, 하계, 면목리 등이 합해져 면목동이 되었다. |
사가정 (四佳亭) |
아차산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거정(세종 2년~성종19년)의 호를 따서 사가정길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
용마산 (龍馬山) |
용마산(348M)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구리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과 함께 서울의 외사산을 형성하고 있는 이산은 예전에 용마가 나왔다하여 용마산이라 불리워졌다. |
중 곡 (中 谷) |
동네가 능말(능동)과 면목동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데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
군 자 (君 子) |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
어린이 대공원 (어린이大公園) |
인근에 어린이 대자연 공원인 어린이대공원('73.5.5)이 자리하고 있어 어린이대공원이라 지칭되었다 |
역 명 |
유 래 |
건대입구 (建大入口) |
역사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위치함 |
뚝 섬 유원지 (뚝섬遊園地) |
옛날 살곶이들이라고 하였으나 80년대 한강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연면적 547,000㎡(16만6천여평), 연인원 200만명의 시민이 이용하고 있는 뚝섬유원지가 있어 명명되었다 |
청 담 (淸 潭) |
한강연안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현 134번지 일대의 한강변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때 청담리라 불리어졌고 이후 서울시에 편입되어 청담동으로 지칭. |
강 남 구 청 (江南區廳) |
청담․논현․삼성 등 3개동의 경계부근(삼성동 8번지)에 위치하고 인근 강남구청으로 인하여 강남구청역으로 명명 |
학 동 (鶴 洞) |
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 학곡, 학곡동으로 지칭되었다. |
논 현 (論 峴) |
논고개라는 고개의 지명을 본떠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현재 논현동에 위치하고 있는 천주교회 위치가 마루턱이 높은 고개였으며, 또한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반 포 (盤 浦) |
반포라는 지명은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蟠浦)라 하다가 변음되어 반포(盤浦)로 칭함. 일설에는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도 함. |
고 속 터미널 (高速터미널) |
1976.9.1일 강북에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 이전하였고 3호선 고속버스터미널과 환승역으로 동일 역명 제정 |
내 방 (內 方) |
방배동은 관악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方背)라 한데서 연유하며, 일설에는 동네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방배동으로 불리워 짐. 현재 운영중인 지하철 2호선 방배역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방배동 안쪽에(內) 자리한다고 하여 내방이라 제정. |
역 명 |
유 래 |
이 수 (梨 水) |
이수(梨水)란 옛날 배나무를 많이 재배하던 마을 동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유래되었음 |
남 성 (南 城) |
남성동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 능행시 행차길인 현재의 사당동 일대가 예전에 여시고개, 살피재 등으로 불리었으나 임금의 행차길이 이물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여시고개를 남쪽의 큰 재라하여 남태령으로 고쳐부를 때 태령의 재 성(城)자를 따서 남성동이라 일컬었음. |
숭실대 입 구 (살피재) |
살피재 고개는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짐 |
상 도 (上 道) |
옛날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상투골 이라고 칭하던 것에서 유래됨 |
장 승 배 기 |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리(理)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능도 수행했고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의 샤머니즘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유래는 조선중기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수원의 묘소를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당시 나무숲이 우거진 이 곳에서 쉬기란 적적하기 그지없어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함 |
신대방 삼거리 (新大方삼거리) |
조선시대는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번대방리(樊大方理)였고 '50.3.15일 신대방동으로 개명. 신대방은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대방동, 대방동, 상도3동의 삼거리에 위치하고 널리 알려진 지역명칭임. |
보라매 |
보라매란 순우리말로 생후 일년이내의 사냥을 위해 길들여진 매를 말하는데,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새가 보라매임. 보라매공원은 공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보라매공원으로 하였음 |
역 명 |
유 래 |
신 풍 (新 豊) |
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영등포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신풍은 수원가도 이서(以西)의 지역을 관할하는 옛 동명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대 림 (大 林) |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함 |
남구로 (南九老) |
본래 구루지 마을과 각만이 마을, 새말, 주막거리, 옻우물약수터 등의 마을이 모여 형성되었으며, 옛날에 이곳에 아홉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에서 구로라는 지명이 유래함 |
가리봉 (加里峰) |
이 마을 주위 작은 산봉우리가 이루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또는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에서 유래가 있다. |
철 산 (鐵 山) |
뒷산이 쇠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리(牛頭里)라고 불리다가 쇠와 철은 소리는 다르게 나지만 같은 뜻이기 때문에 철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광명 사거리 (光明사거리) |
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 중앙에 위치한 수도 서울의 인접도시로 광명이라는 명칭은 다른 곳 보다 해와 달이 잘 비추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
천 왕 (天 旺) |
인근 주산이 굴봉이고 굴봉산 골짜기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라는 뜻에서 천왕골로 불려진데서 역명이 유래됨 |
온 수 (溫 水) |
조선왕조 세종20년(1438년)경 서울 양천구와 부천 소사구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이 곳 부평도호부 일대에서 더운물이 솟아 나온 기록이 있어 온수골이라 칭하다가 1963년 서울시 조례 제276호에 의거 온수동으로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음 |
□8호선
역 명 |
유 래 |
암 사 (岩 寺) |
암사동 산 23번지 일대에 신라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하였으므로 그 한자명으로 암사리라 한데서 연유하였음 |
천 호 (千 戶) |
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이곳이 인가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
강 동 구 청 (江東區廳) |
조선시대 고종32년 풍납토성 안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성안말, 안말 또는 성내처로 부렸던 곳으로 현재의 이름은 강동구청이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어 결정됨 |
몽 촌 토 성 (夢村土城) |
고대 삼한 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곰말은 고어로 큰마을을 뜻하며 한자음으로 고쳐서 몽촌이 되었고 3세기경부터 5세기말까지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해 자연 구릉 상에 방어용 토성을 축성하여 현재까지 올림픽공원 내에 사적 제297호로 보존되고 있으며 역세권 인근에 위치하여 몽촌토성역이라 명명됨 |
잠 실 (蠶 室) |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실이라 불리어졌다. |
석 촌 (石 村) |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진지를 만들기 위해 돌을 옮겨다 놓아 이곳에 돌이 많게 되어 주민들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돌마리」라고 불렀다. 이것이 한자음으로 「석촌」으로 표기되고 현재의 석촌동이 되었다. |
송 파 (松 坡) |
예로부터 삼남(三南)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산지로 조선조 5대향시중의 하나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송파는 언덕 위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산 좋고 물 맑은 강변마을이었으며 이로부터“소나무가 푸르른 언덕”이라는 뜻의 松坡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
가 락 시 장 (可樂市場) |
가락동은 조선시대 가락골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년)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그 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가히 살 만한 땅」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농수산물 종합도매시장이 1985.6.1 개장되어 서울시민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어물, 축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
문 정 (文 井) |
조선 중기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가시다가 이곳 우물에서 물을 드시고 물맛이 매우 좋고 文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문씨의 文자와 우물의 井자를 합하여 文井이라 하였다 |
역 명 |
유 래 |
장 지 (長 旨) |
장지동은 잔버들이 많은 지역이라 잔버드리라는 설과 또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복 정 (福 井) |
복정동의 명칭은 복우물(福井)에서 유래한다. 구전에 의하면 큰 우물이 있었던 곳은 현 정수장 뒤인데 안골로 가는 길, 또는 길과 밭 사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장산 복정동쪽 상봉에 있는 칠성대의 감로천이 우물이라고 한다. |
산 성 (山 城) |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98. 10.1 “남한산성”에서 “산성”으로 역명 변경 |
남한산성입구 (南漢山城入口) |
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역세권 내에 수원지법 성남지원 및 검찰청사가 있어 이용승객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1998.10.1부로 남한산성입구(성남법원, 검찰청)역으로 병기하게 됨 |
단 대 오거리 (丹垈오거리) |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초면 단대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시 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그 붉은 고개 밑이 되므로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신 흥 (新 興) |
백제시대(기원 18년)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옛터로 통일신라시대(서기 660년)에는 한산주 또는 남한주로 개칭하였고 1973.7.1 시승격과 동시에 신개발지로서 새롭게 발전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신흥동으로 명하여 전래되고 있다. |
수 진 (壽 進) |
세종대왕의 7째 아들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을 지었으므로 수진리라 불러왔는데 1973년 7월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으로 바뀌었다. |
모 란 (牡 丹) |
이북평양이 고향인 김창숙이 월남하여 예편하고 광주군수를 지낸후 1970년 당시의 광주군 들마면 하대원리에서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하여 동네가 형성되자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
첫댓글 소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