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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척외정치 외친 개혁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1898년)
명성황후 폐출 기도
갑오경장 초기에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에 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좌절당하였다. 그는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호응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연관성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개화파 암살 시도
1894년 9월 상순 허엽, 이병휘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이어 개화파 암살을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담당시켰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축출 및 이준용 추대 쿠테타가 실패한 것이 개화파들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김국선은 서울 창의문 내 신당에 살고 점술이 직업인 심원채로 하여금 무리를 모으게 하여, 전동석 이하 여러 사람을 모았다. 전동석과 심원채는 사제간이었다. 조용승, 윤진구, 정조원 등 은 이 일을 찬조하여 그 비용을 마련하였다.
거사와 관련하여 대원군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고종주에게 서간이 보내졌다. 1894년 9월 14일에 보낸 1차 서간에서는 김학우, 김가진, 김홍집 3인이 거명되지 않았고, 창의문 용사가 많이 모여 개화당을 진멸할 수 있다고만 하였다. 9월 20일에 보낸 2차 서간을 통하여 비로소 3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리고 9월 27일 보낸 3차 서간에서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전달할 때 김국선이 구전으로 이완용, 이윤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권모 등을 지목했다. 이 서간에서는 기회를 놓치면 성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지시에 따라 전동석에게 전하여 돌려보게 하였다. 대원군의 4차 서간은 9월 30일에 보내졌다.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된 개화파들의 동태를 살펴오던 이들은 김학우의 주변에 계엄이 없음을 탐지하고 심원채가 모은 장사, 검객을 동원하여 거사에 착수하였다. 자객들은 1894년 10월 3일 밤 김학우의 서울 전동 사저를 습격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김학우를 죽이고 그의 친구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어 다른 개화파들을 죽이려 했지만 경무청의 기찰이 엄해 착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암살을 통한 개화파 제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894년 7월 초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제3차 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 소신을 피력하자, 일본은 그에게 은퇴를 강요한다. 그와 동시에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다시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대원군은 흥친왕과 이재선, 고종보다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손자 이준용을 총애하였다.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 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 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 측이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었다. 이에 대원군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 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다. 결국 이준용 추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했다.
1895년 3월 24일 이준용이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이준용을 구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나서서 결국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은 일본영사관 영사로 임명되어 떠나게 됐다.
농민전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한 대원군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대원군은 정계은퇴를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1895년 4월 29일 발표된 대원군존봉의절에 의해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대원군존봉의절에는 '대문에 총순, 순검으로 입직케 한다', '대소신민이 칙명 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알현치 못한다', '출입할 시에는 궁내부에 먼저 알려 궁내부관원으로 배종케 하고 입직하는 총순, 총검도 경위케 한다'고 하여 대원군과 외부 인사의 접촉을 사실상 차단했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의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후에 유길준은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대원군이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거사를 단행한 것이 가장 큰 실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1895년 초 김홍집, 유길준 등의 급진적 개화파를 포섭, 내통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 계열, 민씨 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처지였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민겸호, 민영목, 흥인군 등을 사살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김옥균의 암살을 획책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개화파를 제거하려 하였지만 고종, 명성황후와 개화파 간에 사이가 틀어지면서 대원군은 이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급진 개화파는 대원군에게 명성황후가 개혁가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알려왔고, 대원군은 명성황후 및 온건 개화파, 근왕세력과 등을 돌리게 된 유길준 등의 급진 개화파를 포섭했다. 개화파와 손잡은 그는 명성황후 제거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다녔다.
명성황후 암살 계획
위정척사파, 동학 농민군, 개화파 일부와 손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본격적으로 명성황후 폐출 작업에 착수한다. 청나라와 일본 공사관의 청나라 외교관, 일본 외교관을 설득하여 명성황후의 패륜성을 지적하며 그를 폐출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 고 지적했다.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의 강요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적은 성명서였다. 일본에서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거사 고유문이 발표되면서 첩보를 입수한 조선의 식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을미사변 전후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자객이 파견되자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돕도록 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양력 10월 8일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향에 대해 단지 ‘반일 성향이 아니었을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1895년 가을 그는 일본 영사관을 찾아 일본 공사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유길준에 따르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명성황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시해된 뒤 손자 영선군 이준용은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이준용의 석방 직후 흥선대원군은 즉시 강화군 교동도로 사람을 보내 을미사변의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강화군 교동도에 머무르다가 한성부로 갔다.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했다.
명성황후 살해 배후 의혹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일본 낭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암살에 대해 그는 간판마담으로 끌려간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유길준, 박은식 등은 그를 의심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유길준은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보낸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한편 유길준 역시 명성황후 살해 당시 협력한 조선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윤 3월 26일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고종은 을미사변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이라 봤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西門)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아소당 뒤뜰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898년 5월 16일 한성부 성저십리 서강방 상수일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합장, 이장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雲川面 大德洞) 산 동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년) 11월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1908년) 2월1일에 마무리됐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이라 한다.
헐버트(H.B Hulbert)는 자신의 저서《대한제국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 김동인은 역사소설《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은 지배계급의 횡포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대원군이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민중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동인은 대원군을 호랑이같은 사내대장부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줄을 아는 속깊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원군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는 기녀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 이라는 평가가 있고, 반면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이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보낸 치서(致書)에서도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에 대한 대량학살과 동학 탄압, 서원 정리 과정에서의 유학자 탄압 역시 인권탄압과 종교탄압이라는 비판이 있다.
손자인 순종은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고 평가했다. 현재,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
윤효정은 자신의 저서에 그의 어려운 생활을 설명하면서도 김병기에게 청탁하는 것을 두고 '몰지각하며 비열하다'는 평을 짤막하게 내놓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양이(攘夷) 의식에 따르는)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였다. 문제는 당시 조선의 경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경복궁 중건 자체가 사실상 매우 무리한 계획이었던 점에 있다.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기에는 조정의 재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당백전이라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이 심하게 발생하는 등 매우 어지러워졌으며 간접적으로는 일제강점기를 막지 못한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경복궁 중건은 완성했으나 이로 인하여 안 그래도 힘든 조선의 경제 상황을 더욱 힘들게 악화시켰다. 일각에서는 그럴 돈으로 병력이나 키웠으면 적어도 일제강점기만이라도 막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대원군이 가톨릭을 탄압한 일로 인해 프랑스가 쳐들어왔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대원군은 무리한 쇄국정책을 기반으로 한 가톨릭 탄압으로 인해 안해도 될 전쟁을 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전투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역사가이자 유학자인 황현은 대원군의 월권행위와 독재를 지적, 비판했다. 황현에 의하면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내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명령을 발령할 수가 없었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대원군)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군주도 아니고 인사부서인 이조의 장이나 정승이 아닌 대원군에게는 인사 임명 권한은 없었다.
대원군 집권시 전국 각지에는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선정비도 세워졌다. 여러 고을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 자신이 직접 세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선정비 건립 자체가 불법이었고, 이를 대원군이 몰랐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개혁 정치의 핵심이자 목적인 불법적 관행을 제거하여 국가의 법체를 회복하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국왕의 아버지 라는 지위를 이용한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선정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임용한은 선정비와 척화비를 보면 독재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재자로 변해갔다고 평가했다.
매천 황현은 그가 권력남용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권력남용의 근거로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백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암살을 사주, 협력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명성황후가 반일성향으로 변신하자 명성황후 제거작업에 착수한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유길준은 그가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개인적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명성황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흥선대원군이 왕비 암살에 어느정도 영향을 행사했다고 본 윤치호는 대원군을 대완근(大頑根), 이역(李逆), 이친(李親)이라 불렀다.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은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면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러보고 명령하고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이나 주공과 같이 될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의 사정과 제반 조건이 중흥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그를명성황후 살해의 동조자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황현 역시 매천야록에서 그를 명성황후의 암살 협력자로 지목했고, 유길준 역시 그를 명성황후 살해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지목했다.
인재 채용에 있어서 폭넓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소설가 장덕조는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復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 편협하고 용렬하다는 비판도 있다.
본심을 숨기고 안동 김씨 문중을 찾아가 굴욕을 자처한 뒤 권력을 획득한 점 등 권력욕의 화신으로도 평가된다.
그는 일부러 김좌근에게 양아버지라 하면서 그에게도 용돈을 얻어 썼고, 김병기는 그를 심하게 무시했다 한다.
쿠테타를 일으켜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이재면을 추대하려 한 점, 1881년 8월의 이재선 역모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앉히려다가 실패한 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한 점,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데 협력해줄 것을 계속 요청한 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집권 후 사적인 보복을 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 당시 자신의 외6대조 노봉 민정중을 배향한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역시 예외 없이 철폐하라 명하였다.
고종의 친정 선언 직후인 1873년 12월 10일 명성황후의 침전에 폭약을 설치해 경복궁에 대화재를 일으킨 세력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이 의심받았다.
한편 대원군은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874년 11월 민승호가 정체불명의 불교 승려로부터 선물로 받은 꾸러미가 폭발, 민승호 부자와 감고당 이씨가 그자리에서 폭사한다. 소포 폭탄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흥선대원군의 복수극이 분명했다. 민승호와 그의 아들, 민치구의 부인 등이 그자리에서 즉사했고, 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친어머니 감고당 이씨는 몇시간 뒤에 사망했다.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대원군의 소행으로 여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한편 민영익 역시 폭사의 배후를 흥선대원군으로 보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대에 그가 하수인을 사주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이재선의 역모 사건에는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허욱, 권정호(權鼎鎬), 이철구, 이두영(李斗榮)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의 사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부이므로 흥선대원군은 처형하지 못했고, 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와 이두영, 이철구 등을 능지처참시키고, 고종의 이복 형인 이재선은 제주도 제주목으로 유배보냈다가 사사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 지어졌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무능하면서 욕심 많은 흥인군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어머니와 둘째 형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어, 이는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보다 무능력하면서 욕심이 많던 셋째 형 흥인군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1867년 3월 경복궁 공사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흥선대원군은 흥인군을 경복궁 중건 때 영선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당시 1년만에 전각과 재목이 방화로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형 흥인군을 책임을 물어 처형하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못마땅히 여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0년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 흥인군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민승호는 흥인군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의 동정을 엿볼 심사로 친밀감을 표했다. 그리고 명성황후에게도 그 속 뜻을 설명했다.
“흥인군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입니다. 대원군 10년 집정 기간 동안 부뚜막 아래 굶주린 개 같은 푸대접을 받았으니 그 속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런 위인인 만큼 조금 관대하게 대해주면 분명히 감복하여 시키는 대로 운현궁의 동태를 낱낱이 살펴 아뢸 것입니다.”
흥인군과 흥선대원군의 감정대립을 이용, 민승호가 그를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다시 흥인군을 이용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려 하였다.
흥인군은 재물을 탐하는 나쁜 버릇이 심했다. 그는 이 한 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 이러한 흥인군의 행동거지를 눈치 채지 못할 흥선대원군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예민한 촉수로 이미 흥인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단속하면서, 거꾸로 흥인군을 통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탐문했다. 그러자 애초 민씨 일파가 계획했던 대로 운현궁의 동태는 알 길이 없어지고, 의정 대신이라는 지위는 흥인군의 재물 욕심을 채워 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임오군란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6월 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 넘으려 하였다.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 이는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도 인용되었다. 그는 대원군의 형으로써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였다.
이재선 모역 사건의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라는 의혹이 있다. 이재선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흥선대원군이라는 말도 있었다.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재선을 부추겼고, 이윤용, 황현 등은 이를 간파했다.
쿠데타 계획이 구체적으로 정해지면서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이재선은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할 때 "큰사랑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큰사랑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계획을 듣고 곧바로 흥선대원군에게 알렸으며, 흥선대원군은 ‘벌왜’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했다고 추정된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계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81년 7월부터 유림들이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을 접한 대원군은 오히려 이재선을 독려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흥선대원군 역시 어리석은 이재선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도 별도로, 유림의 접촉 전에 30여명과 모여서 사람을 동원, 정변을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거사를 하루 앞둔 8월 20일 한밤중에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은 한자리에 모여 거사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했던 거사자금과 쿠데타군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1천 명으로는 어렵다는 의견이 사전에 나왔고, 승산이 없다고 본 일부는 비밀리에 이탈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병력들은 이탈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쿠데타 주도자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유생들을 선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거사시간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잡았다. 8월 21일 아침 7시쯤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금품을 갈취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 체포했다.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만약의 경우 쿠데타 모의가 누설되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었다. 그간 자신이 이들과 접촉한 이유는 역모를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대원군은 실패를 예상하고 역모세력의 입막음을 시도했다. 다른 죄명을 씌워 형조에 넘긴 것이다. 이재선은 8월29일 포도청으로 자진출두했다. 이재선은 억울하다고 하소연했고 증거가 없음을 빌미로 풀려났다. 그러나 비밀은 곧 들통나 1881년 8월 29일, 이재선을 비롯한 관련자 30여명이 체포됐다.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산성의 장교들이 의금부에 자수했고, 이윤용은 입궐, 고종과 명성황후를 직접 찾아가 고변하였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달 외 30명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자백했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관련자들과 대질신문을 통해 하나둘 진상이 밝혀졌다. 이철구 등 일부만이 이재선이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 쿠데타의 주모자는 이재선으로 귀결됐고, 흥선대원군은 빠져나갔다.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는 이윤용도 있었다. 이윤용의 첫 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였으며 계성월 소생이었다. 이재선의 동복 친누이였다고 한다. 이윤용은 이재선의 처지나 흥선대원군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다.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을 세웠다.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 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고종, 민비)에 고해 바쳤다.
1894년 대원군은 4회의 서신을 직접 보내 개화파 암살 지령을 내렸다.
1894년 9월의 개화파 제거 계획은 비록 법무협판 김학우 한 사람을 암살하는 데 그쳤지만, 이 사건이 대원군파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는 의혹이 강하게 일면서 조희연, 안경수, 김가진 등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직무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안경수, 김가진 같은 사람은 지방관으로 전임하기를 원하 였다.
1895년 5월 23일 김학우 암살에 관여한 인사들 가운데 주동자였던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은 특별법원에서 각각 모반죄와 모살죄로 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하수인이었던 고치홍, 이여익, 서병규, 이영배, 김한영, 장덕현, 최형순 등은 모살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아 백령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대원군파는 정국을 바꾸기 위해 김홍집, 김가진, 김학우, 이완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등 개화파의 중심 인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김학우만을 암살하는 데 그쳐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화파 제거 계획은 대원군의 지휘하에 고종주, 김국선 등이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전 도정궁 이하전 제거에 가담하거나 조장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대원군의 작가 유주현에 의하면 그를 이하전 사사를 뒤에서 공작한 배후로 의심한 이상지가 1863년 무렵 운현궁에 자객으로 들어왔다가 천하장안에게 발각되었다는 설을 채록, 자신의 작품에 기술해 놓았다.
박제형(朴齊炯)의 근세조선정감에 의하면 남병철은 흥선군이 이하전 사사에 관해 의심했다 한다. 박제형에 의하면 "안동 김씨 세도가와 의령 남씨 남병철은 흥선군을 깔보고 만나기만 하면 조롱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이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 하루는 흥선군이 남병철의 집에 갔는데 이날 남병철이 조용히 흥선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이하전의 역모를 알고 있었지?”라고 했다. 흥선군은 깜짝 놀라서 일순간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그대는 어찌해서 이러한 나쁜 연극을 꾸미는 것이오?" 했다. 남병철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시백(時伯)은 어찌 그리 담이 작소."라고 했다." 한다. 박제형은 또 "벌써 남병철은 슬기로운 눈총으로 흥선군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한번 시험해 본 것이었다. 흥선군은 그만 진땀이 나서 등을 다 적셨다.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십년감수했다"고 했다 한다.
이하전이 사사된 것에 흥선군도 일부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파락호 시절 그가 가난한 종친으로서 안동 김씨 일문에 신세를 지러 드나들 때 심의면 등은 궁도령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는 이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1863년 권력을 잡은 뒤 심의면 등을 처단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1864년 섭정에 오른 뒤 심의면은 파면되었고, 심의면과 그의 아들들은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어느 안동김씨 가문에서 자신을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웃은 심의면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보복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병기에게는 고의로 바보행세를 했으나 김병기는 그를 의심했다. 섭정이 된 뒤 김병기의 연회에 방문, 국수를 먹더니 탈이 난 것처럼 연극을 했다. 김병기에게 독살을 기도했느냐는 눈총이 가해지자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대원군이 토한 음식을 맛보았다.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대원군은 바로 일어나 장난이라 하며 되돌아갔다.
즉위 직전에 화양동서원 만동묘의 묘지기들 중 일부를 장살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 서원에 놀러 갔다가 서원지기와 시비를 벌였다. 의관도 정제하지 않고 서원내에서 부채질을 하자 서원지기들은 그를 발로 그를 차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대원군은 이 수모를 기억했다가 권력을 잡자, 아직 그때까지 살아있던 화양동 서원의 서원지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중 지금도 내가 똑같이 행동을 하면, 그렇게 행동하겠느냐는 질문에, 지금 오더라도 똑같이 대하겠다고 한 서원지기는 살려 돌려보냈다 한다.
그는 자신이 양반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한 이용은에 대해서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
형 흥인군의 집에 불이 난 것이나,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이 도망치다가 고환이 터져서 도망치지 못하고 살해된 것도 흥선군의 짓이라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한편 그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라는 것이다.
